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짜증나는 하루였다. 아침 11시에 차를 대고 한 시간에 한 번씩 조금씩 앞으로 나가면서 무려 다섯 시간째 기다리는 것이었다. 인천 부근 바다에 있는 이 섬에 여름 휴가 때문에 온 것은 금요일인 그저께였다. 옆 텐트에 있던 사람들이 토요일 밤에 차를 대놓아야 일요일 아침에 나갈 수가 있다면서 서둘러야 한다고 토요일 아침부터 말을 하였다. 이 사람들 말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몇 시간을 기다려도 섬 밖으로 나가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주말이면 그랬는데 더욱이 여름 휴가까지 겹쳐서 일요일에 섬을 빠져나가려는 차들이 한꺼번에 몰리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였다.

긴가 민가 하는 마음에 뭉기적거리고 있었는데 마침 누이동생 선옥이가 토요일 오후에 일 끝내고 굳이 섬으로 들어오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들어오라고 하였는데 주위에 텐트를 친 사람들은 난리였다. 들어오지 말라고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옥이에게 그렇게 전화를 하면 선옥이는 그 사람들이 텐트 자리가 탐나서 그런 거라고 텐트 자리나 확보하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렇게 해서 토요일 밤에 차를 대놓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일요일인 오늘 다섯 시간씩이나 길에서 보내게 된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토요일에 섬에 들어온 김형수가 일행이 돼 주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의사인 김형수는 어제 이 섬에 있는 장애인 마을에 간호사들과 함께 갔다가 먼저 보내고 신돌석씨와 함께 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토요일에 들어왔기 때문에 차는 육지 쪽 선착장에 놓고 들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기다릴 것 없이 그냥 배를 타고 가도 되었다. 그가 지금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순전히 신돌석씨가 심심할까 봐 그러는 것이었다. 아내와 힘찬이, 아름이 부부, 그리고 선옥이네 식구들은 이미 배를 타고 떠난 뒤였다.

“이 사람 말이 맞잖아요. 다친 애만 실어 보내면 되지 왜 차 한 대를 보내요?”

“아 보호자가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럼 보호자하고 둘만 보내면 되잖아요?”

“당신은 갈 길이나 가슈. 웬 참견이야.”

“이 사람아 내가 참견하지 않게 일을 공정하게 해 봐.”

금요일 밤에 고동을 따러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야영지에 있는 이웃 텐트 사람들이 말렸다. 밤에는 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커다란 고동이 많이 붙어 있는 바위섬에 밤중에 가기가 좀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날 밤은 비까지 내렸다. 할 수 없이 하룻밤을 자고 토요일 오전에 가게 되었다. 가는 길은 선착장을 통해서 텐트를 친 해수욕장 반대편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선착장 근처를 지나는데 왠지 소란스러웠다. 토요일 오후인데 벌써 나가는 차들이 밀려 있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몰려서 웅성대고 있었다. 그냥 가려고 하다가 어쩐지 귀에 익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서 멈춰 섰다. 덩치가 크고 구레나룻이 덥수룩한 사람 하나가 핏대를 올리는 걸 보고 낯이 익었다 싶어서 가까이 가 봤다. 김형수였다. 그는 지금 들어오는 길인데 상황이 자기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끼어들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상황이란 것이 이랬다. 차들이 배를 타려고 줄을 서 있다가 배가 들어와서 앞으로 이동하는 과정이었는데, 봉고차 한 대가 문을 열어 놓은 채 출발하는 바람에 거기에서 한 아이가 떨어져 다쳤다는 것이었다. 관리하는 측에서는 봉고차를 앞으로 빼서 배를 타게 하였고, 지금까지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것에 항의를 하였다고 한다. 이때 배에서 내려서 섬으로 들어오던 김형수가 끼어들게 된 것이라고 한다.

신돌석씨는 역시 김형수답다고 생각했다. 남 일에 참견하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 그런대로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을, 그러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의사를 하면서도 편하게 살 날이 없는 사람이다.

