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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째 이야기, 철마는 달리고 싶다(1)<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17)
글 정해랑/삽화 김윤기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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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17  10:4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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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연재를 시작하며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뒤, 돈도 없고 학벌도 안 되고 빽도 없어서 서울 근교 공단에 있는 중소기업 공장에 취직했던 신돌석씨. 가진 거라곤 의리 있게 산다는 생활 신조 하나였던 그가, 27세 되던 1985년 전국의 공단지역을 휩쓸었던 노동운동의 폭풍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인생의 변화를 겪고, 의리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어느덧 이순의 나이가 되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그러나 있을 수 있었던,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허구의 이야기는 과거만을 다루는 후일담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필요했는지,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결국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인지를, 살 만한 세상이 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 보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정해랑

 

 

   
▲ [삽화 - 김윤기]

나이가 환갑이 되니까 하루가 멀다고 부모님 장례식, 자식들 결혼식을 알리는 소식이 온다.  오늘은 중학교 동창 김동환의 딸이 결혼하는 날이다. 김동환 하면 여러 가지 생각이 난다. 중학교 동창으로 아직도 만나는 몇 안 되는 절친 중 하나이고, 그 딸이 결혼한다고 하니 다른 친구들도 만날 일에 마음이 설렜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김동환은 중학교 동창이지만 전혀 다른 경로로 노동운동을 하면서 만났기 때문에 더욱 특별한 의미를 두게 되는 친구였다. 

  이 친구를 생각하면 민주 정부라는 것이 과연 노동자에게 무슨 의미인가 라는 것을 고민해 보게 된다. 아직 신돌석씨에게 정리되지 않은 숙제이다. 김동환은 철도노동자로서 처음에는 공무원으로, 이후에는 공기업의 직원으로 노동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른바 민주 정부에서만 구속이 되었다. 그 생각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결혼식은 오래 철도노동자로 근무하다 명예퇴직한 김동환답게 용산에 있는 철도회관에서 했다. 신돌석씨와 김동환을 비롯하여 결혼식에 모인 친구들은 모두 중학교 동창으로 중학 시절에 함께 친하게 지내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갈 때까지 두레박이라는 친목회를 만들어서 함께 놀기도 하였다. 

  그때 두레박이라는 이름은 두레박이 물을 긷듯 그렇게 요긴한 것을 길어 내는 역할을 사회를 위해 하자는 뜻이라면서 김동환이 제안해서 지었던 것인데, 의미 있는 일을 하기보다는 마치 두레박으로 술을 퍼마시겠다는 듯 만나기만 하면 술만 퍼먹곤 하였었다. 그리고는 군대를 간 뒤 서로 함께 만나는 일은 없었다. 둘씩 셋씩 만나기는 했어도 한꺼번에 만나지지는 않았다. 

  두레박이라는 친목회는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이었다. 다만 회장이었던 윤흥식이 개별적으로 연락을 취하곤 했었다. 특히 윤흥식과 김동환은 둘 다 공무원이고, 사는 지역도 비슷해서 자주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신돌석씨도 윤흥식과 여러 차례 만났고, 김동환과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두레박을 만들 때 구성원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그런데 군대를 갔다 오고 세월이 흐르다 보니 두 명은 아주 소식이 끊어졌다. 외국으로 이민 갔다는 말도 있는데 확인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 호프를 한잔하면서 신돌석씨는 10여 년 전에 김동환의 집에 찾아갔던 일을 떠올렸다. 그 날도 김동환을 제외하고 오늘 온 네 명 중 세 명이 모였었다. 김동환의 집은 그때 철도박물관과 가까운 부곡역 부근이었다. 신돌석씨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는 가운데에도 혼자 그 옛날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2005년이었던 것 같다. 부곡역에 닿으니 여덟 시에서 오 분이 남아 있었다. 이미 날은 저물었고 한여름이지만 사방은 어두웠다. 저녁을 먹고서 만나자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늦은 시간에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함께 가기로 한 집에 폐가 되지 않게 하자는 배려 때문이었다. 

