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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자화상<연재> 심규섭의 아름다운 우리 그림 (181)
심규섭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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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07  18:3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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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는 사람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이 발전했다.
서양 명작 중에 사람이 들어가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조선에서 인물화는 공적인 영역에 속했고 창작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실존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경우, 주인공은 대부분 왕이나 공신(功臣)이었다. 이런 그림은 국가미술기관인 도화서에서 공무로 그려졌다.
또한 사람들이 표현되어 있는 초상화, 풍속화, 불화, 고사인물도(高士人物圖) 따위는 모두 공적인 영역에 속한 그림이었다.

자화상은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데 적합하다.
선비들이 자기수양 행위로 그린 문인화도 넓게 보면 자화상과 다르지 않다.
문인화는 크게 발전했지만 자화상은 몇몇 특출한 화가의 작품만 전해진다.
자화상은 인물화 중에서도 개인적인 영역에 가깝다.
화가가 자신의 얼굴을 그린다는 것, 주체와 대상이 동일한 상태라면 사회성이나 공공성과는 무관해진다.
그런 연유인지 조선시대에서 자화상은 보기 드물다.

   
▲ 전 김홍도/자화상/종이에 채색/27.5*43/18세기/평양조선미술박물관.
이 그림은 김홍도의 자화상으로 추정한다. 어떤 전문가는 위작 판정을 내리기도 한다. 그렇다하더라도 당시 김홍도의 풍모를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
그림 속의 사물들은 수묵으로 간결하게 그렸다. 하지만 세밀한 묘사가 없어도 뭔지는 대충 알 수 있다. 하지만 인물의 머리 부분에 있는 사물만큼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나온 의견은 대략 두 가지이다. 하나는 등으로 보는 입장이고 또 하나는 자명종, 즉 시계이다. 정황으로 보면 시계일 가능성이 높다. [자료사진 - 심규섭]


위 그림은 김홍도가 자신의 모습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그림은 문인화풍이 두드러진다. 크기도 작고 세밀하지 않는 선묘에 채색도 간단하다.
사실 선비화가이면서 문인화 전문이었던 윤두서나 강세황의 자화상은 아주 세밀한 선묘를 사용했거나 진한 채색을 해서 마치 도화서의 전문화원이 그린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전문화원인 김홍도는 반대로 선비가 그린 것처럼 소박하다.

자화상은 아무래도 형식이나 내용면에서 자유롭다. 판매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윤두서의 자화상은 개성이 넘치고, 강세황의 자화상에는 엉뚱함이 있다.
그런데 김홍도의 자화상은 평범하다 못해 재미가 없다. 마치 타인을 무심하게 그려 놓은 것 같다.

초상화와 자화상은 화면 구성에 있어 비슷한 부분이 있다. 모두 해당 인물이 중심이다.
서양의 자화상이나 윤두서, 강세황의 자화상은 모두 인물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김홍도의 자화상에서 인물은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절반을 넘지 않는다. 나머지는 책상과 각종 기물(器物)이 점유하고 있다.
결국 이 그림에서 김홍도는 자신의 내면을 얼굴이 아니라 주변의 여러 사물들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이 그림의 배경은 방안이다.
조선의 선비나 남자들이 생활하는 사랑방(舍廊房)인데 여기에서 글을 쓰거나 읽고 손님을 맞이했다.
그림의 왼쪽에는 특이한 형태의 책상이 있다.
잘라서 이어 붙이거나 못질한 흔적이 없다. 통나무를 깎아 만든 것인데 다리 역할을 하는 부분에는 심한 곡선을 줄 만큼 기술적 난이도가 높다. 이건 척보아도 청나라에서 수입한 명품이다.
그 위로 서책과 인장, 벼루, 붓통, 연적, 종이 따위가 놓여있다. 또한 요상한 형태의 도자기는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술잔일 가능성이 높은데 아무튼 그 안에는 산호와 공작 깃털이 꽂혀있다.
그림이 작고 사물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수입명품일 것이다.

김홍도가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후기 전성기라고 일컫는 영정조시대였다.
이때는 병자호란을 겪는지도 100여년 이상이 지났다. 당연히 치욕의 감정이나 북벌에 대한 의지도 희미해졌다.
조선은 영조의 탕평정치와 조선중화사상을 통해 주체적인 사상적 문화적 발전을 이뤄내고 있었다. 조선을 이상세계로 표현한 진경산수화가 대표적이다.
당시 오랑캐로 여겼던 청나라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또한 호락논쟁(湖洛論爭)을 통해 오랑캐나 상업, 물질에 대한 경계도 상당히 풀어졌다.
조선의 선비들은 연행단이나 사신단을 통해 발전된 청나라 문화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흔히 북학파라고 부르는 일련의 선비들을 통해 고증학과 청나라 문화와 그 속에 녹아든 서양문명을 수용했다.
당시 이러한 문화를 수용한 선비들은 요즘말로 하면 최첨단 유행을 이끌었다.
김홍도는 이런 기물의 표현을 통해 자신이 시대적 흐름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김홍도는 이 그림을 그려서 혼자만 본 것일까, 아니면 동료들에게 보여준 것일까? 남을 의식하지 않는 일기가 없다는 말처럼 김홍도의 자화상도 결국 동료들에게 보여주고 자신의 내면적 풍모를 은근히 자랑했을 수도 있다.

