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을 할까, 커피나 한 잔 할까?』(엘리엇 부 / 지식노마드 / 2012)라는 책이 있다. 온전히 책 제목에 이끌려 집어든 책이다. 하지만 여태껏 온전히 다 읽진 못했다. (그렇지 뭐, 내가.) 그럼에도 제목에서 느껴지는 어떤 만족감? 그 하나 만으로 구입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뭐, 죽기 전에는 읽지 않겠어?) 이런 믿음으로 살아간다. 아, 그 전에 커피나 한 잔 할까?

올해도 이제 한 달 남았다. 국가와 민족적 차원으로 봤을 때는 참 다행이었던, 아니 꽤 희망찬 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긋지긋한 분단의 갈등과 상처, 전쟁에 대한 두려움, 증오와 반목 따위에서 꽤 많이 벗어난 한 해였다. 그것만으로도 올해는 썩 괜찮은 시간들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나는? 나에게 2018년은 어떤 시간들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악이었다. 대내외적으로 극심한 혼란과 갈등의 시간이었다.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역대급으로 많았고, 나는 온전히 감당할 깜냥의 부족으로 남 탓만 줄기차게 하며 도망 다니기에 바빴다. 덕분에 주위 사람들을 상당히 피곤하게 만들었고, 민폐의 극치를 달리며 자학과 회의와 분노와 절망 사이를 오갔다. 한마디로 병신 같았다. (인정.)

무지하게 많이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이 정도 살았으면 어느 정도 정신이라는 것을 장착할 만도 한데, 왜 여전히 난 사춘기마냥 어줍지 않은 방황을 해온 것일까. 내 힘으로 온전히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이 세상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왜 그것을 온전히 내 힘으로 바꾸려 안간힘 썼던 것일까. 무모했던 것일까, 멍청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그러고 싶었던 것일까.

여전히 알 수 없다. 여전히 미궁이고, 햇볕은 보이지 않는다. 2018년을 맥없이 떠나보내고 있는 지금, 스스로 참 한심하다는 생각만 맴돈다. 그리고 나로 인해 상처받고 괜한 힘을 쏟아야 했던 이들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이것을 어떻게 만회해야 할까? 당최 노답이다. 수뇌급 회담을 통해 탑다운 방식으로 풀어내고 싶지만, 나와 테이블에 마주 앉을 수뇌가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내 안의 문제이니,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난항이다.

세상에 까칠함이 없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나름의 까칠함은 존재한다. 그것마저 없으면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저마다 경중은 다를 지라도 가시 한 두 개쯤은 품고 살아야, 살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런지 꽤 오래 되긴 했다.

까칠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온갖 갑질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때로는 정말 엽기적이랄 수밖에 없는 짓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인간들이 정녕 까칠한 것일까? 그야말로 무대포로,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고 온갖 어처구니없는 언사를 내뱉는 트럼프 같은 이들이 까칠한 것일까? 만약 그러한 것이 까칠한 것이라면, 참 지저분하고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지 않는 이들을 까칠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그런 트럼프가 정작 우리로서는 절실한 양반이니, 이것 또한 웃픈 일이다. 에잇.)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리고 저자가 생각하는 까칠함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있다. 책의 부제는 “상처받지 않고 사람을 움직이는 관계의 심리학”이다. 즉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으면서 상대를 내 편으로 이끄는 스킬을 ‘까칠하다’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상대를 움직이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암튼 우선 내가 상처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책은 강조한다. 뭐, 상처받고 싶어 안달난 사람은 없을 테니 이견은 없다.

▲ 양창순,『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 센추리원, 2012. 2.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저자는 정신과 전문의다. 상담을 통해 만났던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저자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관계의 해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해법에 대해 꽤 많은 이들이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책이 겁나게 팔렸으니 말이다. 저자의 핵심 제안은 ‘어설프게 개입하지 마라’ ‘깊게 파고들지 마라’ ‘본심에 귀 기울여라’ 등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부분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삶의 이유를 찾아가기에, 끊임없이 누군가와 소통하고 공감할 수밖에 없다.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는 누군가와 살아갈 수밖에 없다.

비극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세상 누구도 아무런 갈등이나 충돌 없이 100% 완벽하게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정말 죽이고 싶은 이들도 만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그들 앞에서 본심과는 다른 표정을 지어야 한다. 그 순간 자존감은 안드로메다로 사라지고, 독한 술 한 잔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된다. 가수 하림의 노래 제목처럼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기도 하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그렇다. 모든 것은 관계의 문제인 것이다. 그 영원한 난제, 미스터리.

올해 내가 좌절하고 분노하고 아파한 것도 사람 때문이었고, 그럼에도 버티고 다시 웃고, 일어서게 된 것 역시 사람 때문이었다. 물론!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은 아니겠지만, 난 사람 때문에 죽을 뻔 했고, 사람 때문에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사이 조금은 더 까칠해진 것 같다.(원래 그랬다고요?)

올해를 지나며 본의 아니게, 지나온 삶을 꽤 진지하게 돌아봤다. 즐거웠던 때, 슬펐던 때, 그저 그랬던 때. 그런데 유독 나를 아프게 했던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아니, 아예 내가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무지막지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당시에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내가 큰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큰 아픔을 주었던 것이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부당한 상처를 입고 쓰러지는 경험을 했기에, 비로소 그 반대의 기억들이 떠올랐다는 것을. 이런 개 싸가지 없는 인간을 봤나. 봤다. 매일 거울로 본다.

아무리 염치없는 녀석일지라도, 뒤늦게 참 미안했다. 정말 난감했고, 무참했다. 이젠 ‘그때는 정말 내가 잘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너무 멀리 왔기 때문이다. 지금 사과한다 해도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슬프고 더 부끄러웠다. 당시엔 그저 까칠함으로만 알았던 내 행동과 내 말이, 사실은 무지막지한 폭력이자 이기심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저자는, 어쩌면 빤한 결론을 짓는다. 결국 사랑이라고. 사랑으로 구원받을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또 다른 숙제를 던진다. 이는 단순한 까칠함이 아닐 것이다. 진정한 까칠함은 어쩌면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나의 소중한 무언가를 내던질 줄 아는 그 용기가 아닐까.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까칠함이 아닐까.

올해를 마무리하며 저자의 메시지와는 조금은 다른 까칠함을 생각해본다. 물론 나 역시 사랑이다. 하지만 더불어 정의로운 까칠함을 생각해본다. 매일 매일 그렇게 살아갈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2019년에는 나보다는 내 곁에 있는 그 누군가를 위해 까칠해질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소망한다. 정의당원은 아니지만, 조금 더 정의로운 내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사소한 일에 분노하더라도 정의로운 사소함이었으면 좋겠다. 노회찬 의원에게 부끄러운 인간으로 남고 싶진 않다.

모두들 한 해를 살아내시느라 수고 많으셨다. 애쓰셨다. 내년에도 더 행복하시고 더 사랑하시라. 보잘 것 없는 서평을 오랫동안 소개해주신 통일뉴스에 감사하고, 무엇보다 잡다하고 번잡하고 민망한 글을 너그럽게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그 누구처럼 문자 해촉되는 일이 없도록 내년엔 더 성실히 찾아뵙겠다. 감사합니다. 꾸벅! 아, 그리고.

맞습니다. 사실 전 원래 까칠하답니다. 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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