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그림이 문자를 능가할 때가 있다. 또한 그림이 문자보다 더 큰 감동을 전해줄 때가 있다. 사실 그 어떤 것이 우위에 있다고 말하는 것도 우스울지 모를 일이다. 이 책을 두 번째로 읽고 난 지금, 다시 한 번 느낀다. 그 경계와 구분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1980년대 후반인가 90년대 초로 기억된다. 당시 에이즈에 감염된 이들이 집단으로 자신들의 권익을 위한 집회를 열었다. 물론 미국에서다. 당시 에이즈 보균자들은 가두시위를 감행했고, 이를 저지하는 경찰의 손에는 하나같이 고무장갑이 끼워 있었다. 농담 아니다. 정말 그들은 모두 고무장갑을 낀 상태였다.

▲ 프레데릭 페테르스 저, 『푸른 알약』, 세미콜론,  2014년 4월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랬다. 그 정도로 사람들은 에이즈라는 질병에 무지했다. 감염되면 바로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재앙, 게다가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들이 걸리는 신의 분노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 현재를 둘러보자. 그렇게 말하는 인종을 본 적 있는가. 뭐 있다면 참 아쉬운 일이겠다.

책은 저자의 실재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어린 시절 잠깐 스쳤던, 하지만 오랜 여운을 남겼던 그 여인을 6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나게 된 주인공. 그 여인은 그 사이 이혼을 했고,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된 이들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곧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은 곧 만만치 않은 벽과 부딪쳐야 했다. 그녀와 그녀의 아들이 에이즈 양성보균자란 사실 앞에서. 자,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사랑인가, 애매모호한 안전(!)인가.

우리 사회에 에이즈라는 질병이 처음 알려졌을 때 종교계를 비롯한 소위 ‘윤리 코스프레’를 하는 집단에서 난리 브루스를 추었던 기억이 난다. 도덕적 타락에 개탄하고, 보균자들을 마치 악마인양 저주했다. 그리고 수혈 중 에이즈에 감염된 이들은 가족에게조차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곤 했다. 말이 자살이지, 강요된 타살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에이즈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못하다. 과거보다야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에이즈는 낙인이다. 때문에 주인공의 선택은 사랑이라는 당연함이 있다 하더라도 감동적이다. 스스로는 자신이 이 여인을 사랑함에 있어 동정이라는 감정이 조금이라도 덧붙여 있을까 전전긍긍하지만, 이마저도 우리에겐 감탄과 존경을 불러일으킨다. 당연한 것에 감탄하는 우리. 잘못된 것은 과연 누구일까.

한 여인을 사랑하지만 그 여인과는 평생 콘돔만을 사용해 사랑할 수밖에 없다면? 그리고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면? 언제라도 에이즈에 감염될 위험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결코 쉽지 않은 질문일 것이다. 때문에 책은 역시 적지 않은 생각을 안겨 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사회가, 국가가 규정지어 놓은 그 틀 안에서 사실 우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낙인이 된다는 두려움. 나만 버려진다는 공포. 우린 때론 그러한 두려움으로 더 큰 죄악을 저지르곤 한다는 사실. 그게 더 무서운 일 아닐까.

책은 신파도 뭐도 아니다. 에이즈를 초월한 숭고한 사랑을 운운하지도 않는다. 다만 조금은 특별한 사랑을 해야 하는, 조금은 귀찮지만 그 에이즈라는 귀찮음을 감수하며 함께 살아가는 남녀의 이야기일 뿐이다.

때문이다. 더 감동스럽고, 더 와 닿는 이유가.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