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위급 남북 당국회담이 열린 9일 남북 수석대표가 공동보도문을 교환하고 있다. [사진-판문점 사진공동취재단]

고위급 남북 당국회담이 9일 열렸다. 총 8차례, 약 11시간 동안 진행된 회의 결과 남북은 공동보도문을 채택, △평창올림픽 실무회담, △군사당국회담, △2차 고위급회담 등 3개 항을 합의했다. 2년여 만에 열린 남북회담이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만의 합의인 셈이다. 남북이 대결을 넘어 평화의 전환시대를 열었다는 평가이다.

남북, ‘우리 민족’에 입각한 한반도 문제 당사자 원칙 재확인

고위급 남북 당국회담 결과 채택된 공동보도문은 우선, 평창올림픽에 집중했음이 확인됐다. 또한, 군사당국회담과 2차 고위급회담으로 비정상 상태의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는 틀을 마련했다. 남북대화의 형식을 일단 갖춘 것.

이러한 남북대화 틀의 합의 기반에는 ‘우리 민족’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문제 당사자 원칙을 재확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공동보도문 3항은 “남북선언들을 존중하며, 남북관계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우리 민족이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이 중 북측은 “모든 문제들을 우리 민족끼리의 원칙에서”라고 명시했다.

각기 표현은 다르지만, 사실상 ‘우리 민족끼리’를 풀이하면 ‘우리 민족이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남북은 ‘우리 민족’ 원칙을 재확인한 셈이다. 

물론, 이를 두고 양측의 문안절충이 어려웠다는 전언이다. 백태현 통일부 대변인은 10일 오전 정례브리핑에서 “어제(9일) 늦게까지 문구 협의 조정이 되는 것은 1차로 말씀드렸지만 ‘우리 민족끼리’라든지 아니면 ‘우리 민족이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그런 표현의 문제들”이라고 밝혔다.

남측 보수층이 ‘우리 민족끼리’라는 표현을 꺼린다는 점에서, 남북이 각자의 공동보도문 문구표현을 달리하는 대승적 결단을 내렸다는 의미. 서로 표현을 달리하더라도 원래 의미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정창현 현대사연구소장은 “북은 민족 공조를 하자는 이야기이다. 한국이 미국 주도의 제재에 너무 나서지 말라는 것에 대한 언급”이라며 “남북이 적절하게 조합한 단어”라고 평가했다.

▲ 남측 수석대표인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판문점 사진공동취재단]

남북이 ‘우리 민족이 한반도 문제 당사자’임을 재확인한 토대가 형성되면서, 평창동계올림픽 실무회담과 군사당국회담, 2차 고위급회담 개최합의는 순조로웠을 것. 실제, 공동보도문에는 평창동계올림픽과 관련한 1항에 ‘민족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 군사당국회담과 관련한 2항에 ‘민족적 화해와 단합 도모’라는 이유가 명시되어 있다.

이는 2000년 6.15공동선언과 일맥상통한다. 6.15공동선언 1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6.15공동선언에서 출발한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는 고위급 남북 당국회담 공동보도문의 ‘우리 민족이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와 의미가 같다. 그리고 6.15공동선언 이후 이어진 남북 당국.민간 대화와 교류는 ‘민족적 화해와 단합 도모’를 통해 ‘민족적 위상’을 과시하는 계기가 됐다. 그렇기에 이번 합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대결 시대’를 끊고 다시 ‘6.15시대’를 여는 기반을 조성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양무진 북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남북이 입장 차가 커도 세 가지 합의했고, 명확하게 날짜 안 박아도 대화의 모멘텀을 유지했다”며 “특히, 남북문제에 있어서 당사자 해결원칙에 의해서 대화와 협상을 통해서 해결한다고 확인한 것은 아주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평창올림픽을 시작으로 남북교류 활성화 예고

