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련 / 종주대원

일자 : 2017년 10월 8일 (무박산행)
구간 :  음정마을~삼각고지~벽소령대피소~칠선봉~영신봉~세석대피소~한신계곡~백무동
산행거리 : 19.52km
산행시간 : 13시간 41분 (휴식시간 포함)
산행인원 : 14명(성인 13명, 초등학생 1명)

 

▲ 능선 길에서 본 지리산 제일봉 천왕봉. 천왕봉 주위에 구름이 몰려들고 있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긴 한가위 연휴의 대미를 지리산에서

통일뉴스 백두대간 12구간은 음정마을에서 대간 마루금 삼각고지로 올라 세석평전까지 대간을 타고 한신계곡을 거쳐 백무동으로 하산하는 환상의 코스이며, 지리산의 장엄함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순례의 길이다.
 
한가위 연휴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할 이번 산행엔 임영태 대원의 친구 분인 이석 대원이 동참하여 총14명이 참여하였다. 개인사로 11구간과 13구간을 같이 하지 못해 토요일 아침 성삼재에서 종주를 시작한 김경숙, 김성국 부부대원과는 삼각고지에서 합류할 예정이다.
 
밤 11시 50분경 우리를 실은 버스는 함양군 마천면 음정마을로 향해 여정의 첫 발을 내딛었다. 버스는 함양IC로 빠져나와 함양군 내를 지나 마천면에 접어들었고, 오도재, 돌담이 아름다운 월평마을, 삼봉산, 칠선계곡, 백무동 등 가슴 설레는 이정표를 연이어 지나친다. 드디어 버스는 11구간 하산길에 마지막 남은 인내력을 시험했던 음정마을 포장도로에 들어선다.

대원들은 조금이라도 더 버스가 올라가 차단기 근처에 가주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전날 내린 비로 긴 수풀은 도로 위로 축 늘어졌고 좁은 길은 어둠 속에서 위태로워 보였으나 버스는 간절한 소망을 외면하지 않고 최대한 가까이 우리들을 내려놓았다. 모두들 어린아이처럼 좋아한다.

은은한 달빛 벗 삼아 삼각고지로 오르다

지리산 북동 주능선과 삼각고지에서 분가한 삼정산 능선이 감싸고 있는 음정마을은 자연의 선물을 듬뿍 받은 자연생태마을이다. 지난 11구간 산행 때 하산 길에 보았던 늘씬하게 뻗은 소나무 숲, 덤불로 뒤덮인 도로 옆 수풀은 달빛에 흐릿한 자태만을 드려내며 잔잔한 어둠에 잠겨있다.

▲ 들머리 임도에서 단체사진.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새벽 4시 25분 들머리 임도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천천히 룰루랄라 걷노라니 지리산 능선 위 하현달에서 은은한 달빛이 내려온다. 수묵으로 그려낸 산과 푸른빛을 띤 흐린 회색의 밤하늘이 만난 능선 위로 달은 교교하게 떠있다. 우리는 전용정 대장의 제의로 랜턴을 끄고 달빛 산행에 젖어든다.
 
은은한 달빛과 적막한 지리의 능선, 임도가의 옅은 먹물에 잠긴 듯한 숲, 그리고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는 한 폭의 수묵화이며 신비로운 선율이다. 오묘한 달빛의 마력인가? 문득 디오니소스의 밀교신화가 떠오르고 ‘희랍인 조르바‘처럼 술에 취하고 달에 취해 벌거숭이가 되어 춤추고 싶다.
 
무더위로 대간 곳곳에서 대원들의 굵은 비지땀을 토해내게 했던 그 여름도 소리 없이 가을 저 너머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어느덧 첫 이슬이 내린다는 한로의 깊은 밤. 하지만 시원할 정도로 적당한 밤 기온, 약간 습도가 있었지만 축복받은 산행이다.
 
