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주 (문화기획자)

 

▲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이 주최한 제 10차 무용경연대회가 29~30일 일본 교토부 나가오까기념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사진제공 - 이철주]

지난 28일 학술 모임차 오사카를 방문했다. 이 날 오사카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했다. 오사카조선학원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고교무상화 제외 취소 및 지정 의무화 소송에서 승소를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오사카 지방재판소가 “무상화에 관한 법률을 조선학교에 적용하는 것은 납치문제 해결에 방해가 되고, 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없다는 외교적 정치적 의견에 기초해 조선학교를 무상화 대상에서 배제한 것은, 교육의 기회균등을 목적으로 한 법률의 취지를 일탈해 위법이므로 무효다”라고 판결 취지를 밝힌 것이다.

재일 조선인 공동체 사회의 근간을 이루며 민족교육과 민족예술의 요람이 되고 있는 조선학교에 가한 차별과 역사적 배경이 법정에서 인정을 받은 것으로써,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 힘들어 하던 재일 조선인 사회의 기쁨은 클 수밖에 없었다.

마침 방문 기간 중에 재일 조선인 무용계의 가장 큰 행사에 초청을 받아 참관할 기회가 생겼다. 29일과 30일 이틀에 걸쳐 교토부 나가오까기념문화회관에서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이하 문예동)이 주최한 제 10차 무용경연대회가 그것이다.

▲ 이번 경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출연자는 단연 오사카조고 무용소조의 서유희였다. 고급부 독무 1등을 한 천안삼거리 춤. [사진제공 - 이철주]

2002년 동경에서 시작해 개최 지역을 달리하며 개최 기간도 격년제로 바꾸어 이어져 온 본 경연대회는 문예동 무용소조, 여맹무용소조, 무용연구소 수강생, 조선학교 무용소조 소속의 무용인 모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마당이 서로 기량을 겨루고 지방마다 그 힘을 과시하는 기회로만 될 것이 아니라, 비록 일본땅에서 진행되는 경연이기는 하지만 이 마당이 바로 조국을 알고 조선민족을 느끼며 우리 자신의 근원을 재간직할 수 있는 마당으로 꾸림으로써 유족한 동포사회를 꾸려나가는데 계속 헌신분투해 나가겠다”고 문예동 임수향 무용부장은 대회의 의의를 설명했다.

첫 날은 독무경연대회가 조선학교 초급, 중급, 고급부로 나누어서 열렸고, 일반부가 연령별로 나누어 진행이 되었다. 또 군무와 중무 역시 연령별로 나누어 경연이 있었다. 이날 참가한 인원은 101팀 211명이나 되었다.

▲ 임수향 무용부장을 위원장으로 심사위원단이 구성되었다. 시상식에 앞서 심사위원이 경연대회 총평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 - 이철주]

다음날은 우수(입상) 작품 발표회와 지역 가무단의 기념공연 그리고 시상식이 열렸다.

심사위원단은 임수향 무용부장을 위원장으로 하여, 고인화 금강산가극단 무용부 부부장, 김경애 문예동 효고지부 위원장, 계영순 문예동 동경지부 무용부장, 권일선 문예동 교토지부 부위원장, 류정일 금강산가극단 무용부장, 리미남 인민배우, 리선옥 문예동중앙 무용부부장, 박선미 공훈배우, 윤미선 문예동 홋가이도 무용부장, 윤수지 문예동중앙 무용부위원, 현계광 공훈예술가로 구성이 되었다.

학생들은 학교 무용소조에서의 활동과 방과 후 무용연구소 강습 등을 병행하고 있어서 상당한 기량을 보였고, 일반인 역시 소속 단체별 무용소조 활동과 강습회 등을 통해 익힌 기량이 평균 이상이었다.

▲ 중급부 독무 출연 학생들. [사진제공 - 이철주]

초급학교 부문에서는 북측의 권위 있는 2.16예술상 2위 입상자인 송정애 무용가가 지도한 환희조선무용교실의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우수했고, 중고급부에서는 임수향 무용부장이 가르치고 있는 마이조선무용연구소의 학생들이 좋은 성적으로 거두었다.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왔던 김영란무용연구소와 김유열무용교실 역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번 경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출연자는 단연 오사카조고 무용소조의 서유희였다. 현재 3학년 생으로 마이조선무용연구소에서 강습을 받은 서유희는 신체적 조건도 좋고 많은 연습을 통해 쌓은 기량도 훌륭했고 특히 작품이 담고 있는 의도와 의미를 잘 파악하고 있어서 학생답지 않은 실력을 뽐냈다.

“3시에 수업이 파하면 5시까지 무용소조에서 연습을 하고, 하교 후에는 무용연구소에서 7시부터 9시 이후까지 5개월을 연습했습니다. 제 춤이 동포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에도 전문 무용수로 더 높은 기량을 쌓아 동포들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 더 좋은 작품을 피로하였으면 합니다.”