신돌석씨와 인사를 나누고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싸움을 벌이는 김형수를 보고 있노라니 신돌석씨의 머릿속을 하나의 장면이 흐릿하게 떠오르면서 점점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눔아 허튼 수작 말고 찾아내란 말이다.”

5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흥분한 경상도 억양의 사투리로 말하고 있었다.

“알지도 못하지만, 알고 있어도 당신 같은 사람한테는 알려 줄 수 없어.”

젊은 남자도 지지 않고 대거리했다. 20대 후반쯤 되는 사람이었다.

옆에서 말리고 있던 한 사람이 조금 언성을 높였다. 30대쯤 되어 보이는 사람인데 덩치가 매우 크고 얼굴은 순하게 생겼는데 흥분하면 앞뒤 안 가릴 듯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김형수였다. 김형수와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이러지 말고 말로 하세요. 이게 뭡니까?”

“니는 누고, 니가 왜 끼어드나?”

불똥이 옆으로 튀었다. 그리고는 젊은 남자를 잡고 있던 손이 풀리면서 끼어든 남자를 향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멱살을 잡는 데 실패하였다. 김형수가 얼른 50대 남자의 손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 옆에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 끼어들었다. 그는 정장 차림이었다.

“그러시지 말고 차근차근히 말씀하시죠. 이러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요.”

손목을 붙잡힌 50대 남자는 머쓱해 하다가 구원자라도 만난 듯 그를 향해 하소연조로 말했다.

“출입국관리국에서 도망간 연수생을 잡아내라고 안캅니꺼.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연수생 배정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더. 우리네 사업이야 외국인 연수생 읍시면 말짱 파이라예.”

“그런데 왜 여기 와서 이러십니까?”

“아 이놈아가 빼돌렸다 안캅니꺼.”

그러자 젊은 남자가 틈을 만난 듯 말을 했다.

“내가 빼돌린 적도 없고, 난 그 사람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그 사람도 자기 발로 다닐 자유가 있는 거예요.”

“이런 빨갱이 같은 새끼. 또 오리발 내미네. 니가 알아도 안 갈쳐 준다고 안 했나.”

신돌석씨는 ‘빨갱이 같은 새끼’라는 말에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눈이 가리워진 채 한발 한발 내려가던 계단. 물소리, 라디오 소리, 쇠파이프, 두 손을 묶인 채 바라보던 욕조. 머리채를 휘어 잡힌 채 여기저기로 끌려갈 때마다 들려오는, 무심한 듯 낮게 깔면서도 증오가 가득 배어 있던 말. ‘빨갱이 새끼’였다. 발가벗겨진 온몸이 쇠파이프로 마구 난타당할 때도 살점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도 더 이상 자각할 수 없게 되고, 오로지 감각할 수 있는 것은 쓰라린 상처를 핥으면서 기어가는 듯하던 말. 바로 ‘빨갱이 새끼’였다. 어디 그때뿐이던가. 전경들이 두셋씩 달려들어 짓밟으며 팰 때도 꼭 하는 말이 ‘빨갱이 새끼’였다. 빨갱이 새끼라는 말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을 죽여도 좋은, 무슨 짓을 해도 좋은 만병통치약 같은 것이었다.

▲ [삽화 - 김윤기]

신돌석씨는 이곳에 올 때 이런 분위기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다. 어쨌든 여기는 선교회였던 것이다. 지금의 구로디지털역인 구로공단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타고, 다시 내려서 5분쯤 골목길을 걸어 들어왔다. 좁은 입구를 지나 2층에 중국집, 3층에 유치원, 4층에 교회가 있었다. 그 건물 옥상의 옥탑방에 마련된 이곳은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선교회였다. 입구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성경 구절이 쓰여 있었다. 선교회로서는 당연히 쓸 수 있는 말이고, 그 대상이 외국인 노동자들이라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건만, 신돌석씨는 왠지 그 성경 구절을 보고는 혹시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하고 망설였었다.