모두들 밤하늘 별자리를 가늠하며 후미를 기다리던 중에 후미대장 오동진 대원이 와서는 ‘민성이가 아파서 아빠와 같이 하산 중’이라고 침통한 얼굴로 전한다. 모두가 당황하고 맥이 풀리던 그 순간 심주이 대원이 오 대장의 장난이었음을 폭로(?)하고 모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오동진 대원의 장난기 서린 그 얼굴은 하회탈을 닮았다. 맑은 미소와 깊은 내공에서 우러나오는 긍정의 마인드가 모두에게 힘이 된다. 깜박 속은 우리들이 순진무구할 뿐이다. 민성이는 배탈이 났고 초반 오르막길까지 계속 힘겨운 산행을 하지만 열심히 따라 온다. 어리지만 강단이 있다.

▲ 배탈로 힘이 없는 민성이. 안쓰럽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임도길 우측으로 사월초파일만 개방하는 7암자 순례길이 시작되는 도솔암 가는 길이 있다. 하산 길에 보았는데 밤이라 보이질 않는다. 임도는 한국전쟁 시 빨치산 토벌 도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함양군 마천면 음정마을에서 벽소령을 지나 하동군 대성리 의신마을까지 이어지는 임도는 지금은 폐쇄되어 일부만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 민족상잔의 슬픈 상흔을 지켜봤을 저 달이 처연하기만 하다.

임도를 따라 계속 오르면 벽소령 위로 ‘선녀와 나무꾼’ 설화가 전해오는 비리내계곡과 부자바위가 있다고 한다. 우리와 가야할 길이 달라 훗날을 기약해 본다. 어느덧 임도와 헤어질 시간이다.
 
05시 45분 임도와 헤어져 삼각고지를 향해 가파른 돌길로 접어든다. 울창한 거목과 깊은 수풀은 푸른 달빛을 가로채고 다시 랜턴에 의지하여 빼곡히 이어진 돌계단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른다.
 
비탈길을 오르는 사이 여명은 어느 순간 와버렸고 아쉽게도 일출을 보진 못하였지만 신선한 숲속의 새벽이 우리를 맞는다. 새벽 첫 태양의 날카로운 빛이 투명한 공기를 뚫고 밤새 농축된 이슬에 부딪혀 산산히 산란하는 빛의 향연을 보라! 숲속의 새벽은 시리고 시린 신선함이다.

▲ 삼정산 능선으로 오르던 중에 여명이 밝아 온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여명 속에 가파른 등산로를 오르는 대원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07시20분 첫 고비를 무난히 넘기고 삼정산 능선에 올라서며 잠시 숨을 고른다. 새로 참여한 이석 대원은 다부진 체격에 거침없이 잘 오른다. 계속 뵙고 우정을 쌓았으면 좋겠다.
 
이어 단풍이 드문드문 예쁜 색깔로 치장한 숲길을 지나 대간 마루금 삼각고지에 올랐다. 잠시 후 김경숙, 김성국 부부대원과 반가운 상봉을 한다. 언제든지 만날 수 있고 자주 보는 사이임에도 산중에서의 만남은 감회가 색다르고 더욱 반갑다.

이렇듯 상봉과 해후는 아무리 자주 해도 지나치지 않을진데 70년 가까이 속이 다타들어가도록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미완의 상봉이 안타깝기만 하다.

▲ 임영태 대원과 이석 대원의 다정한 모습.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언제나 풍성한 아침식사 그리고 벽소령 가는 길

삼각고지를 지나 전망 좋고 아침햇살이 화사하게 내리비추는 곳에서 아침식사를 하였다. 신선이 노니는 곳인 양 멀리 남부능선은 저마다 머리에 구름을 얹었고, 구례 방향 섬진강이 있음직한 곳에 운무가 가득하다. 

지난 밤 지리산 능선 벽소령 위에 떠 있던 달은 우리와 헤어짐이 아쉬운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가는 길을 배웅하는 것일까? 아직도 희미하게 중천에 떠 있다.
 
아침상은 소박하지만 언제나 풍성하다. 모두들 다른 대원 몫까지 이것저것 많이 챙겨온다. 이석화 대원은 여러 맛깔 나는 밑반찬에 담근 술까지 가져온다. 날렵한 몸매가 산사람이다. 늘 뒤에서 조용히 보살피는 맏언니 같다.

밤부터 소진된 몸을 아침밥으로 든든히 채운 대원들은 가야할 길이 멀어 서둘러 벽소령으로 향한다. 등산로는 대피소에서 밤을 보낸 등산객들로 서서히 활기를 띤다.

