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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미인도<연재> 심규섭의 아름다운 우리그림 (179)
심규섭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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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28  13:2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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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신은 1850년에 태어나 1941년까지 살다간 조선 말기의 화가이다.
채용신은 무과에 급제하여 20여 년간 벼슬살이를 하면서 종2품관까지 지냈다.
채용신은 양반신분이면서 화가였다. 관료생활과 작품 활동을 병행했고 퇴직 이후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전개한다.
대체로 양반신분의 화가는 문인화를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채용신의 그림은 도화서 화원풍의 세밀한 진채화였다.
채용신은 대대로 무관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관료생활을 했지만 이후 아들, 손자 3대에 걸쳐 그림을 업(業)으로 살아가는 화원가문으로 바꾼다.

   
▲ 황현 초상/채용신/비단에 채색/120.7x72.8cm/1911년/보물 제1494호.
일본에 의한 경술국치를 당한 것에 격분해 자살한 황현의 초상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채용신은 어릴 때부터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약관의 나이였던 22세 때 이미 흥선대원군의 초상화를 그렸고, 1900년에는 도화서 화원 조석진과 함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사하였으며, 고종의 어진을 그리면서 조선 최고의 화가라는 명성을 얻는다.
채용신은 전통적인 화원풍의 그림에다 중국풍, 서양화풍을 결합했으며, 당시 최첨단 기계였던 사진기를 적극 활용했다. 이를테면, 직접 인물을 보고 사생하지 않고 사진으로 찍어서 이를 바탕으로 초상화나 인물을 그렸다는 말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들과 며느리가 서울에서 사진관을 운영했다니 시대의 흐름을 앞서서 이끌어 간 것이다.

1905년, 채용신은 56세의 나이에 관료생활을 마치고 선산이 있는 전주로 내려간다. 이때부터 채용신은 최익현, 황현 같은 우국지사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본격적인 미술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채석강 도화소]라는 공방을 만들어 상업적인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한다.

   
▲ 전(傳)채용신/팔도미인도 8폭/면에 수묵채색/각130.1x59.5cm/20세기 초/OCI미술관 소장. [자료사진 - 심규섭]

채용신이 그린 팔도미인도(八道美人圖)가 있다.
제목 그대로 조선 팔도의 미인을 그려 8폭의 병풍으로 꾸민 것이다. 이 그림에는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500여 년간 조선에서 유명했던 기생과 미인들이 그려져 있다.

미인도(美人圖)는 좁게는 아름다운 여성을 그린 그림이지만 넓게는 당대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분류방식을 적용한다면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도 르네상스 시대의 미인도라고 부를 수 있겠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미인도는 신윤복의 [미인도]이다.
앞서 김홍도도 미인도를 그렸지만 중국의 사녀도(仕女圖)를 베껴 그린 정도에 머무른다. 특별한 사회적 가치가 투영되어 있지 않는 여성을 단독으로 그리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천하의 김홍도라도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윤복은 기생에게 신선의 상징을 투영하여 사회적 한계를 극복한다. 당시 선비들은 스스로를 신선이라고 생각했고 선비와 함께 풍류를 즐기는 기생을 여선의 반열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신윤복의 [미인도] 이후 비슷한 그림이 숱하게 창작되었고 채용신의 [팔도미인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조선 팔도의 미인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기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기생은 사회적으로 공개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채용신의 미인도에는 평양 기생 계월향이나 함경도 기생 취련, 진주 기생 산홍 따위의 의녀(義女)가 그려져 있다. 이런 기생들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그린 것은 채용신의 정치적 입장과도 무관하지 않다. 채용신이 교류하면서 초상화까지 그린 최익현은 항일 의병장이었고 황현은 1910년 경술국치에 항거하여 자살한 선비이다.

신윤복은 자유롭고 풍요가 넘치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도도함과 정감, 매력이 넘치는 미인도를 그릴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채용신은 열강의 침략과 내부 모순이 겹쳤던 험난한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왜적이나 반란군에 대항했던 기생들이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선비의 사회적 가치가 투영된 기생을 중심으로 팔도의 미인을 그린 것은 신윤복이 개척한 미인도의 기준을 따랐기 때문이다.

[팔도미인도]에는 몇 가지 석연치 않는 부분이 있다.
먼저는 화풍이 채용신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채용신은 어진을 그릴 정도로 초상화에는 일가견이 있는 화가이다. 여타의 작품을 보면 전통방식에 서양화법까지 결합하여 사실적이면서도 치밀하게 그린다.
하지만 [팔도미인도]의 인물에는 그러한 방식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풍속화에 등장하는 작은 인물을 그리는 것처럼 묘사가 약하고 완성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채용신의 그림으로 특정하지 못하고, 다만 추정할 뿐이다.

또한 인체의 비율은 서양의 8등신에 가깝다. 6등신 반에 가까운 비율의 조선 여성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상식적인 신체비율의 여성을 그리고, 속살까지 노출시킨 것은 외국인이나 호사가들의 눈을 의식한 것으로 의심된다.

‘팔도’는 조선을 구성하는 행정구역이다.
[팔도미인도]는 각 지역을 대표하는 미인을 그린 것인데, 지극히 남성의 관음증이 느껴진다. 무슨 관광지나 지역특산물을 소개하듯 구성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채용신의 [팔도미인도]는 조선의 미인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다.
결국 이 그림은 채용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조선의 미인을 그렸다기보다 [채석강 도화소]란 미술공방에서 판매용, 즉 상업적인 용도로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

채용신은 아주 오래 살았다. 만 91세까지 살면서 파란만장한 시대를 통과했다.
조선에서 고위 관직을 지내면서 녹봉을 받았고, 또한 조선이 망해가는 것을 목도했고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다.
일찍이 서양화법을 전통화법에 녹여내면서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눈을 떴다. 사진기술을 미술에 적용해 대중적인 초상화 시장을 개척했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성(聖)과 속(俗)이 공존한다.
의로운 선비들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지역 유지나 부자들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선비들의 초상화에는 의연함이 풍기지만 부자들의 초상화에는 거만과 비굴함이 드러난다.
채용신은 수 십 점에 이르는 부자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요즘 돈 1000만원 가까운 그림 값을 받았다.
채용신이 원하는 이상은 가늠할 수 없지만 현실에 적응하는 능력은 탁월했고 격동의 시대에도 명성을 떨치며 풍요와 장수를 누렸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의 모든 가치는 폄하되었고 보물은 약탈을 당하거나 팔려나갔다.
신윤복의 [미인도] 이후 신선의 반열에 올랐던 기생, 아니 조선의 여성들은 다시 위안부나 천박한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채용신의 [팔도미인도] 속의 여성들은 표정이 없다. 도도함이나 정감, 매력은 사라지고 어설픈 몸짓에서는 지루함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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