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 / 전 한신대 교수

 

‘퍼주기’, 이 말은 보수들이 가장 국민들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먹혀들어 가게 하는 말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북한에 퍼주기를 해 북이 핵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진보 진영 역시 이에 대한 똑부러지는 대책과 반격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퍼주기’ 논리에 먹혀들고 있다. 문재인 정부 아무리 외교를 잘 해도 이 논리를 정리하지 않으면 밑 빠진 독 물 붙기일 것이다.

퍼주는 것을 다시 퍼 담는 것을 한자로 포함(包涵)이라고 쓴다. ‘함涵’이란 글자모양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물을 병에 퍼 담는 모양이다. 그래서 包涵은 퍼 넣는 주체와 퍼 담기는 객체가 분명하게 구별된다. 물은 객체로 병이란 주체로 수동적으로 담기는 꼴이 包涵이다. 영어로 포함을 including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컴퓨터 자판에서 ‘포함’이라 말을 치면 또 다른 한자 ‘포함(包含)’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 둘을 혼동한다. 包含(involving)은 包涵과 같이 주객이 뚜렷이 나뉘는 관계가 아니다. 예를 들어서 물에 설탕이 담기는 것은 물병에 물이 담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설탕이 물속에 물이 설탕 속에 쌍방향적으로 담기는 관계이다. 주객이 구별되지 않는 관계이다.

마틴 부버는 包涵을 나-그것(I-It)의 관계라 했고, 包含을 나-너(I-Thou)의 관계라 했다. 어머니가 아기를 배고 있는 관계는 包含이지 包涵이 아니다. 한 가족의 성원들의 형제자매 관계는 包含이지 包涵이 아니다. ‘네것 내것’ 없이 상호 교환적이고 호혜적이다. 그러나 문 밖에만 나가면 인간관계가 모두 주객 대립적으로 변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세계사의 구조>에서 부버의 나-너를 길게 설명하고 있다. “대상을 ‘너’라고 보는 세계관은 원시 애니미즘의 그것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마틴 부버의 나-너는 그러한 원시적 나-너가 아니다. 나-그것의 ‘나’는 객관화 된 주관이다. 그러나 나-너의 관계에서는 ‘너’가 대상이 아닌 것처럼 나도 주관이 아니다. ‘너’를 말하는 사람은 ‘어떤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너’를 말하는 사람은 관계 속에 살아간다” 다시 말해서 나-너의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은 包含 속에서 살지 包涵 속에서 살지 않는다.

물고기와 물의 관계는 주객을 나눌 수 없는 包含 관계일 것이다. 그래서 물고기가 물속에 있으면서 물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은 우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 보수 우익들은 남북 관계를 소가 닭쳐다 보듯이 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包涵 관계로 보고 있는 것이다. 백지장 하나 차이로 친구와 적으로 나뉘고 있다.

우리는 너무 오랜 동안 북을 ‘나-그것’으로 보아 왔다. 그래서 어머니가 애기에게 젖을 주는 것도 ‘퍼주기’라고 한다. 아마도 요즘 어머니들은 자기 젖을 퍼주기가 아까 와서 아니 자기의 건강을 해칠까봐 서 소젖을 대신 애기에게 먹이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머니-애기의 관계도 ‘나-그것’으로 변해 가고 있는가? 그 결과 신생아들은 아토피 같은 알지도 모를 새로운 병에 시달리고 있다. 남과 북도 보수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되어 가면 병들어 갈 것은 불을 보듯 하다.

산모들이 애기 ‘젖주기’를 ‘퍼주기’라 한다면 패륜모가 될 것이다. 그와 상응할 정도로 남이 북에 주는 것을 ‘퍼주기’라 한다. 역사는 이런 말하는 자들을 ‘패륜아悖倫兒’라 기록할 것이다. 마틴 부버의 책은 이런 패륜아가 된 세상 인간들을 고발하는 명저이다. 책이 나온 지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다시 필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고진의 책과 함께 읽으면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지금 한국 보수, 특히 한국당과 바른미래당 정객들이 구사하는 남북관계는 包含이 아니고 包涵인 것이 분명하다. 남과 북은 나-너의 包含 관계로 보지 않고 나-그것의 包涵 관계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최근 김정은 위원장의 태도를 보면 북은 과거부터 늘 남북 관계를 包含관계로 보고 왔다는 듯이 문재인 대통령을 대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능라도 강연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사전 검토 없이 무제한 내용을 방출하도록 허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도 고기가 물속에 包含된 듯이 서슴없이 말을 쏟아 냈다. 최근에는 한국당이 문재인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고까지 난리 소동을 부리고 있다.

