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신분 제도는 양천제(良賤制)이다.
양인은 농어민이나 상민을 비롯해 왕족, 양반, 선비, 중인을 지칭한다.
천민계급의 대부분은 노비이다. 노비는 국가에 속한 공노비와 개인에게 속한 사노비가 있었다.
공노비는 국가에 신공(身貢)*을 바치거나 관청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비를 말하며, 사노비는 주인집에 함께 거주하는 솔거노비, 주인과 떨어져 독립된 가옥에서 거주하였고 주인에게 노동력 대신으로 신공을 바치는 외거노비로 구분하였다.
*신공(身貢)-노비가 직접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 매년 소속 관서 혹은 주인에게 바치는 일정한 액수의 공물(貢物).

우리는 흔히 백정, 갖바치, 기생, 광대 따위를 천민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백정, 갖바치, 재인은 천민이 아니라 평민이다. 다만 동물이나 가축을 전문적으로 죽이거나 웃음과 놀이를 팔고 떠돌아다니는 직업을 하찮게 보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이다.

기생은 천민이자 관서에 소속된 공노비이다. 흔히 관기(官妓)라고 한다.

[조선초기 연화대여기(蓮花臺女妓) 10명과 여의(女醫) 70명의 관기는 3년마다 한 번씩 각 지방의 노비(奴婢)의 어린 소녀를 뽑아서 서울로 올려 보내야 한다고 『경국대전』(經國大典) 권3에 명문화됐으므로, 서울 각사(各司)의 노비 중에서 선발된 관기는 기적(妓籍)에 등록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3년마다 한 번씩 선상(選上)하던 여기들을 필요할 때마다 뽑아다 쓰도록 법을 개정했다. 이들은 장악원(掌樂院)에서 노래와 춤을 익혀서 왕실(王室)잔치 때 출연했다. 관기의 가무를 여악(女樂)이라 했고, 이 여악의 전통은 관기제도가 없어진 후에는 기생으로 이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 11. 2., 도서출판 보고사]

공노비인 기생의 역할은 관서의 공식행사에서 춤과 노래를 부르며 여흥을 돋우는 일을 한다. 이런 기생이 공무원인 수령의 수청을 드는 일은 하지 않았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지방 수령이 관기와 성관계를 맺거나 간통해서 파직되고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갔다는 기록이 여럿 있을 만큼 엄격했다.

관기는 비단옷과 노리개로 치장하고 외출할 수 있었으며, 양반이나 평민들과 자유연애도 가능했다. 돈 많은 사람들 중에는 일정한 돈을 내고 관기를 면천시켜 첩으로 들이는 일도 많았다.

숙종 때부터 관노비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정조는 세 번이나 관노비 폐지를 발의했지만 지지부진하다가 1801년 순종 때 공식적으로 관노비 제도가 폐지된다.
관기가 폐지되기 전에도 평민기생들이 있었고, 평민이 된 관기들도 경험을 살려 고급 주점을 차리거나 취업을 했을 것이다.

신윤복의 [미인도]나 풍속화에는 기생이 등장한다.
선비나 양반들과 풍류를 즐기는 여성은 거의 기생이라고 보면 된다.
신윤복은 1758년에 태어나 최소 1813년 이후까지 살았던 전문화원이다.
특히 신윤복의 [미인도]는 1800년대 초에 창작되었을 거라고 학계에서 추정한다.
신윤복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기생들은 말을 타고 외유하거나 야외에서 양반들과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나오는데 관청에 소속된 관기를 일반인이 불러내서 함께 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림 속의 기생은 천민인 관노비가 아니라 평민인 것이다.

▲ 신윤복의 풍속화는 실제라기보다는 이상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선비와 기생의 성관계 장면도 나온다.
이를 두고 선비들이 기생을 옆에 끼고 방탕하게 놀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는 룸살롱에서 호스티스를 옆에 끼고 흥청망청하는 비리 정치인이나 특권층과 연결시켜 조선시대 양반이나 선비를 비난하는 소재로 사용한다.
그래서인지 신윤복의 풍속화가 양반을 풍자하고 비난하는 그림이라고 주장하는 얼뜨기도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남녀의 성관계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며 정치와는 무관하다. 지위를 이용한 위력이나 추행, 성폭력 따위는 당시에도 엄하게 처벌했다.

풍속화 속의 기생들은 자유분방하다. 선비가 기생에게 담뱃불을 붙여주기도 하고, 기생을 말에 태우고 선비는 걸어가기도 한다. 같이 춤을 추고 투호 같은 놀이도 하면서 선비들과 자유로운 연애를 한다.

하지만 이렇게 기생과 함께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일상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풍류는 대부분 남자들끼리 즐겼다. 보통 선비들의 시회나 상춘, 계모임 따위를 담은 그림은 그 행사명과 참석자의 이름을 넣는다.
하지만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모임의 성격이나 특정한 사람의 이름이 없다. 그저 흥을 돋구는 시 구절만 있을 뿐이다. 특히 그림에는 부정적이거나 비판의 요소는 전혀 없다.

김홍도의 풍속화가 지극히 현실의 모습을 담고 있다면, 신윤복의 [미인도]나 풍속화는 이상적인 모습에 가깝다.
당시 선비들은 조선이 곧 신선세계라고 여겼다. 이들이 꿈꿨던 신선세계는 물질적 풍요나 막강한 군사력이 아니라 철학과 인문학적 세계였다.
풍류는 신선의 풍모이자 신선세계에서의 삶이다.

선비들은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곳, 음악과 춤과 놀이와 즐거움이 있는 곳을 상상했다. 그 세계는 중국의 어디쯤 있다는 무릉도원도 아니고, 가기 힘든 금강산이나 묘향산도 아니다.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기이한 모습의 신선이 아니며, 중국인들도 아니다.
신윤복은 가깝고 익숙한 풍경이 있는 곳이 신선세계라고 생각했다. 또한 거기서 살아가는 선남선녀가 모두 신선이었다.
그 세계를 현실적으로 표현한 그림이 바로 신윤복의 풍속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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