   
▲ 왼쪽, 윤두서/자화상/종이에 수묵담채/20.5*38.5/17세기 후반/해남 녹우당.
오른쪽, 강세황/자화상/비단에 채색/88.7*51/1782년/국립중앙박물관. [자료사진 - 심규섭]

 

김홍도는 정조의 화가라고 할 만큼 정조의 개혁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국가미술사업에는 어김없이 김홍도가 있었다.
젊은 시절 탁월한 미술적 능력으로 상당한 재물을 모았고 강세황과 같은 선비화가와도 교류가 깊었다.
그럼에도 김홍도의 사회적 신분은 중인이었다.
왕의 어진을 그리거나 국가미술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도 얻을 수 있는 관직은 낮았다.

선비는 계급적으로는 평민이지만 정치인, 학자, 언론인,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인격 수행자였다. 무엇보다 ‘엄격한 예법과 자발적 청빈’을 실천하고자 했기 때문에 사회적 신분이 높았다.
김홍도가 이런 선비의 표상을 흠모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중인의 신분을 극복하고 선비의 길을 가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실제 선비라고 해서 모두 관직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김홍도보다 낮은 품계에서 일하는 선비도 많았다.
김홍도는 경학을 공부해 깊은 학문의 세계를 추구하거나 대단한 정치인이 되고자했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또한 스스로 엄격한 예법이나 청빈을 추구한 것도 아니었다.

김홍도의 모습이 그려진 여러 그림에는 선비에 대한 열등감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런 그림 속의 김홍도에게는 대단한 자존과 자부심이 느껴진다.

김홍도는 20대 초반에 궁중화원이 되었고 29세 때 영조와 어린 세자(정조)의 어진을 그렸다. 전문 화원으로서 재능과 기량은 최고조였다.
이런 김홍도가 미술에 관한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했다.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그림들을 수용하여 조선의 방식에 맞는 [책가도], [십장생도], [오봉도], [궁중모란도], [신선도]와 같은 궁중회화를 창안한다. 또한 서양화법을 수용하고 [송하맹호도]같은 새로운 선비의 상징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김홍도의 미술적 욕심은 진경산수화에 있었다.
선비화가였던 겸재 정선은 진경산수화를 창안하고 발전시켜 화성(畫聖)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김홍도는 겸재 정선에 버금가거나 뛰어넘은 화가이기를 바랬다.
겸재 정선이 문인화, 즉 남종화를 바탕으로 전문화원의 그림인 북종화를 끌어 들여 진경산수화를 완성했다면, 반대로 전문화원인 김홍도는 북종화를 바탕으로 남종화를 수용하는 방법으로 김홍도풍의 진경산수화를 창안한다.
확실히 겸재 정선의 금강산그림과 김홍도의 금강산그림은 많은 차이가 있다.
겸재 정선이 꼼꼼하고 세밀한 선묘로 금강산을 그렸다면 김홍도는 문인화풍의 거친 붓질이 많다.

김홍도가 추구한 선비는 학자나 현실 정치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유로운 신선에 가까웠다.
김홍도는 중국의 신선도를 적극 수용하여 조선의 방식으로 재창작한 신선도의 대가이기도 했다. 또한 선비와 신선을 동일하게 여기는 문화를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표암 강세황은 “음률에 두루 밝았으며 거문고, 젓대며 시와 문장도 그 묘를 다하여 풍류가 호탕하였다”고 했으며,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였던 성대중은 그의 퉁소 연주 솜씨를 듣고 신성을 연상케 할 만큼 걸출한 것이라 감탄했다고 한다.
김홍도의 학문적 깊이와 인격적 품성이 아니라 풍류에 관한 기록이다.

김홍도는 미술적 능력 하나로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였다.
중인이라는 사회적 신분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존재를 작품을 통해 선비의 가장 높은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정조가 죽은 후 김홍도의 말년은 순탄치 않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김홍도는 처음부터 재물을 쌓아놓고 떵떵거리며 살고자 하지 않았다. 학비를 걱정했다는 아들도 궁중화원으로 잘 키워냈다.

김홍도가 정말 신선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김홍도는 화가의 삶을 통해 조선의 미술문화는 세계적으로 발전했고 백성들은 그림 속의 세상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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