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공도(淸供圖)/강세황(姜世晃)/조선 18세기/선문대박물관. [자료사진 - 심규섭]

강세황이 그린 [청공도淸供圖]가 있다.

청공이라는 말은 현대에서는 쓰지 않지만 대략 ‘맑고 깨끗하게 갖춤, 맑고 깨끗하게 바침, 맑음에 이바지함’이라고 해석한다.
그림은 마치 선비의 사랑방을 표현해 놓은 것 같다.
큰 책상 위에는 서책, 벼루, 붓통, 수석, 매화, 여의, 연적 따위가 그려져 있다.
제목과 그림을 연결하면, 그림 속의 사물들이 선비의 맑고 깨끗한 가치를 높이는데 이바지 한다는 의미가 된다.

선비들이 추구한 가치 중에는 ‘사의(寫意)’가 있다.
사의(寫意)는 사물에 의미를 투영하는 것을 말한다. 즉 구체적인 형상을 가진 사물에 인문학적 상징을 붙여 자신의 뜻을 드러내거나 수용하는 것이다.
사의의 대표적인 사물이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이다. 이밖에도 수석, 문방구, 서책 따위도 포함된다.
이런 사물들은 문인화의 주요 소재였다. 또한 이런 사물을 모으거나 장식하는 것을 취미로 즐기기도 했는데 이를 완상(玩賞)이라고 부른다.

그림 속의 여러 사물 중에 눈에 띄는 건 그림 오른쪽에 있는 뱀처럼 길쭉하고 꼬불꼬불하게 생긴 물건이다. 처음에는 ‘무엇에 쓰는 물건일꼬?’라는 단어가 절로 생각날 정도로 보고 들은 적이 없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여의(如意)’라고 하는 물건이다.
손오공이 가지고 놀았다는 여의봉의 축소판이라고 여기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렇다고 실제 늘었다 줄었다하는 마술봉은 아니다. 처음에는 손이 닿지 않는 등을 긁는 용도로 만들어졌다고 추정하는데 점차 승려, 도사들이 가지고 다니는 성물로 발전했다고 한다.

선비들이 여의를 가지거나 그림으로 그린 것은 승려나 도사들의 용도와 다른 상징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여의(如意)는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마음, 뜻’이 어떤 내용인가에 따라 사용처가 달라진다.
승려나 도사가 생각하는 여의는 종교적 내용이나 전지전능한 능력을 상징하지만 선비들이 수용한 여의는 생명존엄에 대한 확신, 학문적 믿음에 따른 내면의 힘을 뜻한다.

표암 강세황은 미술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한 선비화가이자 미술평론가이다.
무엇보다 단원 김홍도가 이를 갈 무렵부터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갈이 시기가 평균 7세 정도인데 김홍도는 확실히 조기 영재교육을 받은 것이다.
아무튼 강세황은 김홍도의 그림 선생이자 정신적 스승이었다.

강세황의 [청공도]는 당시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그림 형식을 수용한 것이다.
[청공도]와 비슷한 말로는 [박고도], [기명절지도]가 있다.
서양의 정물화처럼 사물을 그리는 이런 그림은 전문화원의 전유물이었다.
화원 그림은 세밀한 형태와 화려하고 진한 채색을 넣어 장식성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아무래도 이런 그림은 상업용에 적합하다.

당시 청나라에는 다양한 형태의 [기명절지도]가 있었는데 강세황은 그 중에서도 문인화풍의 그림을 수용한다.
강세황이 이런 [기명절지도]를 수용한 배경에는 조형적 실험도 한 몫을 한다.
단원 김홍도는 청나라에서 서양화법을 적극 수용하여 용주사 후불탱화나 [책가도]와 같은 다양한 그림에 적용한다.
하지만 김홍도의 이런 창작의 바탕에는 스승 강세황의 영향이 컸다.
서양문물을 수용하는 문제는 정치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선비화가였던 강세황은 김홍도보다 앞서 서양화법을 수용하고 실험적인 작품을 남겼다. 이런 영향으로 김홍도의 작품은 정치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무튼 [청공도]에는 10종 이상의 사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런 여러 사물들을 한 화면에 구성하기 위해서는 서양화법인 원근법을 적용해야 한다.
전문화원이 아닌 강세황이 서양화법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과 표현능력이 없었다면 애당초 이 그림을 그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인화는 선비들의 정서와 가치를 담고 있는데 판매용 그림이 아니라 자기수양이 목적이다.
이 그림은 강세황이 청나라의 그림을 보고 베낀 것인지, 새롭게 창작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여의라는 생소한 물건과 수석이 놓인 화분에 매화를 키우는 문화는 당시 조선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다.

이 그림의 가치는 조금 후대에 나타난다.
중국에서 유행한 [기명절지도]나 [다보각경도]에 표현된 사물에는 대부분 불로장생, 부귀영화라는 도교적 상징이 붙어있다.
하지만 강세황이 수용한 [청공도]는 이러한 도교적 상징을 벗겨내고 인문학적 가치를 투영한다.
중국의 [다보각경도]가 조선에 들어와 [책가도]로 재창작되었고, [기명절지도]는 조선에 들어와 [책거리그림]이 되었다.
그야말로 연암 박지원이 말한 ‘법고창신 法古創新’의 사상이 투영된 것이다.
조선 말기의 천재화가 오원 장승업은 전문화원 그림인 [기명절지도]를 남종화와 결합해 [백물도]라는 형식으로 완성한다.
그러니까 남종화의 인문학적 내용과 북종화의 대중적 내용을 결합한 것이다.

▲ 심규섭/청공도/디지털회화/2017. [자료사진 - 심규섭]

우리그림 [백물도]의 뿌리가 되는 이 그림을 언젠가 새롭게 그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강세황의 [청공도]는 위작 시비에 걸려있었기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위작을 만든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위작은 원작에 가장 근접해야 한다.
결국 17~18세기 조선에서 [청공도]가 유행했고 특히 강세황이 그린 [청공도]는 비싼 값에 팔렸다는 말이다.

[청공도]가 위작이라 하더라도 작품의 내적 의미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문인화풍의 그림에 채색을 넣어 전문화원의 그림으로 새롭게 변주해 그렸다.
작은 그림을 크게 그리고 원근법을 넣어 사물을 배치했다. 그렇지만 원작에 담기 사의(寫意)는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무엇보다 우리그림의 수준을 한층 높인 강세황에 대한 존경을 마음 깊이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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