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통령의 지지도가 50% 아래로 내려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경제에 대한 걱정이 크다. 그동안 워낙 살기 팍팍해서,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있을까 하던 자포자기마저 능가할 정도로 요즘 경제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후할 리 없다.

지금의 어려움이 지난 20여 년에 걸쳐 쌓인 모순들의 발현이라고 말해봤자, 대통령이나 여당을 두둔한다는 소리나 들을게 빤하다. 어찌 되었든 현 정부 역시 변명만 늘어놓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다. 당장 은이 나지 않더라도 장·단기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일단 먹고는 살아야 다른 것에도 눈을 돌릴 수 있으니 말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다. 자신이 살아온 궤적이나 환경에 따라 원인을 찾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오랫동안 환경을 연구해 온 이들은 현재의 모든 문제가 결국 환경에 대한 인간의 무책임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농촌 문제에 천착해 온 이들에게는 모든 경제적 난국의 근본이 농촌 정책의 부재 혹은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할 것이다. 모두 타당한 지적이다.

나 역시 별 재간이 없다. 청년실업, 부동산 정책 실패, 최저임금 논란, 국가경쟁력 저하, 오직 성장만을 외치는 대책 없는 성장우선주의 등,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분단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외국여행을 ‘해외여행’이라 부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나라에서 수십 년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생각의 틀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 평생 걸어서 국경을 넘어보지 못한 이들이, 이 나라 저 나라를 걸어서, 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넘나드는 이들의 사고를 능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우리 국민들은 초인적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라들과 경쟁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힘없는 민족이 겪어야 하는 온갖 어려움을 다 겪었다.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강대국 간 힘 대결에 휘말려 우리끼리 죽고 죽이는 참혹함마저 감당해야 했다. 그 결과 서로에 대한 분노는 그 끝이 제로섬임을 알면서도 꺼질 줄 모르고, 뱃속에 있을 때 헤어진 부친을 백발이 다 되어서야 만나 어색한 눈물을 쏟는 기가 막힌 일들을 매번 지켜봐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참혹한 인권탄압을 남북 당국이 공히 협력하여 65년 동안이나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가물가물하다. 분단체제에 적응되어버린 민족의 현재 모습이다.

그런 지긋지긋한 무참함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노력이 올해 시작되었다. 이는 어느 개인 한 명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은 물론 아니다. 모든 구성원들의 간절함이 함께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촛불의 함성이 결국 판문점을 환하게 밝혔고, 그 간절함이 북녘으로, 싱가포르로, 미국으로, 전 세계로 퍼져갔다. 드디어 이번에야말로 평화라는 그 무엇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가슴 조마조마한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다.

지금은 그러나, 다시 주위를 둘러본다. 우리의 평화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의 시선을 느낀다. 혈맹이라는, 협력관계라는, 우호관계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은밀하게 때론 노골적으로 남북의 만남과, 화해와, 소통에 제동을 걸려 하는 이들이 있다. 쉬운 것은 하나도 없고, 우리의 의지는 때로 빈번히 초라하다.

더 무서운 것은, 더 지독한 것은 그러나, 우리 안에 있다. 여전히 분단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친북 척결을 외치며 성조기를 휘날리는 이들이다. 우리보다 미국의 국익을 더 중요시하는 이들, 북한이 이 지구상에서 소멸되어야만 비로소 이 땅의 평화가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 문재인은 예상대로 빨갱이였고, 판문점선언은 항복문서 혹은 대규모 퍼주기를 위한 각서라고 믿는 이들이다.

그들의 사고 구조에 애초 평화란 것이 있을까. 저주의 굿판만이 살 길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정말 살 길은 평화일까.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할 때 성조기를 휘날려야 하는 이유에 대해 속 시원하게 말해주지 못하는 그들은 어디에서 발생한 인류일까. 스스로 노예임을 알고 있는 노예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겼지만, 우리 스스로 무너지기도 했다. 나만 살고 보자는 지독한 이기주의와 타국에 제 몸을 의탁해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고자 한 사대주의로 인해 제 스스로 나라를 갖다 바쳤다. 민족을 팔았다. 그리고 그러한 친일파들은 광복 이후에도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구차한 목숨을 이어갔고 어느 새 대한민국의 기득권으로 재탄생했다. 지금도 그 잔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겹도록 명확한 사실이고, 무서운 교훈이다.

