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역시 여타 속 좁은 혹은 무지한 부류에 속하기에 평론이라는 장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무엇보다 필요하고 중요한 부분일 텐데 말이죠.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문학이나 영화 등 예술에 대한 평론은 일단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있었고, 때문에 제가 보기에 “아무나”가 평론이나 뭐 비판 등등을 해대면 일정하게 무시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으악, 지금 생각하면 참 땀이 날 정도로 부끄럽고 주제넘은 생각이었죠. 평론을 ‘특권화’한다는 것은, 역으로 대중을 ‘한심한 바보’따위로 전락시킬 수 있는 위험이 다분하니까요. 물론 그렇지만, 일정한 ‘공부’를 한 이들의 평론을 즐기는 기쁨도 무시할 순 없습니다.

영화는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충족시켜줍니다. 일단 자신이 실재 겪을 수 있는 이야기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경험할 수 없는 환상적인 이야기까지, 다양한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영화가 가진 최대의 매력일 것입니다.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못가는 곳이 없고, 못할 것이 없죠.

그 과정에서 때론 일상의 짐을 잠시 잊고, 때론 더 나은 삶을 향한 욕망을 키우게 됩니다. 좌절하고, 쓰러지고 그러나 다시 일어서는 주인공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떤 여정을 통과하는 지 어렴풋이 느끼기도 합니다.

▲ 이상용,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홍시, 2008. 10. [자료사진 - 통일뉴스]

저자는 우리 삶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다양한 키워드를 중심으로 영화를 이야기합니다. 거짓말, 웃음, 환상, 시간, 역사, 사이버, 관계, 세상의 어머니, 영웅 등을 주제로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고, 평가하고, 예찬합니다. 일단 광범위한 그의 지식과 날카로움이 돋보입니다. 저 같은 평범한 이는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는 영화의 속살을 친절히 소개합니다.

책을 통해 이미 보았던 영화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 미처 챙겨보지 못한 영화들은 ‘꼭 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첩에 꾹꾹 눌러 담은 영화 제목과 감독의 이름들이 보입니다. 특히나 히치콕 감독의 영화와 찰리 채플린의 영화들은 반드시 다시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엄청난 제작비와 화려한 캐스팅으로 세계 영화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의 파괴력 앞에서 자국의 영화가 그나마 선전을 거두고 있는 국가는 인도, 일본, 이란 그리고 우리나라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더욱 광범위하게 퍼졌고, 역으로 영화가 신자유주의에 구속되어있는 현실에서 우리나라의 영화는 더욱 소중합니다.

전 스스로 주제넘지만 ‘끊임없이 생각하는 진보’가 되자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제 주위를 감싸 안았던 미국이라는 국가의 다양한 영향력이 무의식중 제 의식과 행동을 제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프랑스나 독일의 영화보다는 미국 영화가 훨씬 덜 부담스럽다는 사실 자체가, 제가 얼마나 미국의 문화에 적응되어 있는지 보여줍니다.

이런 습성을 하지만, 억지로 털어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영화를 단순히 영화로 보느냐, 그렇지 않으면 영화가 감추고 있는 날카로운 이데올로기, 또는 프로파간다를 간파하려 진땀을 빼며 보느냐는 물론 다르겠지만, 전 그 두 가지를 영원히 병행할 생각입니다. 사실 그 둘을 나눈다는 것은 별 의미도, 재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그 시대를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이상과 좌절을 담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믿고 싶은 구석도 하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반성, 그리고 현재에 대한 처절한 드러내기가 함께 하고 있다고 말이죠. 그런 영화를 바라보며 우리는 정당한 관음증 환자임을 자부할지도 모릅니다.

재미있는 영화를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별로 없습니다. 엿보기가 재미있다는 만고불변의 진리, 우리는 그 엿보기를 통해 또 다른 자신을 확인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난해하지 않고, 즐겁게 영화 속 이야기들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시간과 비용이 아깝지 않습니다. 저자의 바람대로 더 자주 글을 통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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