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그렇게 와 닿지 않았다. ‘세월이 쏜살 같이 빠르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정말 죽어라 시간이 가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지 않나. 그런데 쏜살이라뇨. 조금은 오버라고 느꼈다. 뭐, 멍청했던 거죠.

올해로 마흔 세 살이 되었다. 사십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뭐, 정말 달리지는 않지만요. 암튼 어디 가서 어리다고 어리광부리기엔 애매모호한 나이가 된 것은 확실하다. 아, 이런 일이 정말 벌어지네요.

살아오면서 잘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가끔 돌아볼 때가 있는 데, 그럴 때면 정말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무리 뻔뻔해도 당최 잘 한 일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있으면 반세기를 산 셈인데, 스스로 너 도대체 뭐하고 살았니. 묻고 싶다. 에효, 부끄럽네요.

이른 바 짬밥처럼, 살면서 자연스레 늘어나게 되는 인연만이 어쩌면, 유일한 성과이자 위로일지 모르겠다. 이건 내가 잘나서도 아니고, 친화력이 뛰어나서도 아니다. 그저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뭐 요새는 인맥 자랑도 서슴없이 하는 시대가 아닌가. 그런 면에서 나도 ‘아이언 맨’처럼 얼굴에 강철을 깔고 인맥 자랑 좀 하고자 한다. 짜증나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내가 태어난 1977년,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은 통일부(당시 통일원)에서 공직을 시작했다. 외교학과에서 공부했던 정 장관은 대학 은사의 영향과 김대중 대통령의 장충단 공원 연설에 감명 받아, 남북문제, 분단문제를 고민하게 되었고, 결국 애초 꿈꾸던 외교관, 교수가 아닌 통일부 공무원으로 이력을 시작하게 된다. 이것 역시 운명일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정부에서 통일부장관을 역임한 그는 퇴임 후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시민사회통일단체의 대표로 취임하셨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민간차원의 남북관계 개선과 교류협력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지금도 나는 가끔씩 장관님을 뵙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또 한 명의 저자인 황방열 기자는 대학원에서 만난 동기다. 누가 봐도 만만치 않은 까칠한 기자 스타일인 그는 항상 꼼꼼하게 따지고 숙고한 뒤 기사를 썼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에서 몇 안 되는 믿을만한 언론인이다. 지금은 서울시에서 남북교류협력단장으로 또 다른 이력을 써나가고 있다.

▲ 정세현·황방열,『담대한 여정 - 판이 바뀐다, 세상이 바뀐다』, 메디치. 2018. 8. [자료사진 - 통일뉴스]

자, 여기까지가 이른 바 인맥 자랑이었다. 부끄러워요. 그렇담 이것으로 끝? 그래도 서평인데, 그럴 리 없잖아요. 책의 뒤표지에는 이런 문장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격동하는 한반도 판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그렇다. 두 저자는 분명히 한반도의 정세가 바뀌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이야기한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과거를 냉철히 복기하지 못하면 현재를 꿰뚫고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 남북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남북의 어제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어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온전히 미래를 만들어갈 수 없다. 지극히 당연하다. 때문에 정 장관은 왜 지금 북한이 자신의 생명줄인 핵을 담보로 미국과 담판을 치르려 하는지 꼼꼼히 분석하고 설명한다. 그리고 미국 역시 왜 지금 이렇게 북한과 협상에 나서고 있는지 말해준다. 명쾌하다.

사상 최초의 북미정상회담이 지난 6월 이뤄졌고, 이제 2차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북미대화의 판이 만들어지고, 그 사이에서 우리가 일정한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북한과 미국의 결심이 무엇보다 큰 작용을 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을 어쩔 수 없이 협상에 나서도록 만든 북한 당국의 힘이다. 뭐, 트럼프의 유별남이 작용한 것도 분명 있지만요.

CVID가 사실 허무맹랑한 이야기인 것처럼, ‘돌이킬 수 없는 평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평화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고, 전쟁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언제든지 가능하다. 때문에 대책 없는 낙관은 금물이다. 국방부 예산을 더 마구마구 올려야 한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지만, 현 상태에 만족하지 말고 더 맹렬히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불가피한’, ‘정의의’, ‘선한’이라는 단어와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단어는 다름 아닌 ‘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까지 이어진 전쟁을 통해 남북 병사 및 민간인 400만 명, 중국군 100만 명, 미군 14만 4000명, 나머지 참전 국가 군인과 민간인 1만 4000명이 죽거나 다쳤다. 『토킹 투 노스 코리아』의 저자 글린 포드는 “최악은 전쟁이 수십 년간 남북관계를 해친 공포와 적의를 만들어내 남과 북을 서로의 거울 이미지로 변하게 했다는 것”이라 말한다. 적절한 지적이다. 여전히 우리는 전쟁을 완전히 끝내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말처럼 지금은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다. 때문에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평화 만들기에 쏟아 부어야 한다. 여기엔 민관의 구분이, 여야의 구분이 필요치 않다. 평화가 없다면, 나머지 모든 것도 없다. 분단 이후 한 번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했던 평화와 안정을 이제는 만들어낼 때가 왔다.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우린 그럴 자격을 충분히 갖췄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을 신격화할 필요도 없고, 북한을 악마화할 필요도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분석할 수 있는 힘을 더 길러야 한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남과 북이 주체적으로 이뤄내야 한다는 사실 역시 변함없다.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청와대 및 정부 부처에서 정 전 장관에 대한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 적이 있었다. 이제 남북관계가 바뀌었고, 국제정세가 바뀌었는데, 정 전 장관이 여전히 예전 이야기를 하며, 이른 바 훈수를 두고 있다는 불평이었다. 당시 정 장관은 분노하기 보다는 안타까움이 더했을 터이다. 아무리 훌륭한 조언을 해도 못 알아들으면 말짱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눈 밝고 귀 맑은 이들이 존재했기에,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노령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정 장관님의 헌신에도 경의를 표한다. 이런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행운이다.

야당은 끊임없이 정부의 대북정책을 헐뜯고 있다. 가만히 보면 뚜렷한 대책도 없는 것 같은데, 무조건 반대다. 뭐, 원래 그런 족속이니까 라고 생각할 일은 아니다. 한반도의 운명을 가지고 장난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하찮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남북관계가 파탄 나도 좋다는 심보와 행동은 그에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국민 전체의 안위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난 그들에게 내 평화와 안정을 넘겨준 적이 없다.

올해,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의 시기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남쪽을 방문하기 바라고, 북미정상회담이 예정대로 개최되어 핵 협상의 보다 큰 진전이 이뤄지길 바란다. 그리고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이념 갈등을 이제는 멈추고, 정말 행복하고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더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역시 어느 정도는 거기에 역할을 했다고 뻔뻔하게 자랑질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에효, 이러나저러나 얼굴에 강철판을 떼지는 못하겠구만. 모든 분들의 행운과 건강이 가득한 2019년을 기원한다.

“분단체제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사람들이야 끝까지 저항하겠지만, 평화를 사랑하고 번영을 바라는, 내 자식과 내 남은 인생이 지금보다 좋아지길 바라는 시민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새 세상이 오는 걸 준비해야 한다. 마음 자세는 물론이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 민족, 우리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필요하면 따지고, 여차하면 강력한 의사표시를 해야 한다. 주변 강대국에 ‘노(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평화와 번영은 대통령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만드는 것이다.” - 본문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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