또다시 멱살을 잡고 뜯어말리는 몸싸움이 벌어지는 사이 정복을 입은 경찰관이 올라왔다. 이곳 선교회 쪽에서 파출소에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경찰관은 멱살을 잡힌 젊은 남자를 잘 아는 듯하였다. 번번이 귀찮게 만든다는 투로 이모저모 사정을 들었다. 신고한 것은 선교회 쪽일 텐데 좀처럼 선교회의 뜻대로 조치를 취할 생각을 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자 50대 남자가 한층 목소리를 높여 자기 이야기를 해 나갔다. 그렇지만 경찰관은 그 사람의 이야기도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경찰관을 사이에 두고 다시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황은 김형수와 좀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듯한 30대 남자 둘이서 끼어들자 금방 결판이 났다. 두 사람이 신분을 밝히며 자신들이 목격한 대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경찰관은 이내 방관자적 태도를 버리고 50대 남자에게 일단 파출소로 가자고 하면서 데리고 갔다.

경황 중에 인사도 못 나누고 보고만 있던 신돌석씨는 50대 남자에게 봉변을 당하던 젊은 사람이 자기가 만나려고 온 이 선교회의 대표 박재우 전도사라는 것을 알았다. 신돌석씨가 자기 소개를 하자 박 전도사가 연락을 받아서 알고 있다고 하면서 반색을 하였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30대 남자 두 사람을 소개했다. 그중 한 사람이 김형수였는데, 그때 그는 이 선교회에 1주일에 한 번씩 오후에 찾아와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무료 진료해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또 한 사람, 김형수보다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은 야당 국회의원 비서관이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의정활동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러 왔다가 이런 일을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수더분한 인상처럼 보이면서도 눈매가 날카로웠다. 통성명을 하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러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김형수와 그 사람도 서로 모르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둘이서 인사를 나누다가 서로 알 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국회의원 비서관은 신돌석씨가 오기 전에 이미 볼일이 끝났는지 먼저 돌아갔다. 김형수는 노동자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고, 신돌석씨는 전도사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선교회는 옥상에 있는 옥탑방 두 개를 빌려서 개조한 것이었다. 한 방은 박전도사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었고, 다른 한 방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찾아와서 머무는 곳이었다. 이곳을 찾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여러 유형이 있었다. 회사가 망한 경우도 있었고, 산재를 당한 뒤 치료 중인 사람도 있었다. 때로는 일부러 회사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숙식을 하였는데, 그래서 이곳을 외국인 노동자들의 피난처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그냥 부르던 것을 이제는 아예 간판으로 내걸었고,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도 이곳을 알고 찾으러 오는 바람에 오늘과 같은 일이 사흘이 멀다 하고 벌어진다는 것이었다. 대개는 말만 하다가 돌아가는데 이따금씩 오늘처럼 실력 행사를 하려고 드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별수 없이 경찰에 신고하는 일이 벌어졌고, 경찰들도 이제는 귀찮아한다고 하였다.

신돌석씨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외국인노동자 실태조사를 위한 설문지를 받아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신돌석씨는 징역에서 나온 뒤 놀다가 노동문제를 다루는 연구소에서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연구소에서는 외국기관의 지원을 받아서 외국인 노동자 실태조사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신돌석씨가 실태조사를 위한 설문지를 받아오는 업무를 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사람이 필요하니 일할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신돌석씨는 무척 망설였었다. 그때 신돌석씨는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생계 문제도 심각했다. 아내가 벌기는 했지만 애들이 어리기 때문에 아내가 버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신돌석씨가 마냥 애들을 봐주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신돌석씨에게는 귀가 솔깃해질 만한 제안이었다. 그런데도 신돌석씨가 그 일을 꺼려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아내가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그 일을 싫어하는 것은 외국인 노동자를 싫어하기 때문인데 그렇게 된 데는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다.

마루에서 전화 벨소리가 났다. 아내가 받았다. 몇 마디 가늘면서 톤이 높고 마디마디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추석 연휴 끝이라 이 집, 저 집 인사차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와 잠시 쉬고 있던 참이었다. 마루로 나섰다. 아내는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잠을 자다가 깬 딸아이를 둘러업었다. 딸아이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신돌석씨도 그랬다. 아내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통화는 끝났다. 마침내 딸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서야 아내는 눈물을 닦아 내며 어르기 시작했다.

