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가정은 없지만, 상상해본다. 만약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이 트럼프가 아닌 힐러리였다면, 현재 한반도 상황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럼에도 같은 모습이었을까. 지금 북미 간 첨예하고도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이 달라졌을까. 우리는 전쟁의 위협을 덜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보다는 덜 부끄럽게 미국에 매달리고 있었을까.

부질없는 상상이다. 현실은 냉정하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2018년이 아직 오지 않았듯, 2016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를 주절거리고 있다.

곧 트럼프가 한국 땅을 밟는다. 그의 1박 2일 일정에 우리 정부는 5억 원 정도의 비용을 들여가며 극진히 대접할 계획인 것 같다. 국빈방문이란다. 상황이 엄중하니 트럼프의 비위를 상하게 하면 안 되리라. 알면서도 배알이 꼴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반도의 운명이 하찮게 여겨지는 지금, 대한민국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 역시 현실이다.

미 대선 전 국내외 언론들은 트럼프를 반쯤 정신이 나간 속물, 허접, 천박한 재벌정도로 보았다. 이른 바 트럼프 돌풍도 찻잔 속에서 맴돌다 끝나리라 예상한 이들이 많았고, 그의 어마무시한 공약들도 한낱 코미디 정도로만 비쳐졌다. 대부분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되리라 예상치 못했다. 될 수 없는 인물이라 여겼다.

그런데 막상 그가 당선되니 한 순간에 평가를 바꿔버리는 언론도 있었다. 도대체 어떤 점을 들어 그를 높게 평가하는가 보았더니, 예전 이명박 대통령을 예찬했던 것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그는 사업가로 성공했고, 백만장자라는 것이다. 그것과 대통령이라는 직책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어찌되었든 현재 백악관의 주인은 트럼프다. 현실이다. 그리고 그 현실 앞에서 대한민국은 사면초가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말 폭탄이 오가는 사이 불안에 떨어야 했던 건 우리였다. 일본의 호들갑이 말 그대로 호들갑이었다면, 우리가 느낀 위협과 공포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때문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트럼프가 대부분의 예상을 뒤엎고 미국 국민들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 그 원인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미국인들은 ‘또라이’ 사업가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을까.

▲ 가나리 류이치 지음 / 김진희 옮김, 『르포 트럼프 왕국 - 어째서 트럼프인가』, (주)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17. 8. [자료사진 - 통일뉴스]

책의 저자는 이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미국 대선 1년 전부터 트럼프에 대한 조사와 취재를 시작했다. 그를 지지하는 미국의 평범한 노동자들을 수없이 만나, 왜 트럼프를 지지하는 지 그 이유를 들어보았다.

2012년 대선에서는 공화당 후보가 패배했던 지역, 하지만 2016년 대선에서는 트럼프가 승리를 거둔 6개의 주. 이 중 5개 주에 저자는 주목했다. 그곳들은 바로 러스트 벨트, 즉 쇠락한 공업지대에 전체 혹은 부분적으로 포함되는 지역이었다. 저자는 이 지역들을 포함해 14주를 돌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문득 이명박 대통령의 후보시절 유세장면이 떠오른다. 아마 부산이었나. 그는 무대 건너편 빌딩에 붙어 있는 임대 광고를 가리키며, “내가 대통령이 되면 빈 상가가 없어질 것, 임대 광고를 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정말 그가 대통령이 되면 빈 상가나 건물이 모조리 사라지고, 경제가 불붙듯 좋아지리라 믿었을까.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들은 예전에 대한 향수와 현실에 대한 분노, 체념이 쌓여 폭발 직전이었다.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임금을 받고, 가족들을 보살필 수 있었던, 지극히 당연하게만 여겼던 과거가, 더 이상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그 과거를 트럼프가 다시 재현해 주리라 믿었다.

오랫동안 민주당을 지지했던 이들도, 결국 그들의 삶이 바뀌자 트럼프에게 희망을 걸었다. 힐러리는 누가 봐도 워싱턴과 뉴욕 등 대도시와 어울리는 특권층으로 비쳐졌다. 반면 트럼프는 달랐다. 그는 백만장자였기에, 대기업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지 않고, 자신의 돈으로 선거를 치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기업의 로비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신만이 노동자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외쳤다. 쇠락한 시골 마을까지 찾아와 유세했다. 노동자들은 열광했다.

트럼프를 지지한 미 국민들은 현재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 국가가 자신들을 먹고 살 수 있게 해주길 바란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을 보살필 수 있을 정도의 삶이면 되었다. 자녀들이 열심히 공부한 만큼 취업이 이뤄져 또 다른 가정을 꾸리기를 바란다. 노후에 자식들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유지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어느 새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하나의 소망이 되어버린 지금이다.

이명박은 자신의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 지킬 의지가 있었는지 지금은 그것이 더 궁금하지만. 트럼프 역시 큰 소리로 미 국민들에게 고용과 희망을 이야기했다. 과연 그가 어떻게 체념과 분노에 빠진 미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미국의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오지만, 정작 미국인들은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의 임기 4년 미국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4년은 그 전과 분명 다른 현실을 만들어낼 것이다.

미국의 재채기가 한국에겐 독감으로 돌아오는 지금이다. 그의 집권 이후 북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덩달아 남북관계도 긴장의 연속이다. 이명박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졌던 참담한 남북관계는 여전하다. 오히려 전쟁이라는 막연한 공포가 보다 실질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결국 미 국민들의 분노가 결과적으로 우리에겐 위기로 돌아온 셈이다.

트럼프의 방한을 앞두고,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결국 그는 방한할 것이고, 이 땅에서 무슨 소리를 떠들지 모른다. 우리는 힘이 없다. 약소국이자 분단국이다. 제 아무리 떠들어도 현재로서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때문에 전혀 내키지 않더라도 미국이라는 국가를 알아야 하고, 그 미국을 이끌고 있는 트럼프라는 인물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북한을 잘 알아야 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정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들이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연일 쏘아올린다고, 단지 거부하거나 비난만 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찌되었든 북한은 통일의 대상이자, 우리 민족이다. 식구다. 때문에 알아야 한다.

고로 나는 트럼프라는 인물에 대해 더 알아볼 생각이다. <힐빌리의 노래>도 읽어볼 생각이다. 쇠락한 미국의 공업지대에서 자라난 백인 노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들이 생각하는 강력하고 위대한 미국은 무엇인지 한 번 들어볼 생각이다. 그리고 시진핑이나 아베, 푸틴과 같은 스트롱맨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도 고민해볼 생각이다.

부지런한 저자 덕분에 미국 한 번 가본 적 없는 나 같은 촌놈도 평범한 미국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독서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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