  약속 장소인 부곡다방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신돌석씨는 아직도 ‘다방’이라는 이름을 쓰는 곳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은근한 친근감마저 느껴졌다. 물론 그때 그곳에 처음 간 것은 아니었다. 10여 년 전에 그곳에 간 적이 있었고, 그 뒤로도 몇 차례 왔었다. 이전과 비교해 보면 주변의 모습이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때는 철도대학과 철도박물관 이외에는 거의 건물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주변 멀리까지 집들이 생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은 농촌 속에 철도 관련 시설들이 들어서 있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개발되어 가는 소도시의 분위기가 뚜렷했다. 하지만 아직도 시골 분위기가 남아 있었고, 그런 만큼 친숙하게 여겨지는 곳이었다. 

  전날 전화를 받았다. 안양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근무하는 윤흥식이었다. 그도 물론 중학교 동창이고, 두레박 모임의 회장이었다. 윤흥식의 말로 철도청에 근무하는, 같은 중학 동창생이고 두레박 회원인 김동환이 6월 28일에 있었던 파업 때문에 구속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친구들끼리 한번 그 집에 가서 위로의 말이라도 전하고 영치금이라도 좀 주고 오자는 것이었다. 그 전화를 받는 순간에 텔레비전에서는 현대자동차의 교섭이 타결되었다는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회사측이 일방적으로 양보만 한 것처럼 보도가 되는 가운데 이제 현대자동차의 노동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놀게 되었다는, 재벌 산하 연구기관 연구원의 말도 이어서 나왔다. 그런데 김동환은 구속되고 있다니. 왜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일까. 신돌석씨는 문득 며칠 전에 경제단체 책임자 중 한 사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나라는 기업은 법을 어겨서는 안 되고, 노조는 법을 어겨도 되는 나라라고 그는 말했었다. 그런데 왜 노동자만 구속되는 것일까? 

   
▲ [삽화 - 김윤기]

  다방은 지하에 있었다. 문을 열고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선 뒤 다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듯했다. 아주 오랜만에 맡아 보는 냄새였다.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에어컨은 있지만 틀지 않았고, 낡은 선풍기 두 대가 이쪽저쪽 탁자 위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마담인 듯한 여자가 ‘어서오세요’라고 제법 콧소리까지 섞어 가며 말하였다. 그 여자의 짙은 화장을 보자 신돌석씨는 문득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라는 유행가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어지는 내용이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인데 마담에게 농담이라도 건네 볼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스쳐갔다. 신돌석씨는 여자를 지나치게 밝히는 편은 아니지만 여자들과 실없는 농담을 보통 이상은 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과거에는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것이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깊이 젖어든 타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뒤로는 여자들과 농담하는 것을 어색하게 생각하는 자신을 느끼게 되었다.

  커다란 어항이 있고 네 명씩 앉을 수 있는 탁자가 나란히 두 개가 놓여 있는 곳에 윤흥식이 먼저 와 있었다. 역시 회장은 회장이었다. 두레박이라는 친목회는 없어졌지만 회장은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었다. 누구나 다 윤흥식을 회장으로 인정했고 한동안 자기도 이제 이런 일에서 벗어나겠다고 하던 윤흥식도 이젠 체념했는지 그냥 묵묵히 회장 구실을 했다. 윤흥식을 생각하면 미안하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고맙다는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사실 서울에서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이 만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사람이 끊임없이 연락을 해야지 가능한 일이었다. 윤흥식이 바로 그런 일을 했던 것이다. 

  신돌석씨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입구에서 최준용이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중학교 때부터 덩치가 큰 편이었던 최준용은 이제는 살까지 붙어서 거구 그 자체였다. 문을 열고 좁은 통로로 내려 올 때는 이 다방이 너무 왜소해 보일 정도였다. 최준용이 어두운 조명 아래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서서히 몸집에 붙은 살은 빠지면서 어느새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목을 잠그는 호크는 빼고 맨 위 단추도 풀어헤쳤다. 삐딱하게 젖혀 쓴 모자는 평창에 가까웠다.