남북이 지금 과거 70여 년 간의 包涵의 논리를 包含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그것에서 나-너로 변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문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진급 및 보직신고를 하러온 박한기 합참의장, 황인권 제2작전사령관 등을 만나 "서해 NLL은 우리 장병들이 피로서 지켜왔지만, 피를 흘리지 않고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은 더더욱 가치 있는 일“이라 했다.

여기서 문재인 대통령은 包含의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NLL이 더 이상 나-그것으로 나누는 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과 북이 함께 包含 관계로 변할 때에 NLL은 더 이상 경계선이 아니고 어머니와 애기를 잇는 탯줄과 같이 될 것이다. 이것이 문재인 대통령이 펴는 논리이다.

국가보안법에 걸리면 수사관으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주적이 누구냐”이다. “북한”이라 해야 하는데 “일본이다”라고 하면 이것은 영락없이 이적행위이고 고무찬양 죄에 해당한다. 수사를 다 받은 다음 경찰관도 안쓰러워 “이것만은 고치라”고 한다.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귀띔도 해준다. 그러나 이 말을 고친다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논리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고칠 수 없다. 包含을 包涵이라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삶의 신념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

쿤은 <과학혁명구조>에서 ‘패러다임 변화paradigm shift’를 말하고 있다. 뉴턴-데카르트적 고전 과학에서는 우주와 물질의 관계를 包涵 관계로 보았다. 다시 말해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란 병 속에 물질이 물과 같이 담긴다고 보았다. 그래서 물질에 상관없이 공간과 시간은 절대불변이다. 마치 우리가 방에 들어간다고 해서 방의 크기가 달라지지 않듯이 말이다. 이를 두고 包涵이라고 한다.

그러나 20세기 아인슈타인의 신과학은 이러한 뉴턴-데카르트적 세계관을 완전히 번복하고 말았다. 우주 공간을 방이라고 할 때에 그 공간 안에 무엇이든 들어가면 구 물질의 질량에 따라 공간이 삼각형, 사각형 등 제멋대로 찌그러지고 우그러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설탕과 물과 같이 상호교호 작용을 함께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과학이란 包涵에서 包含으로 변한 세계관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스어에도 包涵은 IN이라 했고, 包含은 EN이라고 했다. 주객이 분리 되지 않고 상호 包含된다는 것은 역설이고 모순이다. 어떻게 물질이 공간 안에 담겨야지, 물질이 자기를 담는 공간자체를 우그러지고 찌그러지게 한단 말인가.

이런 包含의 논리는 중세기에 이단시 되었으며 이것이 진리라고 믿던 신학자들은 모두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包涵 IN의 논리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아퀴나스(Aquinas)-안셀무스(Anselm)-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같이 첫 자 이름이 A이고 包含의 논리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유부라이데스(Eubleides)-에피메니데스(Epimenides0-에크하르트(Eckhart) 같이 첫 자 이름이 E이다. 그래서 전자를 ‘A형’ 후자를 ‘E형’이라고 할 때에 제4차 산업으로 진입하는 마당에 전자는 통하지 않는 논리이다.

인문학에서도 E형 논리 즉 包含의 논리가 전자 정보 산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존재’라는 말 ‘Existent’를 보자. Ex-istere이다. ‘밖(Ex)’에 ‘있다(istere)’와 같다. 무엇의 밖에 있다는 말인가? 주관은 객관의 밖에 있어야 하고, 객관은 주관의 밖에 있어야 그것이 진정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包涵이다. 그리고 包含의 논리는 이단시 될 수밖에 없다.

어머니가 애기에 젖주는 것을 ‘퍼주기’라 하는 저 패륜아들이 하루 속히 법정에 서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이들이야 말로 이적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과 북은 어머니(남 혹은 북)와 애기(남 혹은 북) 같이 그리고 한 집안의 형제자매 같이 아무리 퍼 주어도 아까운 것이 없는 包含의 관계이다.

단군 훈요에 의하면 “열 손가락을 깨물어 안 아픈 것이 없다” “콩 한 톨도 쪼개어 나누어 먹어라”고 했다. 이것이 단군 성조가 우리에게 물려 준 유훈이거늘 저 보수 적폐 세력들이 외세에 퍼주는 것은 하나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단군 성조의 단일 배달민족까지 나누어 먹는 것은 악을 쓰며 반대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려야 할 대상들은 진정으로 이들이 아닐까?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