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전통무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최근 북한의 첫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됐다고 <조선중앙통신>이 3일 보도했다. [관련기사 참조]

▲ 무예도보통지는 2017년 10월 30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규장각 이외에 여러 곳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북한에서도 인쇄본을 보유하고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무사 백동수]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최민수가 주인공이었다는데...
아무튼 백동수는 실존 인물로 정조의 친위부대였던 장용영의 수장이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정조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체계적인 무예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여겨서 선조, 영조 때의 만든 무예지를 바탕으로 하고 일본이나 청, 몽골, 동남아시아의 무술을 수용하여 정리한 것이 [무예도보통지]이다.
이 책은 정조가 직접 기획한 것으로 이덕무, 박제가를 중심으로 무사 백동수가 결합하여 완성도를 높였다.

정조의 내각인 규장각의 검서관이었던 이덕무, 연암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셨던 박제가는 모두 북학파였다. 다시 말해, 실사구시, 이용후생이라는 학문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 무술을 참조하여 조선의 실정에 맞는 무예지를 창안한 것이다.

이 책의 가치는 북한이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하면서 재조명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번 문화재 등록과 아울러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추진했지만 좌절되었기에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민족 공통의 자산에 남북이 각자 주머니를 챙길 일은 없다.

나는 30대 초반에 택견을 수련하면서 전통무예에 관심을 가졌다. 경당이나 본국검, 마상술 따위가 [무예도보통지]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는 말을 쉽게 해석하면 이렇다.
무예는 흔히 무술을 뜻하고, 보통은 전통에 근거한 일반성을 가졌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내가 관심을 가지는 글자는 바로 무예도의 도(圖)이다.
도(圖)는 대략 그림을 뜻한다.

예전의 무예지가 이론이나 글로 설명되어 있다면 [무예도보통지]는 이론과 함께 구체적인 그림으로 무예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칼과 같은 병장기를 다루는 모습과 자세를 이해하기 쉬운 그림으로 그렸기 때문에 실제적이고 직관적인 무예교습지인 것이다.

이런 형식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범을 보이는 전문무사의 동작 하나하나를 전문화원이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 자칫 시범을 보이는 무사의 동작을 잘못 그리거나 순서가 틀리면 낭패가 생길 수 있다.
이런 오류를 보완하려면 순간적인 동작을 정확히 소묘할 수 있는 화원의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 무술에 능통했던 백동수는 완성된 그림을 통해 훈련과 연습이 가능한 지를 검증하고 감수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무예도보통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방대한 무예를 총정리한 것이겠지만 사실적인 그림도 한몫을 한다.
문제는 이런 그림을 누가 그렸는가 하는 점이다.
확실한 것은 [무예도보통지]가 정조와 국가기관인 규장각 검서관, 장용영 따위가 결합한 그야말로 공식적인 기록물이라는 점이다.
결국 국가미술기관인 [자비대령화원]이나 [도화서]가 원본그림을 그리는데 참여했을 것은 거의 확실하다.
실제 연구결과에 의하면 [무예도보통지]의 원화를 그린 화원은 허감(許감:1736-?), 한종일(韓宗一:1740경-?), 김종회(金宗繪:1751-1792), 박유성(朴維城)으로 밝혀졌다.
이 중에서 원화가 박유성의 화법과 가장 근접되어 있다고 판단하여 대표 화원으로 거론된다.

그런데 북한이 [무예도보통지]를 유네스코에 등재하면서 내세운 논리 중에는 김홍도 이야기가 나온다. [무예도보통지]의 원화를 김홍도가 그렸다는 주장이다.
[무예도보통지]의 원화를 관심 있게 살펴본 우리나라의 전문가들도 늘 의문을 가지고 연구를 했다. 하지만 간접적인 기록물에서 위에서 언급한 화원들만 언급될 뿐 김홍도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무예도보통지]는 목판 인쇄물이다.
원화는 분명 붓으로 그렸겠지만, 이를 밑바탕으로 목판으로 새겼기 때문에 실제 원화를 완전하게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또한 여러 권으로 인쇄하는 과정에서 목판이 뭉개지거나 제대로 찍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무예도보통지]의 원화를 김홍도가 직접 그렸다고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나 또한 직관적으로 김홍도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북한 미술계의 주장이 어떠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는지 알지 못한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기록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 붓으로 그린 원화와 나무에 칼로 판 목판인쇄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무예도보통지의 그림에는 김홍도 그림의 맛이 느껴진다. 직접 그리지는 않았더라도 감독이나 지도를 했을 가능성은 남아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사실 [무예도보통지]의 원화를 그린 화원이 반드시 김홍도일 필요는 없다.
김홍도의 명성을 빌리지 않더라도 [무예도보통지]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럼에도 김홍도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그 당시 김홍도의 위상과 역할 때문이다.
일개 중인신분이었던 화원 김홍도는 정조의 비공식 홍보담당이었다. 그 당시 그림은 현재의 영상매체와 다르지 않았고 미술을 통한 홍보효과는 확실하고 광범위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궁중회화의 대부분은 김홍도의 기획과 손을 거쳤다. 김홍도의 명성을 모르는 사대부는 거의 없었다.
또한 [자비대령화원], [도화서] 화원들에게도 살아있는 전설이었고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능력이나 지위, 역할에서 김홍도를 능가하는 화원은 없었다.
국가가 주도하는 미술 사업에 김홍도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 용주사 후불탱화 창작, 궁중장식화 제작, 왕의 명령에 의한 풍속화 제작,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책가도]의 창안과 확산, 정조의 화성행렬을 그린 [화성행행도팔첩병華城行幸圖八疊屛]의 감독 따위가 이를 증명한다.
[무예도보통지]는 국가적인 편찬사업이었고 이런 중대한 사업에 들어가는 미술작업에 김홍도가 빠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예도보통지] 어려 있는 김홍도의 그림자는 바로 이런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내가 김홍도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화가의 정체성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기행(奇行)을 일삼고 가난과 아집에 빠진 화가의 모습을 상상한다.
이를테면 고흐, 모딜리아니, 이중섭, 최북 같은 화가는 작품의 격조나 사회적 역할보다는 대부분 연극 같은 좌충우돌한 삶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화가는 광대나 연예인이 아니다.
당대의 철학을 수용해 미학적으로 풀어내는 사회적 역할이 있다.
김홍도는 자신의 천부적인 미술적 재능을 시대의 철학과 연결시켰다. 백성들의 분출하는 욕망과 시대의 변화를 감지한 정조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했고 이를 미술적으로 구현했다.
김홍도의 사회적 역할에 의해 조선후기의 문화는 풍성해졌다. 선비들은 문화적 자부심을 얻었다. 무엇보다 백성들이 현실의 꿈을 키워 다다를 수 있는 이상의 세계를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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