고위급 남북 당국회담은 일단 당면하고 시급한 과제인 평창동계올림픽의 북한 참가에 중점을 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1일 신년사에서 “민족의 위상을 과시하는 좋은 계기로 될 것이며 우리는 대회가 성과적으로 개최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대표단 파견을 포함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 밝혀, 사실상 북한의 대규모 참가는 예견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번 회담에서 북측은 올림픽 대표단, 선수단뿐만 아니라 고위급대표단은 물론, 응원단, 예술단, 참관단, 태권도시범단, 기자단을 파견한다고 밝혔다. 하계올림픽과 달리 동계올림픽의 북한 선수층이 얕아 고위급대표단과 예술단 정도만 기대했던 정부의 예상을 넘어선 파격적인 제안인 셈.

‘대회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민족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북한의 통 큰 제안이라는 평가이다.

이는 ‘민족적 화해와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접촉과 왕래,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하며 민족적 화해와 단합을 도모하기로 했다는 공동보도문으로 이어진다. 북측의 평창올림픽 대규모 참가가 남북 당국은 물론, 민간단체 교류 활성화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의미이다.

▲ 북측 단장인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발언하는 모습. [사진-판문점 사진공동취재단]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에서 ‘여야, 각계각층 단체 및 개별 인사를 포함하여 그 누구에게도 대화와 접촉, 왕래의 길을 열어 놓겠다’던 취지가 회담에서도 그대로 전달됐으며, 이를 두고 정부는 “남북관계 발전 및 한반도 평화 여건 조성을 위해 가능한 조치부터 차근차근 해나가자는데 공감대를 형성했다”며 “남북관계 단절상황을 극복하고 정상화하는 계기”라고 평가했다.

특히, 평창올림픽 대규모 북측 참가자들이 육로를 통해 방남할 경우, 2016년 2월 개성공단 전면중단 조치로 끊긴 도로가 다시 연결된다. 이는 민간교류 활성화의 상징적 장면이 될 터. 민간단체들은 금강산에서 공동문화공연을 가진 뒤, 육로로 내려오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합의로 남북 민간교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10일 현재 통일부는 민간단체 접촉신청 203건을 수리했다. 대북 인도적 지원단체로 구성된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은 지난해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과 합의한 대표단 평양 방문이 민간교류의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점에서 재추진한다는 구상이다.

박창일 ‘평화3000’ 운영위원장은 “남북 당국이 합의를 잘 봤다. 남북이 주인의식을 가졌다는 게 중요한 포인트”라며 “이번 합의를 토대로 남북이 교류협력을 새로 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북, 9월 북 공화국 수립일까지 평화 전환기 유지해야

군사당국회담을 열기로 한 이번 합의는 한반도 평화정착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이다. 이는 평창올림픽을 시작으로 오는 9월 북한 공화국 수립일까지 평화 전환기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1일 신년사에서 평창올림픽과 공화국 수립일을 한데 묶어 ‘의의있는 해’라고 강조했다. 평창올림픽이 열리는 2월부터 9월 북한 공화국 수립일까지 남북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예의주시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이번 회담에서도 김 위원장의 뜻에 따라 북측은 한.미연합군사연습 중지를 요구하며, 한반도의 평화적 환경 보장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남측의 “한반도에서 상호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위를 중단하고 남북 간 우발적 충돌방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군사당국회담 개최를 제안한 것과 동시에, 북측도 군사실무회담 개최를 제의한 것.

양측 모두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을 낮추고 평화를 회복하고 이를 이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데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다. 복구 시점이 지난 3일이냐 9일이냐는 문제를 차치하고, 1년 1개월 만에 서해 군 통신선이 다시 연결된 것도 평화정착의 상징적 조치이다. 

▲ 고위급 남북 당국회담 대표단이 9일 오전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 회담장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판문점 사진공동취재단]

남측의 평창올림픽 흥행을 위한 요구를 북측이 모두 받아들이면서, 북측이 군사당국회담 개최 필요성을 제기한 점은, 오는 9월 공화국 수립일까지 평화적 환경 조성을 통한 ‘의의있는 해’로 만들겠다는 포석이 깔려있다는 분석이다.