▲ 신선한 햇살에 더욱 맛난 아침식사.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구례 방향에 운무가 호수처럼 가득하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지리산의 암석구조는 편마암과 화강편마암 중심으로 이루어진 탓에 덕유산과 함께 대표적인 흙산이며, 화강암 중심의 북한산‧설악산과 달리 풍화에 의한 기암괴석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등산로 주변엔 태곳적 지각변동이 일었을 때 한 몸이 둘로 떨어져 나갔을 법한 거대한 석문처럼 기괴한 풍광을 연출하는 거대한 바위가 위용을 드러내기도 한다. 남서쪽 사면으론 횡압력을 받아 금이 간 지각에 억겁의 침식작용이 반복되면서 생겼을 깊은 골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 다부진 몸매가 천상 산사나이다. 이석 대원.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석문 사이에 갇힌 김성국 대원.[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아침산행은 언제나 상쾌하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끝없이 이어지는 남부능선의 운해. 남부능선은 세석평전에 닿는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08시 52분 등산로 주변은 크고 작은 바위가 수시로 나타나고, 드디어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솟은 거대한 형제바위를 만났다. 형제바위 사이 청명한 가을 하늘엔 흰 물감을 옅게 흩뿌린 듯 투명한 구름이 한가로이 떠 있고, 부드러운 남쪽사면 너머 저 먼 곳엔 구름모자에 운무가 어울려 눈은 즐겁고 발걸음은 한없이 가볍다.

▲ 형제바위 아래서 우의를 다지는 단체사진.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선후배 우정이 돈독한 유병창, 장소영 대원.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나에겐 삼각고지부터 세석평전까지의 길이 초행이다. 흥분된 기분으로 이곳저곳 담아 둘 곳이 많아 입은 탄성을, 눈은 이리저리 발길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연신 지리산의 풍광을 담기에 바쁘다.
 
09시 45분 야트막한 능선을 산책하듯 걸으며 드디어 ‘푸른 하늘재’ 벽소령에 닿았다. 시인 이원규는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라는 시에서 벽소령의 소회를 이렇게 풀어낸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중략)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뼈마디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중략)/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마시라”

지리산 10경중 4경인 ‘푸른 달빛이 창연한 벽소령’을 아침나절에 와서 벽소명월을 보지 못하지만, 지난 밤 임도에서 ‘희다 못해 푸르디푸른 달빛’을 흠뻑 받았기에 아쉬움은 덜하다.

▲ 벽소령대피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대원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지리산 능선에서 운무와 운해에 넋을 잃다

잠시 휴식을 취한 대원들은 산속의 평원 세석평전을 향해 여전히 가볍기만 한 발걸음을 옮긴다. 김성국 대원이 잠시 후면 아름다운 숲속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말 그대로 일부러 예쁘게 꾸며 놓은 것 같은 길이 우리를 맞는다.

마치 동화속의 길처럼 적당한 그늘에 낙엽이 살포시 쌓이고, 조막돌과 흙이 적당히 섞인 길은 절로 콧노래라도 불러내올 참이다. 앞사람 뒷사람 담소하며 산책하듯 걷던 길은 아쉽게도 얼마 안가 끝나고 등산로 보수공사가 한창인 곳을 지난다.

▲ 예쁜 숲속 길을 걷는 대원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10시 55분 들뜬 아이처럼 환상적인 경관에 정신없이 걷다가 먼 옛날 천대받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한이 서려있는 덕평봉 아래 선비샘에 도착하였다. 선비샘은 노인장의 바람대로 고개를 숙여 경배하는 산객들로 넘친다. 샘물은 지리산을 통째로 저수지로 삼은 듯 굵은 물줄기의 기세가 상당하다.

신화와 설화는 인간존재의 근원이라 했던가! 설화는 염원의 승화이며 염원을 민중의 힘으로 이루어 온 것이 역사일 것이다. 갈증과 피로를 풀 수 있게끔 덕을 베풀어 주신 지리산 신령께 마음으로 감사를 드리며, 단풍이 점점 짙어가는 영신봉으로 향한다.