  음악이 흘렀다. 타미로가 부르는 ‘디지’였다. 리듬도 그랬지만 디지 아임 소 디지 어쩌구 하는 가사가 귀에 익었다. 신돌석씨는 그 부분 밖에는 부를 줄 몰랐다. 하지만 그 노래가 나오면 왠지 흥겨웠었다. 최준용과 함께 들어간 곳은 2층인데도 조명이 어두웠다. 원조분식센터라고 했다. 안국동 쪽으로 해서 광화문 네거리를 거쳐 걸어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광화문 네거리에서 새문안교회 쪽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던 것 같다. 아직 한여름이 되기에는 멀었지만 그래도 5월 말의 햇살은 대로를 걸어서 다니기에는 따가웠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최준용이 떡볶이와 팥빙수를 시켰다. 신돌석씨는 그냥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최준용은 이런 데 익숙했지만 신돌석씨는 처음이었다. 물론 화신 건너편 신신백화점에 있던 신신 분식센터와 낙원상가의 분식센터 등에 안 가 본 것도 아니었다. 물론 여럿이 함께 어울려서였다. 그때마다 최준용이 안내하는 편이었다. 그 외에도 낙원상가 옥상에 있던 롤러 스케이트장에서 놀아 보기도 했다. 명동 코스모스 백화점 옥상에 있던 롤러 스케이트장에도 갔다. 이런 곳들이 70년대 초반과 중반쯤에 이른바 논다고 하는 애들이 죽치던 곳이었다. 신돌석씨는 이른바 노는 애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준용은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최준용은 2년 선배 때부터 조직되었다고 하던 도끼클럽에 소속돼 있었다. 그는 그 클럽의 애들과 놀면서도 신돌석씨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신돌석씨가 그런 곳에 가게 된 것은, 이를테면 최준용이 순진한 친구들에게 견문을 넓혀 주려고 한 배려 덕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원조분식센터는 처음이었다. 이곳이 당시 종로 근처에 있던 곳 중에서는 가장 센 애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 까닭은 근처에 재수학원이 있었는데 고입반 재수생들이 이곳에서 놀았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중3들은 가봤자 삥이나 뜯기지 않으면 다행인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순진한 애들은 아예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학교에서도 특히 이곳을 지정해서 가지 말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름이 그렇듯이 불량학생들의 원조들이 모이는 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요즈음에 더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신돌석씨 역시 그랬다. 그런 마음을 최준용이 눈치 챘는지 자기와 함께 가자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최준용의 제안에 좀 망설여졌지만 그러마 라고 했다.

  “야, 돈 좀 있으면 50원만 주라.”

  최준용보다 키는 좀 작지만 언뜻 보기에도 훨씬 더 불량해 보이는 녀석들이 다가와서 말했다. 신돌석씨는 최준용과 잘 아는 애들인 줄 알았다. 이웃 중학교 학생들이었는데 이곳에서 만나서 사귄 걸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최준용의 반응을 보니 아닌 듯하였다. 최준용은 인상만 쓰고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시비 거는 방식이었다. 최준용이 혼자 와 있으니까, 아니 신돌석씨와 둘이 와 있지만 그들이 보기에 신돌석씨는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했으므로, 이런 때 시비를 걸어서 기를 죽이려고 했었던 것이었다. 

  “너도 없냐.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먹고 살자.”

  최준용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들은 신돌석씨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돌석씨는 갑작스런 접근에 당황해서 최준용의 눈치만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정말 그러지 말자. 센타 해서 나오면 10원에 한 대씩이다.”

  그들은 신돌석씨의 가슴에서 배 있는 곳을 더듬기 시작했다.

  “야이 씹새들아. 걔는 건들지 말아.”

  최준용이 탁자를 탕하고 내리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그들은 최준용의 기세에 잠시 눌리는 듯 주춤하더니 이내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어쭈. 이 씨팔 자식이 말을 할 줄은 아는 모양이구나. 난 또 벙어리인 줄 알았잖아. 그래서? 그래서, 어쩔 거시냐.”

