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우리그림(속화俗畫)을 가볍게 보거나 예술성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우리그림 중에는 수준이 낮거나 예술적 가치가 떨어지는 그림도 있다. 하지만 이건 우리그림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양그림을 포함한 모든 그림에는 수준의 편차가 있다. 서양그림이라고 모두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다. 명작이 있는 반면에 졸작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그림 전체가 수준이 떨어진다고 폄하하는 것은 조선시대에 대한 지독한 반감을 가지고 있거나 무지 때문일 것이다.

우리그림에 문제를 삼는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첫째, 현실비판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의 바탕에는 지배계급-피지배계급의 투쟁이라는 서양식 사관(史觀)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를 헤겔의 변증법이나 기독교의 선악 개념으로 비라보는 것도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우리그림에는 현실을 비판하거나 풍자하는 내용은 없다.
서양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그림에는 민중성이나 계급성 따위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민화가 민중의 그림이라고 규정하지만 허튼소리일 뿐이다.

심지어는 홍도나 신윤복의 풍속화에 양반을 조롱하거나 풍자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풍속화에서 그 어떤 풍자나 조롱을 발견하지 못했다.

김홍도나 신윤복은 국가미술기관인 도화서에 속한 국가 공무원이다. 이들이 왕명을 받아 그린 풍속화에 지배계층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현실을 비판하는 문화가 있었다. 조선시대 내내 부패한 관료를 탄핵하고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철학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수많은 선비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그 비판은 체제를 부정하거나 전복하기 위함이 아니라 기존의 체제를 올바른 길로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 김홍도/군선도(群仙圖)/1776/국보 제139호/호암미술관.
이 그림은 8폭으로 모두 연결한 상태에서 가로 575.8㎝, 세로 132.8㎝의 크기이다. 우측 첫 번째와 네 번째 그림의 일부가 잘려나갔다. 화선지에 먹을 주로 사용하고 청색, 갈색, 주홍색 따위로 담채방식으로 채색하였다. [자료사진 - 심규섭]

둘째, 인간의 비극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한다.

서양의 인간관은 성악설(性惡說)에 가깝다. 기독교의 원죄론, 인간을 나약한 존재로 보는 인본주의 관점이 그러하다. 서양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준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는 막장드라마보다 더한 인간의 삶이 펼쳐진다.
비극, 슬픔, 우울, 고독, 죽음, 고뇌 따위는 예술성을 가늠하는 주요 잣대가 되었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철학이었던 성리학에서 규정하는 인간은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 맹자의 성선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인간에게는 우주의 질서가 사단(인의예지)의 모습으로 내재했다고 믿었다.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내재된 사단을 올바르게 발현하는 것이었다.

이런 철학에 따라 미술작품에는 인간에 대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내용이 담긴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인물화는 왕의 어진, 공신이나 열사의 초상화, 풍속화, 신선도 따위가 있다.
왕의 어진은 역사의 기록이라 특별히 언급할 내용은 없다. 공신이나 열사의 초상화는 현실 속에서 공적을 남긴 사람들을 높이고 모범을 만드는 관점에서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실제 인물과 가장 닮게 그렸고 동시에 내면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도록 표현했다.

풍속화 속에는 다양하고 불특정한 인물군상들이 등장한다.
풍속화의 제작 동기는 백성의 구체적인 삶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이는 지배층이 백성의 삶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깔려있다.
그래서 그림 속의 인물들은 선과 악, 옳고 그름과 같은 도덕적 잣대에서 벗어나 있다.

신선도에 등장하는 신선은 군자이고 올곧은 선비의 상징이다.
신선은 사회적 억압의 굴레를 벗어난 존재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억압이란 잘못된 권력, 부정부패, 허영과 사치, 차별, 누명과 같은 폐단이나 사회적 범죄를 말한다.
그러니까 나쁜 짓을 하거나 악한 사람은 애당초 신선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다는 말이다.
신선도는 사회적 억압을 극복한 모든 사람이 곧 신이라는 인간존엄의 극한을 표현한 것이다.

셋째, 우리그림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현실은 과거와 미래의 통합으로 이루어져있다. 현실의 고통은 미래의 고통이고 과거의 부정이다. 현실의 즐거움은 과거의 긍정이고 미래의 낙관이다.
고통스런 현실을 밝게 표현하는 것도 결국 현실을 반영한 결과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미술은 존재할 수 없다. 다만 반영하는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우리그림은 사의(寫意)라는 방식을 통해 현실을 반영한다. 사의는 구체적 사물을 빌어 내용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동시에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간접적이다.
어려운 현실은 흔들리는 대나무나 달밤으로 표현한다. 내면의 즐거움은 거문고나 생황 따위로 드러낸다. 책가도나 백물도에 나오는 숱한 사물에는 저마다의 상징이 붙어있고 각각의 사물에는 당대의 흐름이나 세태가 고스란히 투영된다.

미술로 표현된 세상은 당대 철학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다.
미술작품의 예술성은 당대 철학의 진수를 얼마만큼 담고 있느냐에 따라 규정된다. 또한 그러한 철학을 시대 흐름과 삶의 양태에 걸맞은 미술표현방법을 구현했는가도 주요한 근거가 된다.

우리그림의 예술성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그림은 밝다. 우울하지도 비극적이지도 않다.
어려운 현실도 화난 표정을 하고 소리를 꽥꽥 지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즐거움으로 승화시킨다.
무엇보다 공동체의 가치를 추구하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에 대한 존엄과 무한한 긍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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