소감을 밝힌 서유희 학생은, 2000년 이후 재일 무용계의 스타 무용수인 송영숙, 리미령과 현 금강산가극단 무용부의 리화선의 뒤를 이을 대형신인으로서 큰 기대가 된다.

일반인 경연대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무용계 잔치 마당이었다. 평소 집안일과 단체 사업, 특히 조선학교 학부모로서 누구보다 바쁜 일정을 살아야 하는 재일 조선인 여성들이 자신만을 위해 거의 유일하게 투자하는 시간이 바로 소조활동 시간이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 소조 무용실이나 무용연구소 연습실에 모여 춤을 시간은 말 그대로 힐링의 순간이다. 그래서 경연대회에서도 입상을 우선시하기 보다는 무용부가 모두 모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는 기쁨이 우선했다.

그래도 문예동 오사카지부 무용부의 군무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일편단심 붉은 마음 간직합니다>란 명작을 40~50대가 절도 있게 동작을 맞추어 흐트러짐없이 소화한 것도 훌륭했고, 인민군협주단에서 안무했다고 알려진 군무 <소고춤>은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으로 흥과 멋을 살려내었다.

▲ 인상적인 작품은 군무부문에 출연한 문예동 히로시마지부의 부채춤 <봄꽃>이었다.(강리사, 김남순, 류미구, 리량숙, 리명화, 리미나, 리미회, 리지순, 박선애, 전화미, 황윤실 출연). [사진제공 - 이철주]

인상적인 작품은 <봄꽃>이었다. 한국무용을 대중화하고 해외에 널리 알린 대표적인 작품인 부채춤은, 최승희의 제자로 알려진 한국 신무용의 대가인 김백봉의 창작춤이다.

마찬가지로 <봄꽃>은 부채를 소품으로 하고 있고, 또 북측에 있는 최승희의 애제자인 김락영의 창작무라는 점에서 비교가 되었다. 봄꽃의 화려함과 생기발랄함을 부채를 활용해 유려한 율동으로 형상한 작품으로 김백봉의 부채춤과는 닮은 듯 달라서 최승희춤류의 현재진행형이 아닌가 싶었다.

이 외에 발표작품들도 다양했다. 4대 명작 중 하나인 <키춤>, 혁명 및 주체무용의 명작인 <나의초소>, <직포공의 마음> 등 다수의 작품이 선보였지만 그래도 압도적으로 민속무용이 다수를 차지했다. 민속무용인 <소고춤> <장고춤>, <북춤>, <도라지>, <무당춤>, <우리의 금수강산>, <손북놀이> 등이 선을 보였다.

이는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북측의 미학적 방침에 따른 우리식 사회주의 민족무용의 발굴과 창작을 요구하고 있는 방침을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특히 해외동포로서 민족의 얼과 넋을 지켜온 재일 조선인 사회의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 군무부문에 출연한 문예동 오사카지부 소고춤.(고령아, 김영화, 김직앙, 남지세, 림화나, 박미기, 박실희, 서영혜, 장성애 출연). [사진제공 - 이철주]

재일 조선인 무용은 1945년 해방을 전후해 민족의 말과 혼을 지키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민족교육과 시작을 같이 한다. 이때 일본 전역을 돌며 우리의 전통음악과 무용을 선보이며 민족성을 고취해 온 문화선전대가 활동을 하였다.

당시 재일조선인 대부분이 가입한 조련에서는 1948년 12월 조련중앙고등학원(예술학원)을 설립해 문공대 지도자를 양성했고, 1955년 6월6일 재일본조선인중앙예술단(구 제1문선대)가 창설이 된다. 이후 1959년 6월 7일 재일본조선문학가예술가동맹이 결성되면서 전국적인 체계를 가지고 활동을 하게 된다.

재일 조선인 무용계가 획기적인 전기를 맞은 것은 세 차례이다. 1959년 12월 14일 북측으로의 귀국 길이 열리면서 최승희 창작의 무용소품과 영상물이 전달이 되었고, 또 니가타 항구에 정박한 선상에서는 북측의 전문가들의 직간접적인 강습이 이루어졌다. 이때 전습된 작품이 <북춤>, <사당춤>, <도라지>, <벽화의 무희>, <검무> 등이다.

그리고 1964년 동경올림픽에 참석한 북측 대표를 환영하는 이사쿠사국제극장에서의 특별공연에서 민족무용으로서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후 1965년 동경가무단 설립 후 9개 지역에서 순차적으로 가무단이 설립이 되었다.

1973년 7월 30일부터 9월 17일까지 만수대예술단의 일본 순회공연이 있었고, 이때 동영상으로나 보던 ‘조국’의 예술을 친견한 재일조선인 사회는 뜨겁게 열광했고, 이들을 수행하면서 직접적인 전수가 이루어져서 무용의 수준은 더욱 높아졌고 예술적 깊이는 더 해 갔다.

