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죄수의 질을 보면 그 나라 문명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 릴케

그대는 삶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때면 삶은 축제처럼 될 것이다.
어린이가 길을 가며
바람결 하나하나에서
많은 꽃들을 선사받듯
나날을 지나가게 버려두라.
그 꽃을 모아 아껴둔다는 것은
그 어린이의 생각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 어린이는 즐겨 머무르려는
꽃을 머리카락에서 가만히 뽑아
사랑스러운 젊은 해들을 향해
또 다시 손을 벌리고 있다.

한 모임에 갔다가 학원에서 논술을 강의하는 분과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는 교도소에서 인문학을 강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죄수들에게 인문학을 강의하여 성공한 사례가 있다고 하면서.

그와 얘기하면서 그가 바라보는 ‘범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범인은 가르치고 이끌어서 다시 이 사회에 복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아니면 가혹하게 처벌하든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데 익숙하다. 그 논술강사는 자신은 정상의 자리에서 비정상을 정상으로 이끌어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그런 ‘이성(理性)적 인식’으로 가능하냐는 것이다. 머리로 따져서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랭보는 말한다. ‘오직 신성한 사랑만이 세계에 대한 인식의 열쇠를 수여한다.’ 이 세계, 인간은 신성한 사랑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시무시한 폭력이 된다.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사고체계는 이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한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우리 사회를 고스란히 긍정하는 사고체계이다.

우리 사회의 죄수들을 생각해 보자. 우리 사회의 구조가 촘촘히 그들을 옭아매어 끝내 그들을 감옥에 갇히게 했을 것이다. 단적으로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의 사회 구조’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면 인문학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그들을 교화하여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이 정말 인문학적 일까?

다행히 죄수가 되지 않고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보내는 우리는 그들보다 잘 살고 있는 걸까? 머리로는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겠지만 몸은 안다. 그들이 죄를 저지를 때 우리도 동참했다는 것을.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런데 우리는 죄의 그물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리는 죄수가 아닌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내가 오늘을 정직하게 살았다면 그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도스토예프스키)’

우리 사회에서 오늘 하루를 정직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 모두 정직하지 않게 살았는데 그들은 죄수가 된 것이다.

우리는 죄수들을 구원하려 하기 이전에 먼저 인간, 세상에 대해 깊은 통찰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죄수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저절로 나올 것이다.

랭보는 ‘천재는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유년기로의 회복’이라고 했다.

‘그대는 삶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그때면 삶은 축제처럼 될 것이다./어린이가 길을 가며/바람결 하나하나에서/많은 꽃들을 선사받듯/나날을 지나가게 버려두라.’

‘그 꽃을 모아 아껴둔다는 것은/그 어린이의 생각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아껴두고 절약한다는 소유의식에 젖은 우리는 남을 구원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

‘그 어린이는 즐겨 머무르려는/꽃을 머리카락에서 가만히 뽑아/사랑스러운 젊은 해들을 향해/또 다시 손을 벌리고 있다.’

이런 경지를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은 ‘주이상스’라고 했다. ‘아이’만이 갖고 있는 ‘법열(法悅)’. 자신 안의 아이에 이끌려 살아가는 어른도 이 기쁨 속에 있다고 한다. 이때 랭보가 말하는 ‘신성한 사랑’은 우리 안에서 물결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 세계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고 어떤 틀에 꿰맞추는 폭력을 인문학의 이름으로 논술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이 자행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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