“미경이 언니가 어제 죽었대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처자식, 부모형제, 절친한 친구가 아닌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묘한 감정 때문일까? 충격적인 가슴과 표정 관리하려는 두뇌. 사실 미경이라는 사람은 아내가 언니라고 부르며 따르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신돌석씨를 형이라고 부르며 절친하게 지내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약삭빠르게 표정 관리를 하라고 두뇌가 지시를 내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쩌다 그런 일이…”

한 템포를 늦추고 물었다. 아내는 대답 대신 아름이를 고모네 집에 맡기고 가봐야겠노라고 했다. 아름이는 딸아이의 이름이고 고모네 집이란 건 누이동생 선옥이의 집을 일컫는 것이었다. 마침 그때 일곱 살 먹었던 아들 힘찬이도 선옥이네 가 있었다. 형네 집에서 만난 뒤 선옥이가 힘찬이를 데려간 것이었다. 가보고 전화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여전히 신돌석씨는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침울한 표정만 짓고 서 있었다.

아내의 전화를 받고 저녁에 미경의 시신이 안치되어있는 병원 영안실로 갔다. 낯익은 얼굴들이 벌써 와 있었다. 다들 눈자위가 벌개져 있었다. 영정이 놓인 분향소 한쪽 귀퉁이에 머리 짧은 사람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성현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미경의 애인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이었다. 늦게 군대에 가는 바람에 말년이기는 해도 아직도 군인 신분인 그는 사복을 입었지만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성현을 보자 비로소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미경이. 40킬로가 간신히 넘는 새털 같은 몸으로 항상 분주하게 다니던 여자. 그 여자를 처음 만난 것은 86년쯤인가 대학 다니다 그만두고 현장에 들어왔을 때였다. 그때 신돌석씨는 미경이가 속해 있는 현장팀에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 팀을 책임지고 지도하는 지도선이라고 하는 사람과 함께 그 팀에 들어가서 현장 상황을 이야기해 주고, 초기에 현장에서 지켜야 할 일들을 조언해 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었다.

처음 미경이를 봤을 때 저렇게 작고 여리게 보이는 여자가 어떻게 현장 생활을 할까 걱정이 됐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신돌석씨는 미경이의 현장 생활에 대해 유달리 세심하게 조언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 팀의 지도선이라고 하는 여자한테는 별로 좋지 않게 보였던 것 같다. 그 여자는 반대로 심하다 싶을 정도로 미경이를 몰아세웠다. 물론 전적으로 신돌석씨의 느낌일 뿐이지 객관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미경이는 현장 생활 6개월 만에 짐을 싸들고 떠나버렸다. 그 뒤 복학을 했고 졸업을 한 뒤 약국에 취직을 했고, 나중에는 약국을 차렸다. 노동자가 되려고 하다가 약사가 되어서 지역 운동을 하게 된 것이었다.

▲ [삽화 - 김윤기]

성현이와는 같은 학교 동기로 학교 다닐 때부터 연인 사이였다고 하였다. 미경이가 현장에 들어왔을 때 성현이는 학생운동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로부터 3년쯤 지난 뒤 성현이도 현장에 들어왔다. 그래서 신돌석씨와 알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때 학생운동으로 수배가 된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그것 때문에 성현은 제대로 노동운동을 하지도 못한 채 우여곡절을 거치고는 늦은 나이에 군대 가는 것으로 정리가 되고 말았었다.

사실 미경이가 현장을 그만둔 데는 신돌석씨의 탓도 있었다. 미경이는 현장 생활을 매우 힘들어했다. 체력부터 달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노동자들과 겉모습이나 생활 습관부터 많은 차이가 나니까 그만큼 정신적으로도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신돌석씨가 잘 챙겨 주니까 신돌석씨를 꽤 따르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모임 이외에 따로 만나는 때도 있었다. 술도 함께 마셨다. 그것이 조직에 보고되고 지도선인 여자는 미경이를 여지없이 닦아 세웠다. 신돌석씨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반성문까지 썼다.