  “돌석아 너 먼저 가라.”

  낮게 깔린 목소리로 최준용이 속삭였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뒷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들도 따라 나갔다. 신돌석씨는 아주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멍한 상태가 되어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혼자 갈 수는 없었다. 의리도 의리려니와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다. 신돌석씨는 그렇게 노는 애들과 어울리면서 싸움판에 끼어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싸움에는 그렇게 처지는 편은 아니었다고 스스로 생각해 왔었다. 두 명의 악당한테 친구를 혼자서 남겨 두고 가는 것, 신돌석씨 사전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삽화 - 김윤기]

  잠시의 망설임을 떨치고 허둥지둥 최준용과 그들이 나간 뒷문으로 쫓아 나갔다. 뒷문은 골목길과 연결되어 있었다. 신돌석씨가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상황은 진행 중이었다. 아니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최준용이 한 녀석의 얼굴을 머리로 박아서 코피를 터뜨린 뒤 또 한 녀석을 밀치고 골목을 뛰어나가고 있었다. 최준용은 머리가 유달리 커서 헤딩이 주특기였다. 그를 생각할 때면 그래도 시대를 잘 타고 났다는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나곤 했다. 그 큰머리로 지금 무엇을 할 것이냐. 요즈음에는 노조위원장을 하려고 해도 대두는 결격 사유가 되었다. 머리 큰 사람한테는 표가 잘 모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진짜 그런 것인지 누가 확인해 본 적은 없겠지만 아무튼 머리 큰 것이 마치 커다란 결점이라도 되는 양 놀림감이 되는 것이 요즈음 세태였다.

  신돌석씨는 최준용이 뛰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차 하는 마음에 다시 되돌아서 달아나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코피가 터진 녀석은 계속 코를 싸매 쥐고서 끙끙대고 있었지만, 또 한 녀석이 일어나면서 신돌석씨의 팔을 잡고 냅다 한 대 갈겼다. 생기기는 얍삽하게 생긴 녀석이 주먹은 꽤 매웠다. 신돌석씨도 얼른 발길로 맞받아쳤다. 그러는 사이 도망가던 최준용이 멈춰 섰다. 그리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둘이서 그 녀석을 패주는 꼴이 되었는데, 그다지 오래 가지 않은 뒤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어디에서 왔는지 골목으로 대 여섯 놈이 몰려들었다. 이 놈들의 친구들인 듯했는데 그 중에는 키는 작지만 고2 뱃지를 단 녀석도 있었다. 그 녀석이 아마 가장 선배로 리더인 듯했다. 신돌석씨와 최준용은 그 녀석에게 일장 훈계까지 들으면서 얻어맞아야 했다.

  “짜식들아, 친구끼리 왜 싸우고 그래. 잘 지내. 알았어? 쪼그만 짜식들이…”

  키는 조그마한 게 나이 두 살 많다고 쪼그만 짜식 어쩌구 하면서 훈계를 할 때는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아랫배에 주먹을 날릴 때는 좀 아찔하기도 했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이 얼른 떠오를 정도였다. 그는 모두에게 훈계를 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최준용에게 한 방 먹이고, 또 신돌석씨를 한 대 치고 하였다. 그런데 그런 상황도 잠시였다. 사복을 입은 덩치 큰 녀석들 셋이 들어섰다. 이번에는 또 상황이 반전되었다. 그들은 최준용의 선배로 재수학원 고입반에 다니는 삼수생, 재수생들이라는 것을 나중에 들어 알았다. 이들이 들어서자 골목 안은 갑자기 공포의 분위기였다. 최준용의 말로는 이들이 이 근처를 휘젓고 다녔다고 하는데, 최준용이 속해 있던 ‘도끼파’를 만든 자들이면서, 그 당시에 종로 일대에서 유명하던 ‘집시’라는 폭력 써클 멤버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이들이 들어서자 먼저 왔던 고2는 멋쩍은 웃음을 웃으며 자기가 싸우는 것을 말렸다고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이야기를 듣기만 하다가 고2를 제외한 나머지 애들을 무릎 꿇게 한 뒤에 앞으로 최준용이를 건드리면 이 바닥에 오지 못할 줄 알라고 겁을 주었다. 최준용이는 괜히 근엄한 표정을 지었으며 신돌석씨도 은근히 흥분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방범대원들이 어디서 신고를 받았는지 골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사복 차림의 한 사람도 왔는데 형사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학교 선생님이라고 하였다. 최준용이 신돌석씨에게 먼저 가라고 말했다. 신돌석씨는 안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별안간 신돌석씨의 뺨을 후려쳤다. 빨리 가란 말이야 새끼야. 신돌석씨는 얼떨결에 한 대 맞고 나중에 온 녀석들 속에 묻혀서 분식센터 뒷문을 통해 빠져 나갔다. 