▲ 산죽과 단풍이 어울리는 숲길에서 이지련 대원.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선비샘에서 물을 채우는 대원들. 지리산은 샘물이 풍부해서 물 걱정을 덜게 해준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암갈색의 바위들, 시간의 순환을 받아들여 퇴색하는 나뭇잎들, 마침내 붉게 타오를 절정을 위해 숨죽여 절제하는 단풍들이 어우러진 길은 잠시 후 드러날 장엄의 순간으로 가는 징검다리일 뿐이었다.

11시 56분 드디어 천왕봉과 그 연봉, 그리고 멀리 남부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는 천혜의 전망대에 도착하였다. 천왕봉은 운무에 가렸다가 잠시 모습을 드러내길 수차례, 그 장엄함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숨이 멎을 것만 같이 끝없이 굽이치는 준령들과 운해는 선계를 보는 듯하다.

계곡 저 밑에서부터 치받아 올라오는 운무는 기문둔갑의 요술을 부리며 흩어졌다 모여든다. 영신봉은 운무로 모습을 감추었고, 신령한 천왕봉은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라는 듯 그 모습을 언뜻 언뜻 내 보일 뿐이다.

아! 저 운무와 단풍이 어우러진 계곡 속으로 안기고 싶다. 힘든 세속의 짐일랑 다 이곳에 벗어 놓고 가라 한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울림이 인다.

정신없이 절경에 취해 있는 대원들을 전 대장이 추스르며 사진을 찍어준다. 모두들 천왕봉을 배경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뽐낸다.

▲ 이곳에서 살고 싶어라. 심주이 대원.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언제 아팠냐는 듯 앙증맞은 민성이.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천왕봉을 배경으로 선 이계환 대원.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대장은 때론 고독하기도 하지. 전용정 대장.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우리가 이 세상에서 최고 부자다. 아빠 조한덕 대원과 아들 민성이.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날렵한 몸매에 산과 잘 어울리는 이석화 대원.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지리산 이야기 다음엔 들려주실 거죠? 임영태 대원.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이곳에서 오래 눈 호사를 누리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어찌하랴! 아쉽지만 영신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씩 체력이 고갈될 시간이다. 영신봉만 넘으면 꿀맛 같은 라면에 이계환 대원이 의기양양하게 준비한 고추장에 버무린 삼겹살이 기다리고 있다. 모든 생명체는 때 맞춰 영양을 보충해야 하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다. 하지만 이 ‘기구한 운명’ 덕분에 인간의 문명이 번성했으니 이 또한 축복의 운명일 것이다.

조금씩 대원들 간의 간격이 벌어질 즈음 반전이 일어난다. 초반에 배탈로 힘겨워하던 민성이가 전 대장과 함께 선두그룹을 형성하며 멀찍이 앞서 나간 것이다. 민성이가 잘 가는지 걱정하는 아빠 조한덕 대원에게 너나 할 것 없이 ‘걱정할 것은 자넬세’하며 웃는다. 초등학생들은 처음엔 대부분 힘겨워 하지만 일단 몸이 풀리면 웬만한 어른 대원보다 훨씬 가볍게 산행을 한다. 가희가 11구간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영신봉으로 가는 길에 칠선봉에서 잠시 포즈를 잡고 멋진 인증샷을 남긴다.

전 대장과 민성이 그리고 유병창 대원은 세석에서 점심준비를 위해 앞서 갔는데 이젠 자취도 보이지 않는다.

▲ 영신봉 가는 길. 제법 단풍이 들었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드넓은 어머니의 품, 세석평전 그리고 꿀맛 같은 라면 성찬

오후 1시가 가까워지니 허기가 진다. 마음은 벌써 세석평전으로 가있는데, 김성국 대원이 영신봉에 가려면 목재 300계단을 넘어야한단다. 단단히 마음을 다지고 남은 여력을 모아 발길을 내딛지만 가도 가도 목재계단은 안 나타나고 돌계단과 철계단만 연이어 나온다.

눈앞엔 라면과 고추장 삼겹살이 어른거리고 다리마저 힘이 빠져 나갈 즈음 드디어  목재계단이 나타났다. 오동진 후미대장이 계단숫자를 소리 내어 세면서 올라온다. 실제 숫자는 훨씬 적은 175계단이었다. 김성국 대원 말에 각오를 단단히 한 덕분에 오히려 175계단을 사뿐히 즈려 밟고(?) 넘을 수 있었다.

