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일본 만화에 대해 그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편이 아니다. 때문에 ‘요시다 아키미’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이 전무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바나나 피시』에 대해서도 몰랐으니, 원체 무식함이 자랑인 녀석이다.

▲ 요시다 아키미 지음/추지나 옮김, 『길상천녀』, 애니북스, 2010. 12. [자료사진 - 통일뉴스]

 

『길상천녀』는 제29회 쇼가쿠칸 만화상을 수상한 작품이라 한다. 이 작품으로 스타작가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니, 대표작 중 하나라 할 만 하다. 일본의 전통적인 천녀 전설을 현대와 접목시켜 인간의 탐욕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는 문제작이다.

확실히 예전 스타일의 만화이다 보니, 그림체가 약간은 옛스러운 느낌이 난다. 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스타일을 좋아하는 나에겐 오히려 읽기에 거부감이 없었다. 촌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걸 보니, 나도 역시 이젠 늙었다는 서글픔이….

내용은 뭐라 그럴까, 판타지 스릴러 정도? 천녀의 전설을 지닌 유서 깊은 가문 카노 가(家)의 딸 사요코는 절세의 미모를 지닌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다. 그녀는 자신의 집안 재산을 노리는 토노 가의 아키라와 료를 상대로 숨막히는 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그 와중에 그녀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남자들이 하나씩 죽기 시작한다.

지금은 물론 그렇지 않지만, 어린 시절 우리 만화를 보면서 느낀 아쉬움 중 이런 게 있었다. 소재의 빈약함. 물론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분명 작가들 역시 이러한 한계에 괴로워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무엇을 표현하는 것조차 법의 판단, 정확히 말하자면 권력자들의 판단에 좌우되는 어처구니없는 시대에 살았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이 지금도 아예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도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100% 누리지 못하며 살고 있다.

반면 일본 작가들의 만화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향연이었다. 단순히 흥미를 자극하기 위한 만화에서부터 장대한 스케일을 내뿜는 대작에 이르기까지, 스토리도 주제도 정말 다양하다는 감탄을 하곤 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작가들이 유독 뛰어나다거나, 우리 작가들의 상상력이 초라해서가 아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일찍 만화에 대한 투자와 관심을 두었을 뿐이다. 그 차이를 무시하면 안 된다. 오히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급속히 성장한 우리 만화가 더 대단하다는 평가를 내려야 마땅하다. 이건 애국심 따위와는 상관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지금도 재미있게 읽었던 일본 만화들이 떠오른다. 물론 내가 마니아 수준까지는 아니어서 다양한 작품들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아주 유명하거나, 평가가 높은 작품들은 어느 정도 읽은 것 같다. 여기에 내 개인적 취향도 포함되고.

『길상천녀』는 지금 읽으면 감흥이 덜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메시지는 여전히 살아있다. 적어도 난 이 작품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무지막지한 편견과 폭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은 끔찍한 사실이다.

주인공 사요코는 뛰어난 미모로 인해 늘 남성들의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이는 남성들에겐 소유하고픈 하나의 정복 대상에 불과하다. 여성의 性(성)이 상품화, 전시화되는 지금의 상황과 전혀 다르지 않다.

나는 작품을 읽으며 문득 강인규 교수(『망가뜨린 것 모른 척 한 것 바꿔야 할 것』의 저자)가 말했던 아이돌 그룹에 대한 글이 떠올랐다. 지금 여성 아이돌을 바라보는 시각이 과연 온전한 것인지, 아니, 여성 아이돌들이 왜 이렇게 많이 나오며, 인기를 얻고 있는지를 분석한 강 교수의 글은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한다. 소개하고 싶지만, 참겠다. 직접 확인하시길.

경제가 발전했다는데, 이상하게 한국의 자살률은 높아만 간다. 그것도 젊은 여성들의 자살률이 남성의 그것보다 앞선 것은 한참 된 일이라 한다. 왜 그럴까? 이 시대 여성들이 행복하다면 그렇게 많은 자살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단순히 또 개인적 문제로 덮어버릴 것인가? 다들 마음이 굳세지 못해서? 그렇게 말하는 인간에게 되묻고 싶다. 마음이 약하면 죽어버려야 하는 게, 그런 게 아름다운 세상인가?

저자는 일찌감치 남녀 차별과 여성에 대한 착취 그리고 성적 상품화에 대해 예리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다. 이 작품에서 어떻게 거기까지 나가냐고, 너무 앞선 해석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다. 직접 확인해보시면 알 것이다.

경제적 압박으로 사랑조차 나눌 수 없게 된 청춘들. 그리고 젊은 여성들. 그들은 사회적 차별과 억압이라는 또 다른 굴레를 함께 짊어지며, 남성들과 경쟁에 나선다. 이 땅의 모든 딸들이 행복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는 것 아닐까? 곧 소멸되겠지.

때문이다. 이 작품이 단순히 기구한 운명을 가진 한 여성의 무시무시한 복수극으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가.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상처를 여성들에게 알게 모르게 주었을까. 지금의 현상을 깨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 이 땅의 모든 남성들은 어쩔 수 없이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반성하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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