  세 명의 삼수생, 재수생과 고2가 방범대원에게 너스레를 떨면서 자기들이 싸움을 말리려고 했다고 했기 때문에 방범대원들은 이들을 막지 않았다. 또 사실 이들을 힘으로 막는다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나중에 최준용에게 들은 말이지만, 방범대원만 있었으면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될 수 있는데, 학생 지도차 나왔다는 선생 때문에 할 수 없이 몇 명은 학교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이 일로 최준용은 무기정학을 받았다. 같이 있던 애가 누구냐고 학교에서 추궁을 받았으나 그는 끝내 아무도 없었다고 버텼다. 그것 때문에 좀 과장을 한다면 엉덩이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맞았다고 했다. 신돌석씨는 최준용이 추궁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몇 번이나 학생과에 갈까 하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윤흥식이 말렸다. 그런다고 최준용에게 도움 되는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부터 신돌석씨는 최준용이라면 항상 한 수 접어주고 갈 수밖에 없었다.

  “돌석아 정말 오랜만이다.”

  최준용이 신돌석씨의 손을 꽉 잡았다. 정말이지 최준용과는 너무나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그와도 군대 갔다 온 뒤에 전혀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은 본의 아니게 여러 차례 만날 수밖에 없었고, 또 본심과는 달리 연락을 일부러 끊은 적도 있었다. 

  86년쯤 되었을 것 같다. 85년에 현장에 들어간 인텔리들 때문에 홍역을 치른 공안당국은 위장취업자를 색출하느라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 들어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학출들은 넘쳐 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학생운동권의 학생들에게는 노동운동이 일종의 유행 같은 것이기도 했던 것 같다. 아무리 보아도 노동운동을 할 만한 사람들이 아닌데도 하겠다고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차라리 다른 일을 하거나 사무전문직 분야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것이 더 나았으리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많았다. 

  어쨌든 그러다 보니 그런 사람들은 가명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상대가 인정해 주는 가운데 이름을 빌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지만 그게 그리 쉬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조직에서 생각한 방법이 주민등록증을 위조해서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우선 지하철역 화장실 등에 버려진 주민등록증을 수거하기도 했다. 소매치기들이 지갑을 훔친 뒤 돈만 빼가고 신분증을 비롯한 나머지를 지갑과 함께 지하철역 화장실에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서 위조해서 쓰자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도 몇몇 사람과 몇 차례 지하철역 화장실에 갔었다. 흔하지는 않았지만 주민등록증을 진짜로 발견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수거한 주민등록증을 누군가에게 주면 위조해서 가지고 왔다. 사진을 바꿔 붙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주민등록증이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우선 공장에 다닐 만한 20대 나이의 주민등록증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있어서 써봤자 금세 들통 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남자의 경우는 그랬다. 남자들은 예비군이나 민방위에 소속되어 있는데, 입사를 하면 자동적으로 공단 예비군본부나 민방위본부로 소속이 옮겨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린 당사자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위조 주민등록증은 공단 밖의 아주 영세한 공장이 아니라면 여자들밖에 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자들이 가명으로 들어가는 것은 비교적 수월한 편이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별로 없었다. 문제는 남자들이었다. 예비군이나 민방위가 얼마나 주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인지 이때 절감할 수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얻은 것들이 별로 신통치 않자 이번에는 주위 사람들의 주민등록증을 얻어서 하기로 조직에서 결정을 하였다. 신돌석씨가 주로 그 임무를 맡았다. 그때 조직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학생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도 대체로 대학 출신들이었다. 위장취업자에 대한 단속이 심해지면서 제때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주민등록은 회사측의 의심을 받곤 하였다. 대학생들 중에는 군대를 연기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날카로운 관리자들은 그것을 캐묻곤 하였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의 주민등록증이 필요하였다. 그런 사람들을 많이 알 만한 사람은 아무래도 노동자 출신인 신돌석씨였다. 그래서 신돌석씨에게 그 임무가 주어진 것이었다.