이어서 접근 금지 난간이 설치된 낭떠러지 옆을 지난다. 낭떠러지 밑은 운무에 고사목과 단풍나무가 어울려 신비로운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 오동진 후미대장이 환하게 웃으며 목재계단을 오르고 있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낭떠러지 아래 운무 속에 고사목과 단풍이 신비롭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13시22분 고도가 높아 가면서 단풍의 농암은 짙어 갔고, 드문드문 큰 바위와 눈인사를 하며 가던 길에 너무나 멋쩍게 1652m 영신봉에 올랐다. 올랐다는 말이 무색하게 평탄한 고갯길위엔 큰 바위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이정표가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아마도 표지하는 돌로 세워놓은 것 같다.

이제 멀리 세석산장의 대피소가 보이고 장터목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등산객들이 오르내린다. 내려서는 길목엔 가지만 앙상한 철쭉군락이 지천으로 퍼져있고, 옹기종기 들국화가 고개 들어 우리를 맞는다.
 
13시34분 드디어 세석평전에 도착했다.

▲ 만세 부르며 세석평전으로 들어서는 대원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세석평전은 해발 1500여m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있는 고위평탄면이다. 1980-90년대 밀려드는 등산객들의 무분별한 야영과 군부대 훈련장으로 까지 사용되면서 심하게 훼손되었던 이곳에 구상나무를 심고 철저히 보호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회복되었다 한다. 대피소는 지리능선의 중요 나들목 답게 등산객들로 북적인다.

▲ 구상나무가 보이는 세석평전.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선발대 전 대장과 유병창 대원 덕분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라면을 먹을 수 있었다. 이석 대원이 챙겨온 집게다리를 넣은 게맛살 라면이다. 허기진 배가 호강하는 순간이다. 삼겹살 맛도 좋고 술 한잔 곁들이니 부러울 것이 없다.

김성국 대원은 저녁에 장터목산장에서 마실 요량으로 남은 소주를 소중히 챙긴다. 버너와 코펠 등을 가져오고 중식 때마다 미리 와서 수고하는 대원들이 너무 고맙다.

▲ 종주대의 살림꾼 유병창 대원이 라면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근 9시간을 산행한 대원들은 음용수터에서 물도 보충하고 피곤한 발과 얼굴을 씻으며 하산길을 준비한다. 세석평전에서 김경숙 부부대원과 헤어지기 전에 단체사진을 찍었다.

이곳에서 장터목까지 산행하고 장터목대피소에서 숙박하는 김경숙, 김성국 부부를 모두 부러운 듯 바라본다. 장터목까지는 3.4km, 한신계곡 하산길은 장장 6.5km다. 이별은 언제나 아쉽다. 갈림길에서 김경숙 부부를 보내고 우리들은 한신계곡 쪽으로 오른다.

▲ 장터목을 향해가는 김경숙, 김성국 부부대원. 이별은 언제나 아쉽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비경 한신계곡, 설화를 낳고 젖줄이 되어 흐르다

14시 50분 드디어 한신계곡 하산길이다. 지리산 북동쪽 사면은 남서쪽 사면에 비해 경사가 급해 폭포와 깊은 소가 많다. 한신계곡은 지리산 최고의 원시비경인 칠선계곡에 못지않게 비경을 많이 품은 곳이다. 6.5km중 급경사 구간이 1.4km 정도, 비경인 오층폭포까지는 2시간 남짓 걸린다. 전체 하산시간은 대략 3시간정도 걸리니 백무동에 내려서면 저녁 6시다.

단단히 마음을 다지며 급경사 돌계단에 발을 내딛는다. 돌계단엔 젖은 낙엽이 붙어 있어 모두들 긴장한 채 조심스레 내려선다. 능선에선 그나마 잘 버텨주던 무릎과 허리가 몇몇 대원들을 힘들게 한다. 장소영 대원은 무릎에 통증이 심해 보호대를 하고 내려오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최근엔 영상 산행후기 제작에도 열성인지라 그 에너지가 부럽기만 하다.
 