그런데도 또 만났다. 왜 그랬을까. 신돌석씨는 그때 이미 지금의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고, 아내는 힘찬이를 배고 있던 때였다. 신돌석씨가 반성문을 쓴 뒤에도 미경이를 따로 만났다는 사실을 아내는 지금까지도 모른다. 아니 조직에서 아무도 모른다. 둘이는 지하조직에서 만난 관계이면서도 그 지하조직에서도 비밀스럽게 서울로 가서 만나곤 했다. 만나서 그냥 술만 마시고 이야기만 나누었다. 서로 그 이상이라고 이야기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둘만 몰래 만난다는 사실이었다.

언제였던가. 그 시절부터 4-5년은 전인 것 같았다. 오전 휴식 시간이었다. 기름 묻은 손을 작업복에 적당히 문지르고 햇살이 따스한 곳을 골라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 경리 아가씨가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저 노래 제목이 뭐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밀밭길 울타리 사이로 조그만 오솔길 있네’로 시작되다가, ‘어이해서 너와는 만날 수 없고 빈 하늘만 내 맘처럼 허전한가’로 끝을 맺는 노래였다. 우혜와 함께 다니던 시청 앞 고갯길에 있던 음악다방이 생각났다. 우혜, 신돌석씨가 공장에 처음 들어와서 알게 된 여자였다. 음악다방에서였다. 신돌석씨는 그 여자를 보면 우헤헤헤 하고 웃다가 태어났냐고 놀렸고, 그 여자는 신돌석씨더러 돌돌돌돌 돌다가 나왔냐고 맞장구를 쳤다. 새털처럼 가벼운 여자였다.

두 사람은 서로 대학을 다닌다고 했다. 그 여자는 무슨 전문학교를 다닌다고 하였는데 그때는 전문대학을 그렇게 불렀었다. 그리고 신돌석씨도 친구가 다니는 학교를 다니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게 오래 갈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출근을 하다가 밤일을 하고 전자공장에서 나오는 그 여자를 발견했다. 그 여자도 신돌석씨를 봤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만났다. 하지만 말만 꺼내면 서로 막말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웃기는 것은 서로가 누구인지 알게 된 뒤부터 아주 쉽게 여관을 드나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이가 오래 갈 수가 없는 일이었다. 우혜는 그 뒤 진짜 대학생을 만났다고 하는데 결혼까지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미경이를 보고 우혜를 바로 떠올렸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의 밑바닥에는 그런 작용이 일어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미경이를 보고 왜 우혜가 떠올랐는지 그 까닭이야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 노래가 들려올 때마다 그 이후로도 우혜를 떠올렸고, 미경을 떠올렸다. 아니 그 노래는 그 이후 거의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졌다. 신돌석씨에게 그 노래가 들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미경이 먼저 떠오르고 그 노래가 머릿속에서 울렸으리라. 아니 우혜가 먼저 떠오른 것일까. 그리고는 이내 누가 알까 봐 의식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랬던 미경이 천진하게 웃는 낯으로 사진 속에 들어가 있었다. 저렇게 웃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앞에 웅크리고 있던 성현이 천천히 신돌석씨에게로 다가왔다. 둘이는 잠시 두 손을 부여잡고 포즈를 취한 뒤 부둥켜안았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것은 액체가 되어 버리자 이미 제동장치가 풀린 채로 흘러내렸다. 이따금씩 성현이 내는 신음 소리가 온몸에 전달되었다.

▲ [삽화 - 김윤기]

자리를 잡고 앉자 간간이 사건 경과가 들어왔다. 살인사건이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 외국놈들을 싸그리 몰아내야 한다. 제 나라 국민 목숨 하나 못 지키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 데모 막는 경찰들을 치안 유지에나 돌려야지. 침울한 분위기의 상가라 대체로 가라앉은 조용한 분위기였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신돌석씨의 귀를 이따금씩 자극했다.

