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과연 수천 년 전보다 나아진 것일까? 문득 생각을 하곤 한다. 과학의 눈부신(사실 개인적으로 눈부셔 본 적은 없다만) 발전으로 우리는 과거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과거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암튼 그런 생각이 요즘 자주 든다. 들리기에는 참으로 네 가지 없는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문득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참 재미없고, 염치없는 것은 아닌지 싶다.

스마트폰이나 휴대폰을 통한 스팸사기는 이제 특별한 일도 아니다. 주변에도 심심찮게 당했다는 증언들도 들린다. 그런데, 휴대폰이라는 것이 없고,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당연히 스팸문자를 통한 사기행각도 없겠지. 공중전화나 집 전화를 사용하던 때에는 상상치 못한 일이다. 그냥 ‘아, 정말 각박하고, 재미없고, 짜증나는 세상에서 나는 꾸역꾸역 살고 있구나.’ 사실 조금 화도 나려 했다. 오죽하면 주민번호를 바꾸게 할 정도인가.

참으로 싸우길 좋아하고, 남을 헐뜯기 좋아하고, 자신만을 위해 아귀다툼에 몰두하는 세상이다. 물론 ‘아직도 이 사회는 따뜻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운운하며, 간혹 나오는 미담이나 훈훈한 이야기들이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미담으로 조명된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지금 이 세상이 얼마나 살기 팍팍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시끄럽다고 허공에 매달린 이의 생명을 잘라버리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극도의 긴장사회, 분노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 정우식, 『하루 첫 생각』, 다음생각, 2010. 2. [자료사진 - 통일뉴스]

듣기 좋은 말만 하고 또 듣고 살 수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가능하면 서로를 챙겨주고, 사랑해주는 따뜻한 말을 나누며 살 수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그러면 이 팍팍한 세상에서 그나마 숨 쉴 틈이 생기지 않을까.

필자는 너무 게을러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녀석이다. 그래서일까. 제일 존경스럽고 부러운 이들이 바로 ‘아침형 인간’이다. 물론 아침형 인간에 대한 온갖 찬사에는 100% 동의할 수 없다. 누군가 지적한 것처럼, 아침형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차이는 다만, 아침형 인간이 조금 더 잘난 체 하는 것뿐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나보다 먼저 시작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존경을 표한다.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니 말이다.

책의 저자는 매일 새벽 눈을 떠 명상의 시간을 가지며, 느끼고 결심하고 반성하고 되돌아본 시간들을 글로 담아두었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나온 성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생명평화운동가인 저자는 자연과 생명, 인간과 또 다른 인간이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바람을 글에 담았다. 지극히 소소한 이야기부터, 가슴에 뜨끔 와 닿는 글귀까지 다양하다.

그는 이런 ‘하루의 첫 생각’을 지인들에게 메일로 보냈다. 그만의 아침인사인 셈이다. 어떤 이에겐 상쾌할 수도, 어떤 이에겐 지난밤의 숙취로 인해 힘겨울 수도 있는 아침에, 그는 짧은 글귀로 하루를 보다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도록 그만의 방식으로 ‘인사’했다.

나쁜 말, 저주가 가득 담긴 흉기와 같은 말보다는 편안하고 아름다운 말들이 듣기 좋은 법이다. 글 역시 마찬가지. 때론 매섭게 상대를 비판하고 때론 치밀하게 무언가를 분석해야 하는 글도 있지만, 저자처럼 짧지만 부드러운 여운을 남기는 글도 삶에는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좋은 말과 글을 지금보다 더 많이 보고 읽어야 하지 않을까. 이 혼탁하고 ‘어이’가 사라진 시대를 견디려면 말이다.

정치인들을 보면 가끔 이건 아니다 싶게 말을 내뱉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된다. 언론인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기준에서 그들을 언론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특별히 지금도 애틋하게 기억나는 분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욕정을 분출해 조용히 사라졌다가, 태극기와 함께 화려하게 컴백한 윤창중 같은 이다.

그는 18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정운찬 전 총리, 윤여준 전 장관 등을 싸잡아 ‘정치적 창녀’, 야권 전체는 ‘쓰레기 인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추모하는 인파는 ‘황위병이 벌인 환각파티’로 매도한 바 있다. 그밖에도 온갖 화려한 수사로 국민들을 상큼하게 열 받게 했던 기억이 새삼 새록새록이다.

이런 인간(인간이라고 해야겠지 그래도)들의 말은 단순히 말이 아니다. 무서운 흉기와도 같다.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때론 죽음으로 몰고 간다. 어설픈 언론의 저주의 펜 놀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절망으로 몰아갔는지, 그들은 분명 깨달아야 한다.

저자의 글들을 읽으며, 어떤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그 ‘당연한’ 글귀에 눈을 모아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점점 시간이 갈수록, 정의와 상식과 ‘지극이 당연함’을 잃어가며, 혹은 잊어가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잠시 스스로 착각하며 지낸 건 아닌가 싶다. 여전히 변화는 버겁다. 웜비어의 죽음 앞에, 미국 국민들의 분노 앞에, 트럼프의 ‘격노’ 앞에 우리 언론, 정치권이 보여주는 모습들을 보자면, 여전히 변화는 버겁다. 주군의 심기를 불편케 하여 어쩔 줄 모르는 노예와 다름없다. 웜비어가 북측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나 인신 상의 폭력을 당했다면, 정확히 진상을 조사할 수 있도록 북측에 요구해야 하는 게 맞고, 고인의 가족들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줘야 한다.

하지만 북한이 그를 살해했다는 단정으로 시작해, 북한 체제를 또 한 번 비정상적인 ‘미친’ 국가로 몰아가는 것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의 심기를 거스를까 알아서 기는 엿 같은 행동도 미국을 전혀 감동시키지 않는다. 아마도 우습게 하찮게 알겠지.

문정인 교수의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에도 미국이 열 받을까 노심초사하는 언론과 정치권. 다시 한 번 좋은 말 고은 말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참 형편없는 것들이구나 느낀다.

다시 책에 담긴 문장들을 이른 아침 한 페이지씩, 찬찬히 읽어보며 마음을 닦아야겠다. 누가 보면 분노조절장애인 줄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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