  그때 신돌석씨가 그 대상으로 생각한 사람이 최준용이었다. 최준용은 그때 군대를 갔다 온 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 신돌석씨는 그를 만나서 설득해 보려 하였다. 그러나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할 틈을 잡으려 했으나 되지 않았다. 그 당시에 대학에 가지 않고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그 역시 수구적인 생각에 물들어 있었다. 그는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투였다. 그것이 자기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님이 너무나 분명한데도. 더 말해 볼 여지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술을 먹여서 취하게 만든 뒤에 주민등록증을 빼내는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흥분한 상태였는지 최준용은 쉽게 취했고, 신돌석씨는 바래다준다는 구실로 그의 집까지 가서는 그가 곯아떨어진 상태에서 주민등록증을 슬쩍했다.

  “잘 지내냐. 사업은 여전하고…”

  “사업이랄 거 있냐. 복덕방쟁이가. 하여튼 니 덕에 흥식이 보다야 돈 잘 벌지.”

  최준용은 공인중개사를 하고 있었다. 군대를 제대한 뒤 그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무사히(?) 합격한 그는 안타깝게도 고등학교 때 제적을 당하고 말았다. ‘무사히’ 합격했다고 한 것은 그때 인문계 고등학교에 합격한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원하면 거의 다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다. 절반 가까운 학생들은 실업계나 야간 혹은 재수의 길을 가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실업계를 가는 학생이 꼭 인문계를 간 사람보다 성적이 모자라서 가는 것은 아니었다. 1차에서 먼저 특수고, 실업계와 야간 인문계 지원을 받았는데, 그때는 외국어고나 과학고가 없었기 때문에 특수고라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 다음에 1차에 지원하지 않은 사람 혹은 1차에서 떨어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문계 선발을 하였다. 여기에서 또 떨어진 사람들이 1차의 미달에 다시 가는 식이었다. 

  최준용도 어느 공고에 지원했는데 떨어졌다. 그리고는 인문계에 가게 된 것이었다. 최준용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합격한 것을 그때 중학교 선생님들은 정말 기적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고2 때 패싸움이 벌어졌는데 거기에서 가장 앞장을 선 사람으로 찍혀 제적을 당한 것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강제로 전학 조치되었다고 하였다. 경상도 어느 농촌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거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가보겠다고 학원을 다니면서 신돌석씨 등을 만나 어울려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대학에 가지 못하고 군대에 갔는데, 군대를 갔다 온 뒤 할 일은 별로 없고 해서 시작한 것이 공무원 시험이었다.

