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스스로 생각한 대로 행동하고 선택하며 살아간다고 믿는다. 적어도 실현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무언가를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는 정말 스스로 생각한 바대로 살아가고 있을까. 만약 그 어떤 존재가, 그 어떤 무엇이 우리를 조종하고 있지는 않을까.

인간은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신념은 개성과 위치, 살아온 환경과 체험한 모든 것들에 따라 다르다. 타인에게 하찮게 보이는 것이라 해도 정작 본인에겐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신념을 바꾸어버리는 것이 있다. 무참한 획일성을 강요하는 그 무엇. 그것은 바로 소비다. 우리는 개인의 선택으로 일생 동안 소비행위를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개인의 선택’은 참으로 비루하다.

자본이, 기업이 이미 권력을 장악한 지 오래인 시대다. 정치는 온갖 화려함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이미 빼앗겼다. 이제는 기업이란 이름의 권력집단이 국가를 통제하고 또한 착취해 나간다.

▲ 주원규, 『반인간선언』, 자음과모음, 2012. 1. [자료사진 - 통일뉴스]

소설은 종교화 되어버린 기업의 실체를 보여준다. 참혹한 살인사건의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자본과 기업의 노예가 되어버린 국가가 조우하게 된다. 국가는 기업을 통해서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삼성, 현대 두 기업이 대한민국 경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당신이 자동차를 구입하든, 컴퓨터를 구입하든, 핸드폰을 구입하든 선택의 여지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하다못해 라면 한 봉지조차 우리는 강요에 의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 뿐이다.

IMF의 환란 속에서 국가는 국민들의 엄청난 희생을 강요해가며 기업을 회생시켰다. 은행을 살렸고, 자본을 살렸다. 하지만 그 자본, 기업은 그러한 국민들의 희생을 당연시했다. 기업이 무너지면 국가가 무너진다는 ‘신화’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경제적 가치로만 모든 것이 평가받는 시대에 기업은 필히 종교가 될 수밖에 없다. 삼성교, 현대교가 이미 모든 종교를 압도하고 있다. 대통령조차 범접할 수 없는 자본의 힘 앞에 평범한 국민, 시민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시대, 신자유주의시대는 자본과 기업들에게 무한한 권력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을 함께 지려는 이들은 찾을 수 없다. 국가의 구성원들은 다만 소비하고 다시 소비하는 존재일 뿐이다.

제목은 우리가 과연 이 시대에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묻는 것 같다. 단지 소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존재, 소비의 능력을 상실하면 인간으로서의 가치도 함께 소멸해버리는 지금, 기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익창출이라는 명확하고도 순수한 목적만을 위해 존재하는 기업. 그 기업은 이제 국가를 넘어 전 지구적인 세포분열을 반복하고 있다. 과연 소비의 주체인 개인이 더 이상 생존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온다면, 기업은 개인을 어떻게 처리할까.

짧은 분량의 소설은 그 어떤 반전이나 감동도 전해주지 않는다. 다만 무한한 자괴감과 무참함을 전해준다. 하지만 그러한 자괴감, 무참함에 무감각해지는 순간, 우리는 진정 인간임을 포기해야 한다.

“민족, 정치, 시민, 정부, 행정 등의 개념을 신봉하는 이들은 진실을 보지 못하지. 하지만 기업은 달라. 기업은 이윤 추구 집단이야. 사악해 보이고 게걸스러워 보이지만 그만큼 투명하지. 기업은 욕망에 대해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반드시 기업의 종교화가 필요한 거야.

이 욕망이 또다시 자연, 짐승인 사람들에게 왜곡된 진실을 알려주기 전에 신을 향한 욕망의 패러다임을 온전히 선포할 수 있는 종교성이 성립되어야 하지. 단언컨대 종교적 근간을 적극 수용하는 기업은 약육강식의 질서 또는 계급의 최상층을 점할 수 있네. 흩어진 자연, 짐승인 사람들을 끌고 가며 바벨탑을 쌓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인류의 참 모델이 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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