얼마쯤 내려 왔을까 물소리가 들리고 작은 물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영신봉과 촛대봉 사이에서부터 한신계곡 물은 발원하고 가내소 폭포에서 장터목 근방에서 내려오는 한신지계곡과 합쳐져 백무동계곡으로 흘러간다. 비경은 아직도 1시간여를 더 내려가야 할 것이다. 선계를 지나면서 심주이 대원과 인간계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내려간다. 이렇게 수다라도 떨면서 내려가니 통증이 덜 느껴진다.
 
17시 00분 하산한지 2시간여 만에 원시림에 감춰진 비경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거대한 바위 사이를 급하게 S자를 그리며 연이어 폭포를 쏟아내는 오층폭포, 섬뜩한 두려움마저 이는 검푸른 가내소, 차분하게 내려오는 첫나들이폭포 등이 지치고 힘든 몸을 위로해준다.

울창한 원시림과 거대한 바위사이로  ‘우루쾅쾅’ 우레 소리, 억겁의 시간을 물살로 다듬은 매끈한 바위덩이, 그 위를 미끄러지듯 날렵하게 흐르는 투명한 비단결 물줄기들이 선계의 비경을 연출한다.

▲ 한신계곡 하산 길에 만난 오층폭포.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가내소.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이런 비경 앞에 서면 누구나 상상의 나래를 안 펼칠 수가 없으리라. 음정마을에 ‘선녀와 나무꾼’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다. 옛사람들은 고단한 삶의 위안을 천지신명께 간구하며 간절한 소망을 설화로 승화시켰을 것이다.

‘가내소’는 한 도인이 마고할매 셋째 딸 지리산녀의 유혹에 넘어가 도를 이루지 못해 ‘나는 가네’해서 '가내소‘가 되었다나. 사철 변함없는 수량으로 기우제의 명소였다고 한다. 한신계곡이 내려서는 백무동은 한 때 조선팔도 무속인의 기도처로도 유명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흔들리는 다리 위에 선 대원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나 예쁘죠? 장소영 대원.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반야봉과 노고단 사이에서 발원한 심원계곡은 남원군 산내면으로 넘어 오면서 달궁계곡이 되고, 고리봉에서 발원한 계곡과 합류한다. 이어서 토끼봉과 반야봉에서 발원한 뱀사골과 반선에서 만나 만수천을 이루는데, 만수천은 함양군 마천면으로 넘어가면서 엄천으로 이름을 바꾼다.

바로 이 엄천이 한신계곡을 이어받은 백무동 계곡과 칠선계곡, 그리고 지리산 북동쪽 사면의 여러 계곡물을 받아 그 세를 넓히고,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남강은 드넓은 진주평야의 젖줄이 되어 서에서 동으로 흘러 낙동강과 합류하고 이어 바다로 긴 여정을 풀어놓는다.

지리산 북쪽 사면의 생명수가 하나둘 모여 드넓은 지리산자락을 적시고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장면을 떠올리다 보면 백두대간은 그대로 생명의 근원이요, 아낌없이 주는 어머니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 원시림에 둘러싸인 계곡. 엄천으로 흘러간다.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 우리는 해냈어! 12구간 날머리 백무동 입구에서 단체사진. [사진제공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

긴 순례길의 마침표를 백무동에서

18시 00분 비경을 지나 몇 개인가 철다리를 지나고 구름다리도 지나니 멀리서 선발대가 손을 흔든다. 드디어 하산완료. 서로 이번 산행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성취를 축하한다. 백무동입구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에 막걸리로 지친 몸을 다독인다. 이 맛이다! 힘들지만 같이 해냈고, 하루만 지나면 그리워 질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전체구간 19.52km, 전체 산행시간 13시간 41분. 정성을 다해 지낸 시산제 덕분에 별 사고 없이 날씨도 좋고 비도 안 내렸다며 벌써 내년 시산제를 다짐한다.
 
어느덧 통일뉴스 백두대간 종주대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옹골져 가고 있다. 어린 대원들은 볼 때마다 쑥쑥 자랄 것이고 우리들은 다가올 미래를 두려움 없이 맞을 것이다. 이루지 못한 염원을 이루기 위해 서로를 이끌어 주며, 백두대간의 듬직한 등에서 사랑과 화해를 배우고 통일을 노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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