미경은 성남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미경이 하는 약국을 지역 약국이라고 불렀다. 지역운동을 하는 약국이라는 뜻일까? 하필 추석 연휴 기간에 약국을 열었다가 일을 당했다. 미경을 살해한 자는 외국인이라고 하였다. 미경이 성남에 사는 외국인들과 가까이 지낸다는 것은 아내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미경이 가깝게 지내는 외국인은 미국인이나 유럽인 혹은 일본인이 아니었다. 필리핀인, 방글라데시인, 네팔인 등 이른바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추석이라도 고국에 가지 못하고 국내에서도 딱히 갈 데가 없는 이들을 위해 약국을 열었던 모양이었다.

미경의 약국에 자주 들르던 필리핀인이 있었다. 나이는 스물한 살. 한국에 온 지 10개월이 되었다고 하는, 봉제 공장에서 재단 시다로 일하는 남자였다. 미경보다 거의 열 살 가까이 아래인 이 친구가 미경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는지, 올 때마다 장미꽃을 사 들고 왔다 한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한국 여자는 왜 이렇게 아름답냐는 것이었다나. 그가 미경을 살해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와 미경 이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미경의 시신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고 하였다. 새털처럼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여자를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야 했을까.

장례 절차 때문에 이리저리 다니던 아내가 현준과 성현이 앉은 자리로 왔다. 경찰에서 사건을 조기에 마무리 지으려 한다고 했다. 미경의 가족이 원하는 바라는 것이었다. 피의자가 범행을 순순히 자백하고, 확대해서 얻을 것도 없는 바에야 조용히 끝내고 싶다는 것이 가족의 바람이었다. 아내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소주잔을 들이키고는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영안실 저쪽 편에 낯익은 여자가 있었다. 경순이라는 여자였다. 미경이가 현장에 들어왔을 때 이른바 지도선이란 것을 했던 여자였다. 경순이라는 이름은 가명이라고 알고 있다. 본명이 무엇인지는 지금껏 모른다. 그 여자도 그리고는 얼마 뒤에 임신을 하고 조직 활동을 그만두었다. 그 뒤 어디 여성단체에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른다. 그러고 보면 서로 좁은 방에서 만나서 이러쿵저러쿵 했지만 사실 아는 것은 별로 없는 사이였다. 그 여자가 오랜만에 사람을 만났다는 듯이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가끔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가까이 가서 인사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신돌석씨와 민해가 사귀면 노학연정이 될 텐데 안 됐네요. 그런 사귐을 조직이 인정해 줄 리가 없으니 말예요. 민해 너 정신 차려.”

신돌석씨도 참석한 모임에서 그 여자는 싸늘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했었다. 민해는 미경이가 쓰던 가명이었다. 민중해방의 준말이라고 했던가. 아니면 민족해방의 준말. 민중해방이었을 것 같다. 경순이란 여자는 미경이의 두 배는 되는 몸집을 가졌던 여자였다. 그 여자 앞에서 미경이는 손아귀에 놓인 한 마리 참새처럼 파르르 떨고 있었다. 신돌석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궁금했다. 지금도 궁금하다. 그런 사귐을 조직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신돌석씨가 아내가 있는 몸이니 그것은 불륜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노동자와 인텔리가 사귀어서는 안 된다는 말일까. 후자는 순전히 신돌석씨의 자격지심이 빚어낸 생각이라는 것을 신돌석씨는 잘 알았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고 한동안 신돌석씨는 인텔리들을 만나는 것을 꺼렸다.

그리고는 떠났던 미경이가 몇 년 뒤 약사가 되어 나타났다. 떠나기 전에 미경이는 그런 말을 했었다. 2학년 때 그만두고 현장에 들어오려고 했었는데 미뤘다고. 그때 그럴 걸 그랬다고. 무슨 뜻인지 알 듯 모를 듯했다. 미경이는 3학년을 마치고 현장에 왔었다. 만약 그랬다면 1년 이상 일찍 현장에 오게 되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미경이 짜증을 냈었다. 내가 그걸 꼭 형한테 설명을 해야 돼요 라고 하면서. 약사 가운을 입고 나타난 미경은 신돌석씨를 보면 아무일도 없었던 듯 태연하게 대했다. 물론 신돌석씨도 겉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스스로를 향해 채찍을 갈겼다. 이 바보 같은 놈, 한심한 놈, 나쁜 놈 하면서.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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