  신돌석씨가 주민등록증을 슬쩍할 때까지는 최준용은 아직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얼마 뒤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이 들렸다. 서울시의 9급 공무원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의 주민등록증을 사용했던 학출 노동자가 구속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주민등록증으로 입사한 뒤 곧 파업이 벌어져서 좀 두드러지게 활동을 하다 해고되었는데, 해고된 뒤에 현장 노동자들과 만나면서 쟁의를 지원하다가 그 당시에 악명을 날렸던 ‘제3자 개입금지’ 조항 때문에 구속되고 만 것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구속되면서도 계속 최준용으로 행세하였다. 그 친구는 금세 집행유예로 풀려났는데, 최준용의 공무원 임용 과정에서 이 사실이 드러나 임용이 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최준용으로서는 정말 기가 막힌 노릇이었으리라. 최준용은 길길이 뛰었을 테고 구속된 사람이 최준용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다시 임용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최준용은, 지금 같으면 소송이라도 해봤을 텐데 그때는 그럴 생각도 나지 않았다고 한탄하듯이 말하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속 그 주장을 하면서 여기 저기 찾아다니며 따지자 오히려 구속된 그 사람이 누군데 네 주민등록증을 갖게 된 거냐며, 혹시 네가 넘겨 준 것 아니냐며 대공과 형사들한테 불려가 취조까지 받았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대략 전해 들었지만 신돌석씨는 차마 최준용을 찾아가서 사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에는 세금 문제까지 불거졌다. 최준용네 집에서는 우유 대리점을 하고 있었는데, 최준용을 종업원으로 신고해 놓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연말에 세금 정산을 할 때 보니 최준용이 이중으로 취업한 상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금 추징을 당할 처지가 되었는데, 최준용의 아버지가 이리저리 힘도 쓰고 돈도 써서 간신히 무마를 한 모양이었다. 이런 이야기까지 듣자 신돌석씨는 더 이상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만나서 이실직고하였는데 그때 최준용은 딱 한 마디만 하였다.

  “얌마 그러면 그렇다고 말해야 할 거 아냐.”

 

   
▲ [삽화 - 김윤기]

그리고는 신돌석씨가 미안하다고 이 얘기 저 얘기를 해도 딴소리만 계속했다. 그러다가 둘이서 소주 네 병을 넘게 마신 것 같았다. 한참 취했을 때 그가 마무리를 하듯 이런 말을 했다.

  “나 데모하는 놈들 싫어한다. 좆나게 싫어한다. 특히 먹고 살기 편하니까 하는 놈들, 머리에 먹물 좀 든 놈들이 입만 살아서 나불대는 거 정말 증오한다. 내 군대 있을 때 강집인가 뭔가 해서 군대에 온 새끼가 있었지. 내가 좆나게 괴롭혔다. 하지만 니가 한다니까 지금부터는 생각을 바꿔 보마. 그것뿐이다. 씨팔 이번에 보니까 정말 세상 개판이더라. 내가 피해잔데 왜 나를 죄인 다루 듯하냐.”

  그리고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근데 사실 나 그놈 괴롭히기만 한 건 아니다. 아 그 새끼 입대할 때 몸무게가 48킬로였대. 말이 되냐. 빠져도 한참 빠질 놈이지. 근데도 데모했다는 죄 하나로 군대에 온 거야. 그러다가 그 새끼 죽으면 어떻게 하냐. 하긴 그래서 죽은 놈도 있다더라. 우리 옆 부대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데 뭐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헌데 그놈 참 독하대. 저러니까 데모하지 싶더라구. 그때는 몸무게가 좀 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방에서 땅개할 놈은 못 됐지. 그런데 보안대 놈들이 심심하면 불러 가는 거야. 뭐라더라. 녹화사업이라던가. 내가 그놈 많이 봐 줬어. 그것 때문에 보안대 놈들한테 경고도 받았어. 야 정말 개새끼들 아니냐. 그러구서 무슨 국방이 어쩌구 하는지. 지 새끼들은 전부 빼든가 좋은 보직 줘서 탱자 탱자하게 하구 말야.”

 

정해랑(鄭海郞)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노동정책연구소 정책실장, 경희총민주동문회 회장,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2010년, 공저), <공주와 도둑들>(2017) 등이 있다.

 

김윤기(金允起)

<전시> 1993 개인전(그림마당 민) 외 단체전 다수
         2013 ‘내 앞에 서다’전(세종문화회관)
< 기획> 2006 조국의 산하전 ‘평택-평화의 씨를 뿌리고’(대추리)
        2009 평화미술제 ‘대지의 꽃을 바다가’(제주현대미술관)
        2012 통일미술전 ‘하나는 다른 많은 것을 이룬다’(국회의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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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8-11-18 08:49:16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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