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광경은 아빠도 텔레비전에서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어. 그때마다 ‘기아는 부드러운 죽음이다. 점차 쇠약해지다가 마지막에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 없이 죽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빠 자신을 세뇌시키고 있었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단다! 누더기 속에서 일그러진 작은 얼굴들은 그들이 가공할 고통을 겪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어. 작은 몸들이 흐느끼며 오그라들고 있었지. 엄마나 누이들이 때로 숨진 아이의 얼굴에 가만히 수건을 덮었어.”

‘이러다 정말 죽는 건가’ 느낄 정도로 굶어본 경험이 있는가. 감사하게도 난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 몇 번 기아체험이나 자선행사에서 24시간 금식해 본 적은 있지만, 죽음을 느낄 정도의 굶주림을 겪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런, 어찌 보면 배부른 퍼포먼스(물론 행사를 기획한 분들의 높은 뜻을 무시하는 건 절대 아니다)가 아닌 삶 자체가 죽음과 몇 번이나 조우해야 하는 이들이 전 세계적으로 수십억이 된다면? 5초 마다 한 명의 어린이가 단지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간다면? 하루에 1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굶주림으로 죽어간다면? 당신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가.

슬프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지금도 전 세계 6억 명의 어린이들이 1,300원이 안 되는 돈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온갖 추악한 명분으로 가득 찬 전쟁과 내전으로 굶주리고, 국가를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로 굶주리고, 양극화와 불평등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금융과두지배체제로 인해 굶주린다.

또한 과거 제국주의 열강들이 만들어놓은 식민지 정책으로 충분히 스스로 식량을 생산해 자족할 수 있음에도, 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비싼 돈을 지불하고 식량을 수입해 먹는 현실이 어린이들을 굶주리게 한다.

▲ 장 지글러 저/유영미 역,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2007. 3. [자료사진 - 통일뉴스]

책은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한 저자가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 세계 기근의 현실을 아들에게 설명해주는 형식이다. 왜 현 인류의 2배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하면서도 인구의 절반이 만성적인 기근으로 고통 받아야 하는지를 쉽고도 가슴 아프게 소개한다.

우리는 보통 의식주라 말한다. 일단 몸을 가려야 하고 그 다음 먹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소리일 게다. 반면 북은 식의주다. 먹는 문제가 보다 절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단 북 뿐만 아니다. 생명체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을 위한 영양분의 공급이다. 먹는 문제, 이것이 실상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매년 700만 명이 기근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세상. 먹을 것이 없어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어머니들. 국제기구의 지원 식량을 탈취해 그것으로 다시 폭리를 취하는 군부와 독재정권. 기업의 이윤을 위해 한 나라의 기근을 조장하고 방치하는 다국적 기업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느낄 것이다. 여전히 세상은 온전히 돌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기근의 원인은 다양하다. 전쟁과 정치적 무질서, 도시화와 식민지 정책의 결과, 금융과두지배의 악몽, 거대 기업들의 횡포. 환경파괴의 영향까지. 다양한 이유로 인해 세계의 아이들은 오늘도,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다.

다국적기업 네슬레의 횡포로 굶어죽어야 했던 칠레의 어린이들, 젊은 개혁가 상카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처참한 기근의 늪으로 빠져들고 만 부르키나파소, 미국이 주도한 전쟁과 경제제재로 인해 무수히 많은 어린이들을 묻어야 했던 이라크까지. 저자가 말하는 세계 기근의 현실은 처참하기만 하다.

더욱 무참하고 치가 떨리는 것은 이러한 기근이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인위적이라는 사실이다. 거대기업,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고의적 행동으로 초래된 기근. 이는 기근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고의적 방치 혹은 집단 학살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책은 북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소수의 권력자들이 무모한 핵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많은 인민들을 굶주림에 죽어가도록 방치했다는 비판이다. 부족하나마 북을 공부한 사람으로 반은 타당하고 반은 재론의 여지가 있다고 보이지만, 그동안 북한 인민들의 삶이 매우 힘들었다는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실재 북의 인민들은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먹는 문제로 힘겨워하고 있다. 권력자들이 핵을 만들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봐야 하지만, 그렇다고 인민들의 굶주림이 정당화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지난 2010년 아이티 대지진으로 많은 국가들이 구호활동에 나선 바 있다. 물론 우리도 구호물자와 인원을 보냈다. 당연한 조치고 매우 잘 한 일이었다. 하지만 강대국들의 본심은 이내 드러났다. 대규모 군대를 파병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아이티 재건을 위해, 즉 ‘새로운 투자’를 위해 계산기를 두드렸다. 자기들끼리 파이는 분배했다. 이제 아이티는 또 다시 천문학적인 부채를 짊어지게 되었고, 비참한 가난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마다 선진국의 자국 농업보호정책으로 생산되는 식량의 양은 엄청나다. 그 양이면 아프리카를 비롯해 세계 전 지역의 어린이들을 살릴 수 있다. 하루에 1,300원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야 하는 6억 명의 어린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빵을 전해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한다. 오로지 이윤의 극대화라는 그들의 확고한 철학 때문이다.

전 세계적인 기근을 막는 방법, 이는 결국 타인의 고통에 눈감지 않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저자의 확신에 찬 말이다. 언뜻 공허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용기는 결코 미약하지 않다. 당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그 무엇이 실은 다른 어린이에게 돌아갈 몫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용기는 희망을 만들 수 있다.

그 용기를 키워나갈 수 있는 첫 걸음을 책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권유하고 있다. 쉽게 거절할 수 없는 권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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