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대부분 아니라고 하겠지만, 우리 안의 ‘미국’은 꽤 강고하게 버티고 앉아 있다. 여전히 말이다. 트럼프라는,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인물이 나타나 다소 충격을 주고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우리 안의 ‘미국’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많은 이들에게 미국은 변함없는 ‘우리의’ 미국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굳이 그것을 친미나 사대로 표현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저 해방과 전쟁 이후 지금까지 우리의 현대사를 관통해온 ‘생존’이라는, 혹은 나아가 남들보다 더 호사스러운 생존이라는 그 무엇을 위해 끊임없이 의식해야만 했던, 그 무엇인가가 우리 안에 인이 박인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때문에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시간과 공간에서도 미국을 소환하곤 했다. 지난 촛불혁명의, 그 맞은편에서 추악한 대통령의 결백을 부르대던 참담한 태극기의 물결 속에도 성조기는 함께 했고, 북한의 도발을 비난하는 광장에서도 성조기는 나부꼈다. 우리의 주권인 전시작전통제권을, 우리에게 이양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그 무슨 호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시위의 현장에서도 초대형 성조기가 우리의 땅을 뒤덮었음을 떠올리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그래서다. 우리는, 아니 우리 중 생각보다 적지 않은 이들은, 그 무슨 친미주의자니, 사대주의자의 영역을 넘어선지 오래이다. 영혼과 육체에 미국의 인이 박인 것일 뿐이다.

그런데, 미국은 어떤 나라, 어떤 집단인가. 지금 트럼프가 FTA 재협상이니, 방위비 분담금이니 핏대를 세우는 것은 전혀 ‘미국’답지 못한 행동인가. 파리기후협정 탈퇴는 오직 트럼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이 한미동맹 질서의 정당성을 부여해 줄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한미동맹의 한계가 뚜렷하다는 사실 또한 입증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무슨 의미를 주고 있는 것일까.

미국 역시, 아니 어느 나라보다 전 세계에서 가장 그악스럽게 자신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타자를 착취하고 희생시켜온 집단이 바로 미국임을 애써 부정하고, 외면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쯤 이런 기형적 사고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그 의지는 여전히 가지고 있을까. 여전히 주변부에 간신히 살아남아 있을 뿐인가. 아직도 어렵고 난망하다.

▲ 전북민주동우회 자료 제공 / 정동익·김대웅 엮고 지음, 『전두환에 관한 비밀 리포트』, 미다스 북스, 2017. 6. [자료사진 - 통일뉴스]

책이 관통하고 있는 것은 1979년 10월 박정희의 죽음과 이어 등장한 전두환 세력, 그리고 80년 광주와 87년 6월의 함성까지이지만, 동시에 담고 있는 것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과 인식이다.

때문이다. 두서없이 미국을 글머리에 호명한 이유가. 글쓴이들은 명토 박아 말한다.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이익 관철’이었다고. ‘미국은 박정희 암살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지금도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거나, 혹은 확신하고 있는 영원한 ‘음모론’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책은 왜 미국이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등을 돌렸는지, 그리고 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정권 탈취를 용인하고 나아가 지원했는지, 다양한 근거와 당시의 자료들을 제시하며 설명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의 권력 장악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책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이 5·18 광주의 비극마저 외면할 만큼 전두환 정권을 지원한 것은, 오로지 그들의 이해관계에 있어 전두환이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거기엔 미국의 국내외 정치적 이해와, 당연하게도 경제적·군사적 이해관계가 고려되었다. 결국 미국의 외교적, 군사산업적 이익의 충족을 위해 박정희 이후 또 다시 군사독재정권이 이 땅에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5·18 광주의 아픔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책은 전두환 정권의 탄생 과정부터 87년 6월의 뜨거운 함성이 울리기 전까지, 한미 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과 비화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전두환 정권의 남북정상회담 추진 과정, 88서울올림픽을 둘러싼 남북의 긴장과 대결구도도 등장한다. 그리고 운명의 1987년, 4·13호헌조치와 박종철, 이한열 열사와 6·10항쟁, 6·29선언까지, 그 치열하고 또한 비장했고 뜨거웠던 순간들로 끝을 맺는다.

다시 돌아간다. 그렇다면 지금의 미국은 어떠한가. 북한의 핵·미사일을 핑계로 FTA를, 방위비 분담금을 걸고넘어지는 지금의 미국은 어떠한가.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 속에서 어려움에 처해있던 우리에게, 동맹이라는 국가가 우리 국민의 정서는 고려하지도 않은 채 장차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지역의 불안과 갈등을 가져올 것이 빤한 사드를 밀수하듯, 급하게 들여오고 그리곤 이제 그 대가를 치르라고 언죽번죽 요구하는, 지금의 미국은 무엇인가.

책은 분명 전두환 세력의 권력 장악과정과 87년 6월로 인한 시민의 승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을 새삼 다시 한 번 확인케 한다. 1987년 이후 2016~2017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는 수없이 많은 격동의 순간들을 살아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국이란 존재가 함께 했다.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어쩌면 이제 다시 한 번 미국을 똑똑히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열렸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미국을 그 누구보다 잘 안다고 떠들던, 정작 트럼프의 당선도 맞추지 못한 윤똑똑이들이 아닌, 우리 각자의 있는 그대로의 시선으로 미국을 바라볼 때이다.

‘동맹과 제국’이라는 ‘한미관계의 두 신화’(박태균)를 넘어 제대로 미국을 톺아볼 수 있기를 스스로도 바라본다. 이 책이 그 자극이 되었음을 밝힌다.

“위기란 바로 낡은 것이 죽어가고 있지만 새로운 것이 태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 안토니오 그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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