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화(俗畫)를 규정할 때 선비의 문인화(文人畵)를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
속화의 내용은 문인화에 있고 형식은 궁중회화에 있기 때문이다.
속화를 그대로 해석하면, 세속적인의 그림, 백성들의 그림이란 뜻이다. 또한 천박한 그림이라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하지만 속화는 세속적이지도, 천박한 그림이거나 백성만의 그림도 아니다.
속화는 그냥 우리의 전통그림일 뿐이다.

문인화는 인격을 수양하는 차원에서 그린 지극히 개인적이고 철학적인 그림이다. 그 안에는 인의예지라는 인성의 근본적인 내용이 담겨있다.
알다시피, 조선은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나라를 만들고 운영했다. 선비들이 추구했던 인격의 완성이나 정치는 모두 성리학에서 도출되었다.

▲ 추사 김정희/세한도(歲寒圖)/종이에 수묵/23cm*61.2cm/조선 1844년/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는 문인화의 대표 작품이 꼽힌다. 논어에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고 했다. 이 말은 '매섭고 차가운 겨울이 온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는 뜻이다. 사람이 힘든 상황이나 부와 권력이 없어졌을 때 내 곁에 남는 참된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내면의 생각을 간결한 붓질로 표현한 추상적인 그림인데, 내용과 형식에서 속기를 찾을 수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료사진 - 심규섭]

문화예술은 철저하게 당대 철학을 반영한다. 당대 철학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예술은 도태하거나 이단으로 배척받았다.

선비들이 수기(修己)차원에서 그렸던 문인화도 결국 성리학적 가치가 깊게 투영되어 있다.

문인화는 속화와 달리 사고 파는 상품이 아니었다. 그림의 평가 기준은 인격적 수준과 비례했다. 선비의 인격은 당연히 인의예지에 기초한 성리학적 인간형이다.
문인화에서는 속기(俗氣)를 경계했다. 철학적인 속기는 인간의 욕망이나 감정 즉, 칠정이다. 문인화의 형식에서 드러나는 속기는 사실적인 형상, 화려한 채색, 현란한 기교 따위를 말한다.

이에 반해 일반적인 미술은 화려한 채색과 사실적인 표현과 현란한 기교가 있으며 다양한 인간의 현실적 삶을 표현한다.
이것이 문인화와 전문미술작품의 차이이다.
속화의 영역에는 전문 화가가 그리는 궁중회화나 산수화, 화조도, 영모화, 신선도 따위가 모두 포함된다.

조선의 선비들이 추구한 성리학에 따르면,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기(氣)의 세계가 있는데, 사람에게는 인의예지라는 사단(四端)과 더불어 칠정(七情)이라고 부르는 희(喜)ㆍ노(怒)ㆍ애(哀)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이 있다고 했다.
사단과 달리 인간의 욕망에는 옳고 그름과 같은 사회적 가치가 부재하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부정부패가 들킨 것에 화를 내는 지, 부정부패한 사람에게 화를 내는 지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분노가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기준은 흔히 양심이라고 부르는 인의예지에 있다고 여긴다.
흔히 사단을 리(理)로, 칠정을 기(氣)로 규정한다.
퇴계 이황은 인의예지라는 사단과 칠정을 분리하여 사단을 중요하게 보는 주리론을 펼쳤다.
속화에는 화려한 채색과 현란한 기교만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귀영화, 출세, 불로장생과 같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부귀영화는 유한한 재물의 독점, 출세는 권력의 남용과 부패라는 반사회성 내포되어 있다. 또한 불로장생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반자연성이 도사린다.
속화라는 말 속에는 바로 사단의 부재를 경계하는 의미가 들어가 있다. 철학적 내용은 선비들이 속화를 평가할 때 주요한 기준이었다.

율곡 이이가 주장한 성리학은 주기론에 가깝다.
주기론은 인간이 가진 감정이나 욕망인 칠정을 중요하게 본다. 심지어는 좋은 칠정은 사단의 영역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또한 사대부들도 유학적 가치의 최종점이 백성들의 태평성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태평성대는 결국 정신적 수준을 바탕으로 건강, 장수, 출세와 더불어 물질적 풍요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도화서 화원들에 의해 창작된 화려하고 세밀한 궁중회화는 유학적 이상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태평성대는 왕족과 양반이 아니라 백성들의 세계였다.

이런 사상적 변화에 의해 속화가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이 만들어졌다. 이 때가 17~18세기 무렵인데 청나라의 발전된 문화가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속화가 발전할 수 있는 바탕에는 철학의 발전과 더불어 청나라에서 수입된 화려하고 다양한 인간의 욕망을 담은 그림이 있었다.

아무튼 율곡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선비들은 인의예지라는 사단과 결합한 인간의 욕망 즉 칠정은 좋은 것이라고 여겼다.
이를테면, 유학의 가치에 따른 직업의 귀천을 투영한 ‘사농공상’이 있다. 상업은 개인의 욕망을 부추기고 어떤 경우라도 이익을 추구하는 특성 때문에 천시했다. 심지어는 ‘상놈’이란 말이 사회적 욕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기여하는 상업이나 상인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의 변화가 생겼다. ‘상도(商道)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 문인화를 뺀 모든 그림이 속화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결국 리(理)와 기(氣)의 현실적인 결합은 그림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다.

정조가 궁중화원들에게 ‘백성들이 좋아하고 팔리는 그림을 그려라’는 시험문제를 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백성들의 욕망이 투영된 속화에도 유학적 가치가 진하게 투영된다.
거의 모든 속화에는 책, 붓과 같은 문방구, 매난국죽 따위의 문인화의 유학적 상징이 들어간 사물들이 중심을 차지한다. 산수화에는 선비들의 풍류가 녹아들고 선비들의 이상세계가 투영된 십장생도나 책가도, 화조도, 풍속화 따위가 창작되었다.

또한 속화가 국가미술조직과 도화서 화원들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빠르게 퍼져나가고 사회적으로 유행할 수 있었다.
속화는 백성들만의 그림이 아니었다. 왕족, 선비, 양반, 중인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향유했다.
차이가 있다면 잘 그린 그림과 못 그린 그림, 혹은 비싼 그림과 싸구려 그림 정도이다.

민화는 속화(俗畫)를 왜곡시킨 다른 말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일제(日帝) 문예가는 속화를 민화라는 용어로 바꾸어 사용했다.
민화는 민속회화의 준말이다. 하지만 정치적인 내용이 교묘하게 들어가 있다.
민화의 실제 내용은 민중화이다. 이 민중화는 선비를 지배계급, 백성을 피지배계급으로 규정하여 대립시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선비와 백성을 이간질하여 분열시키는 전형적인 식민지 문화통치 방법인 것이다.
또한 민속화라는 말 속에도 지배계층을 제외한 백성들만의 그림이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그림에서 성리학이라는 당대 철학을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야나기 무네요시는 속화에 담긴 높은 철학적 가치를 부정하고 오로지 인간의 원초적 욕망만을 추구한 허접한 그림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무엇보다 철학이 녹아든 예술성과 대중성을 획득한 빛나는 미술전통을 떠돌이 환쟁이의 허접한 그림으로 왜곡, 축소한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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