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2일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는 남한 언론사 사장단을 만난 자리에서 대미관계 개선과 관련, `내 말 떨어지면 내일이라도 미국과 수교합니다. 미국이 테러국가 고깔을 우리에게 덮어 씌우고 있는데 이것만 벗겨주면 그냥 수교합니다`고 말했다.

김 총비서는 이어 `그런데 일본과의 수교 문제는 복잡합니다. 과거문제도 있고 청산해야 할 문제도 있지요. 일본이 부당한 해명을 요구하는데 그렇다면 명치유신 때부터 따져야지요. 일본은 일제 36년을 우리에 보상해야 합니다. 나는 자존심 꺾이면서 일본과 수교는 절대로 안 합니다`고 일본과 비교해 미국과 수교가 더 용이하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그는 또 `작은 나라일수록 자존심이 있어야 합니다. 영사 대사관계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나는 주권국가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켜나갈 것입니다`고 `작은 나라의 자존심`을 강조했다. 미국을 구체적으로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미국과 관계개선에서 주권국가로서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남측 언론사 사장단 앞에서도 다짐했다.

김 총비서의 발언은 미국과 관계개선에서 최대 현안은 테러지원국 명단해제 문제일 뿐 미사일 핵무기 사안은 마치 이미 해결된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테러국가의 고깔을 벗겨주기만 하면 바로 수교할 수 있다는 김 총비서의 말에서 여타 다른 문제는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김 총비서는 더 나아가 일본과 관계개선이 미국과 그것보다 더 복잡하다고 언급, 마치 대미 관계개선을 위한 현안은 테러 문제를 제외하고는 다 해결됐는데 일본과는 아직도 난제가 산적해 있다는 듯한 입장을 시사했다.

약 두달 전 김 총비서의 발언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29일) 미 국무부 리처드 바우처 대변인이 김 총비서의 특사 자격으로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차수)이 오는 9일부터 12일까지 미국을 방문하게 됐다고 발표하면서부터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김 총비서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때 북미관계의 현안은 테러문제일 뿐 다른 문제는 상당한 정도로 진척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금까지 최대 현안으로 지적돼 왔던 미사일 제네바 합의문 이행 문제, 나아가서는 6.25전쟁으로 비롯된 적대관계 청산에서 이미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각론으로 들어갈 때, 미사일 문제의 핵심은 북한이 앞으로도 미사일 개발계획을 추진하느냐는 것이다. 미사일과 미사일기술 수출에 대해서는 북측이 현금 보상을 요구한 만큼 협상에 의한 해결의 단초를 마련한 셈이다. 미측은 반드시 현금보상이 아니더라도 경제협력 형태로 대신할 수 있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그리 큰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문제의 핵심은 과연 북측의 미사일 개발 중단 여부이다. 북측은 미사일 개발이 미국측의 위협에 따른 자위권 차원의 대응책이라고 주장해 왔다. 뒤집어 보면 미측의 대북 군사적 말살 위협이 사라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경우 북측 역시 미사일 개발 문제에서도 호응할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케 한다. 현 상황에서는 북측이 종전 미사일 시험발사에 취했던 입장과 마찬가지로 미사일 개발에 있어서도 `일시 중단`을 선언하고 미측 역시 그에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가장 현실성이 있는 것으로 예상된다.

미측의 `상응 조치`는 지난 94년 북측이 제의한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 96년 북측의 잠정협정 체결 제의 등으로 궁극적으로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약속하는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미측이 조 차수를 초청하면서 북미 간 적대관계 종결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데서 짐작되듯 이번 북미 고위급 회담에서는 양측 적대관계 청산이 기본과제가 될 것이고 지금까지 양측 물밑 접촉을 통해 이 사안은 예상 밖으로 진전됐을 가능성을 배제키 어렵다.

핵문제 또한 지난 94년 10월 제네바 기본합의문으로 원칙적인 타결을 본 문제이다. 경수로 건설 완공시한이 지연되고 북측은 이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핵문제 해결의 큰 구도에서 봤을 때 이 사안은 `지엽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네바 기본합의문에 명시됐다시피 양측이 핵문제를 계기로 상호 관계 정상화에 합의한 것이 가장 중요한 합의사항이라고 할 때 양측의 관계정상화만큼 제네바 기본합의문에 부응하는 합의사항도 없다는 일부의 지적은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테러문제에 대해 미측이 요구하는 선결조건은 △테러협약 가입 △지난 6개월 동안 테러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사실 확인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테러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확약 △과거행위에 대한 적절한 조치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가운데 테러협약 가입과 과거행위에 대한 적절한 조치, 즉 일본 요도호 항공기 납치범 추방 등 두 가지 조건에서 북측이 만족할 만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문제시되고 있다. 테러협약 가입 건에 대해서는 북측도 2년 전부터 협상에 응하고 있으며 요도호 납치범 추방건과 관련해 북측은 일본정부와 해결할 사안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미측의 `부담`을 덜어주는 측면도 있다.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면서 군 차수인 조명록 특사의 방미는 북측이 무엇보다 군사적 적대관계 해소에 주안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 총비서의 말대로 테러문제가 현재 북미 간 최대 현안이라면 미사일 핵 문제, 나아가 적대관계 해소 등 주요사안에서 어느 정도 공감대가 마련된 상황에서 조 차수가 최종 마무리를 위해 미국을 전격적으로 방문하기로 했다는 가설도 충분히 가능하다. (연합2000/10/02)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