마침내 중앙예술단을 주축으로 한 재일조선인예술단이 1974년 4월 평양을 방문해 남포항 근처 무대에서 혁명가극 <금강산의 노래>를 전습 받은 것이 두 번째 전기가 될 것이다. 그 결과 중앙예술단은 1974년 8월29일 <금강산가극단>으로 개명하고 국립해외예술단으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세 번째는 1984년 11월부터 조선학교 학생들이 평양음악무용대학 통신수강 및 연수가 시작된 것이다. 비록 1981년부터 평양 방문 강습이 매년 4차례 이루어졌지만,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무용 강습이 이루진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이후 1987년부터 재일조선학생예술단이 매년 북측의 설맞이 공연에 참가를 하였고, 1991년 2월 2.16예술상에서 현 금강산가극단의 책임안무가인 강수내 인민예술가가 무용부문에서 재일조선인 무용 역사상 최초로 3위를 수상하면서 정상의 수준에 오르게 된다.

▲ 천안삼거리 춤으로 고급부 독무 1등을 한 오사카조고 3학년 서유희 학생과 어머니, 도라지 춤으로 고급부 입선을  오사카 조고 3학년 김미나 학생과 어머니. [사진제공 - 이철주]
▲ 응원 차 방문한 교토 조선중고급학교 무용소조학생들.(앞줄은 중급부, 뒷줄은 고급부). [사진제공 - 이철주]

한편 재일 조선인 무용은 초기에는 남측에서 일본으로 간 무용가들부터 출발을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중앙예술학원 무용과장으로 활동하며, 1955년 동경에 김장안무용연구소를 개설한 김장안이다. 문예동 최초의 무용부장으로 있다가 북측 행을 한 후 황해도예술단 안무가로 활동을 하였다.

오사카 지역에서는 조봉희가 중심이 되었는데, 1954년 고베조선무용연구소를 개설하였고, 1960년 3월에는 총련 문화소조 지도원양성강습회 강사를 역임했다.

그리고 전통춤은 최승희와 함께 일본 현대무용의 아버지라 칭하는 이시이바쿠 문화생 출신으로 남측의 신무용을 개척한 조택원이 칼춤, 초립동, 한산춤 등을 전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로부터 민족무용을 전수받은 김일순, 임추자, 리미남, 현계광 등이 재일 무용계를 형성해 왔고, 이후 고정순, 김영란, 강휘순, 계영순, 김유열, 강수내, 임수향, 리경희, 박선미, 송정애, 송영숙 등이 그 ‘계주봉’을 있고 있다.

북측에서는 1996년부터 1998년 사이에 북측의 전문가를 파견해 3차례의 조선무용강습회를 개최해 조선무용기본동작, 조선무용기초동작, 조선민속무용기본동작 전습을 한 바도 있다.

이때 지도원으로 참가한 북측의 무용가는 리인숙(평양무용음악대학), 현은실(파바다가극단), 김은하(조선예술교류협회), 김혜옥(평양민족예술단) 등이다.

현재에도 북측 최고의 무용 권위자들인 김락영, 홍정화, 백환영, 김해춘, 한은화, 백은수, 박용학, 고은화, 오영옥(발레), 최은희(발레) 등이 재일 무용가들에게 작품 안무와 전습을 이어오고 있으며, 단체로는 피바다가극단, 평양무용대학, 평양민족예술단, 만수대예술단 등이 교류와 협력를 지속하고 있다.

▲ 경연대회 무대 밖 풍경. [사진제공 - 이철주]
▲ 초급부 독무 출연 학생들. [사진제공 - 이철주]

한편 북측에서 예술학 박사를 받은 재일조선인 최초의 무용이론가인 조선대학교의 박정순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2012년 11월 현재 재일 무용계의 현황은 아래와 같다.

금강산가극단 무용부 19명 및 지방가무단 무용부 14명,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무용부 9개지역 173명, 여성동맹 무용소조 17개 151명, 초급부 무용소조 47개교 486명, 중급부 무용소조 30개교 301명, 고급무 무용조소 10개교 171명, 조선대학교 무용소조 61명, 전국 18개소의 조선무용연구소의 전문가 33명 및 수강생 508명, 도쿄, 가나가와, 도카이, 오사카, 히로시마 지방의 조선무용단과 민족 무용단 91명 등 총 2천 여 명의 무용가 및 무용애호가가 활동 중이라도 한다.

이틀 동안의 참관 기간 동안 내가 만난 모든 조선학교 학생과 교원, 동포들의 공통된 바람은 두 가지였다. 가깝게는 조선학교의 정상화와 민족교육을 지켜낸다는 각오, 그리고 한반도의 통일이었다. 칼바람 부는 이역 땅에서 더 올곧게 민족예술을 지켜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비록 형식과 내용이 달라졌어도 장단과 신명 그리고 그 안에 면면히 이어져 오는 호흡이 하나라면 여기서 통일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조선무용예술 1번수’라 명명한 최승희의 후예들로 대를 이어 민족무용은 지켜온 이들이 쌓아 올린 우리춤의 공든 탑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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