여전히 우리 안의 노예근성은 살아 숨 쉰다. 어설픈 노예들은 다른 이들을 오히려 겁박하고 갑질을 해댄다. 스스로 노예인 줄 모르기에 저지를 수 있는 무참함이다. 그리고 제 손으로 분단을 끝장내고 제 손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불신한다. 오직 미국의 영광만이, 미국의 은총만이 한반도의 통일을 가져올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아니, 내심 분단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런 이들마저 끌어안고 통일 조국을 이뤄내야 하겠지만 아직 어리석은 나는 쉽게 손을 내밀지 못하겠다. 판문점선언을 두고 이래저래 폄훼하는 자유당을 보면 더 그럴 수밖에 없다. 솔직히 그들을 같은 조선민족이라 부르기도 역겹다.

이렇게 어리석은 내가 존재하는 반면, 끊임없이 이 땅의 평화와 이웃들의 온전한 삶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때로 행동하게 만든다. 그들의 이야기는 간절하고 또한 주체적이다. 자주적이다. 남과 함께 살아가야 함은 맞지만, 남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닌 제 힘으로 당당히 살아가야 함을 깨우친다. 그런 이들이 있기에 가끔 나자빠져도 일어설 수 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비쳐볼 때, 분단고착세력에게, 사대주의자들에게, 부패한 정치인들에게, 무식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모리배들에게 비난과 모함을 당하는 이들이 바로 제대로 된 이 땅의 현자이다. 그들이야말로 마지막 양심이며 보루이다. 그들의 입을 막으려는 이들이야말로 청산대상이며 적폐세력이다.

▲ 문정인·홍익표·김치관,『평화의 규칙』, 바틀비, 2018. 6. [자료사진 - 통일뉴스]

<평화의 규칙>을 펴낸 세 분 모두 그렇다. 간절함으로 용기를 불러내고, 숭고한 책임감으로 희생과 불편을 감수해온,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진실을 알려온 이들이다.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간절하고 또한 정직하다. 숨김이 없는 이들은 외로울지언정 괴롭진 않다.

그야말로 격변의 한반도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참으로 쉽지 않은 지금이다. 오랜 분단의 사고를 깨버리고, 파격에 파격을 거듭해야 할 시기다. 외세의 압력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오로지 우리의 머리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시기다.

단 하나의 적폐라도 끝내 걷어내야 하듯,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의 기운이 깃들지 않도록 단 하나의 비관이나 회의도 걷어내야 한다. 힘들지만,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 반드시 우리의 능력으로 뚫어야 한다. 다가오는 평양정상회담이 중요한 이유다.

이 책은 우리가 어떻게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말하고 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베게티우스의 명제를 갈아엎고, 평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평화를 준비하는 것이라는 말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적대와 갈등을 부추기는 이들을 모두 쓸어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명쾌한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냈다. 하지만 쉽게 읽혀도 단단히 읽으시라 권한다. 결코 가벼운 내용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걱정하진 마시라. 따분함과는 거리가 멀도록 흥미 있기도 하다.

노예는 스스로 노예임을 자각하며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차라리 자아를 잊고 사는 게 편할 수 있다. 제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키는 대로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노예를 위한 나라는 없다. 우린 그런 나라를 원치 않는다. 때문에 우리 머리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끝내 통일을 이뤄내야 한다. 세 저자는 바로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독자가 판단하실 몫이다.

“우리는 인간 정신의 힘에 감탄하고 상찬을 보내면서도, 정작 그 정신의 진정한 도움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 프랜시스 베이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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