정창현 소장은 “평창올림픽부터 9.9절까지 평화적 환경조성을 위해 남북이 노력하자는 메시지”라며 “연기된 한미훈련을 대폭 축소하거나 올해 중단하는 방향도 성의를 보였으면 하는 게 북측의 생각”이라고 진단했다.

“올해 9월 대규모 행사를 하려고 하니 남측에서도 평화적 환경조성에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것.

한국과 미국은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오는 3월 예정된 키 리졸브.독수리 한.미연합군사연습을 연기하기로 합의했지만, 북측은 연기가 아닌 중지를 군사당국회담 의제화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나아가 8월 을지프리덤가디언 한.미연합군사연습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합의 이행의 공이 남측에 넘어온 셈. 문재인 정부가 미 트럼프 행정부를 얼마나 잘 설득하느냐가 관건이다. 

일각에서는 올해 11월 미 중간선거가 있고, 트럼프 대통령은 재선을 원하기 때문에, 북.미 관계 개선을 카드로 꺼내 들 것으로 전망한다. 평창올림픽 모멘텀을 유지하기 위해 한.미군사연습의 규모를 축소하거나 한반도가 아닌 호주나 캘리포니아 인근에서 훈련하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조언도 나온다. 

핵 문제, 이산가족상봉 등 살얼음 여전히 존재

고위급 남북 당국회담 합의에도 여전히 살얼음은 존재한다. 북한은 여전히 한.미군사훈련 중단을 요구하고 있고, 이산가족상봉과 비핵화 문제는 남한에 살아있는 의제이기 때문이다.

이번 회담에서 남북은 비핵화 문제를 두고 충돌했다. 북측 회담단장인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은 “비핵화 문제 가지고 회담 진행하고 있다는 얼토당치않다는 여론을 확산했다. 최첨단 전략무기는 철두철미 미국을 겨냥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측의 “상호 존중의 토대 위에서 협력하면서 한반도에서 상호 긴장을 고조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조속히 비핵화 등 평화정착을 위한 대화 재개가 필요하다”는 기조발언을 문제 삼은 것.

리 단장의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발언처럼, 북핵 문제는 이번 합의 이행의 난관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양무진 교수는 “남북관계가 좋지 않으면 북한은 핵.미사일 문제는 북.미간 의제로,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한 군사적 적대행위는 남북 간 의제로 분리하는 경향이 있다”며 “남북관계가 좋을 때는 북핵 문제를 모호하지만, 포괄적으로 논의한 적이 있다. 한 두 줄의 합의서 문구도 넣었다. 크게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 남측 수석대표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북측 단장 리선권 조평통 위원장이 회담에 앞서 포즈를 취했다. 이른바 남북의 '통-통 라인'이 전면에 나선 것이다. [사진-판문점 사진공동취재단]

이산가족상봉 문제는 남북의 입장이 다르다는 점에서 쉽지 않아 보인다. 이번 공동보도문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남한은 시급성을 이유로 들고 있지만, 북한은 탈북자 김련희 씨와 중국식당 북한 여종업원 송환을 연계하고 있다. 여기에 이산가족상봉은 금강산 관광 재개와도 맞물려 있다. 

그래도 정부는 ‘다양한 분야에서 접촉과 왕래, 교류.협력을 활성화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이산가족상봉 문제도 쉽게 풀릴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정창현 소장은 평창올림픽 기간 이후 4~5월 이산가족상봉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릴 가능성을 점쳤다.

이번 회담은 ‘우리 민족이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대화와 협상’을 통해 ‘남북관계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남북관계 첫발을 뗐다’는 조명균 통일부 장관의 회담 평가처럼, 남북관계 전환시대가 열렸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는 “현실적 제약을 넘어서 창의적인, 상상력 있는 아이디어로 북핵 문제 해결이라는 한 축과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다른 한 축을 조화시키는 지혜를 보여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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