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복(壽福)은 우리 백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글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백성들만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중국이나 일본의 백성들도 좋아한 문자이다.
수복에는 유학과 한자문화권에 있는 동아시아 나라들의 공통된 가치가 담겨있다.

조선은 학문의 나라이자 문자의 나라였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은 사회적 능력의 척도였다. 그래서 추상적 가치였던 학문을 사회적으로 드러내면서 동시에 내면을 수양하는 방편으로 시서화(詩書畵)가 발전했다.
선비들은 주자성리학이나 유학을 대표하는 구절이나 글자를 찾아 낭독하고 유려한 붓질로 표현했다.

하지만 수복(壽福)이라는 글자는 주자성리학이나 유학과는 별 관련이 없다.
주자성리학을 대표하는 핵심 글자에는 삼강오륜이나 예악(禮樂), 군자, 인의예지신 따위가 있지만 수복은 여기에 끼지도 못하고 어울리지도 않는다.
또한 선비들의 그림이나 글에서도 수복이란 단어를 찾기 어렵다.
 

 

수복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오래 사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도교적인 성격이 강하다.
무병장수, 불로장수의 내용을 담고 있는 수(壽)는 반자연적이고, 허영과 사치를 포함한 복(福)은 반사회적인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주자성리학이 완성되는 조선 중기까지 만해도 불교나 도교는 이단으로 취급당했고 이런 전통은 강약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조선이 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조선후기 북학파 선비들은 철학과 사상적으로는 조선이 세계에서 가장 발전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경제나 과학은 상당히 뒤떨어져있다고 여겼다.
또한 청나라가 동아시아의 실질적인 강대국으로 부상한 현실에서 북벌론 같은 주장은 현실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조도 농업사회에서 상중공업사회로 이행해가는 시대적 흐름을 읽고 다양한 개혁정치를 한다.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시장을 활성화하고 서얼차별을 없애고 궁궐의 관노비를 해방하고 노비 추쇄법을 시행하는 따위의 다양한 정책을 내놓는다.

당시 조선 정계의 중심에 있었던 노론세력의 자제들을 중심으로 한 북학파는 청나라의 발전된 문화를 적극 수용하고자 했다.
17세기 말부터 시작된 호락논쟁(湖洛論爭)을 통해 물질문명을 긍정하는 사상적 기반이 만들어졌고 이는 북학파의 활동에 확고한 명분을 제공했다.
사신단을 통해 청나라의 귀족이나 지식인들과 활발한 교류가 일어났다.

이런 흐름 속에 청나라의 대중적인 문화가 대거 유입된다.
수복(壽福)은 이 시기에 수용된 문화이다.
당시 청나라에는 도교가 발전했는데 수복이라는 글자에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투영한 것이다.
청나라에서 수복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였다. 그래서 생활용품이나 장신구, 미술작품에는 온통 수복의 내용으로 채웠다.
심지어는 수복 글자에 화려한 장식을 한 연화(年畵), 세화(歲畵)같은 대중그림이 인기를 누렸다.
이 시기에 출세, 장수, 풍요, 벽사, 행운 따위의 도교적 내용이나 형식이 수용된다.
수복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두루 아우르는 대표적인 문자인 것이다.
이때 수용된 청나라 그림에는 요지연도, 곽분양행락도, 태평도, 다보각경도, 해학반도도 따위가 있다.

청나라의 고급문화의 수용과 확산은 조선사회를 흔들어 놓았다.
선비들은 청나라에서 수입한 사치스런 물건이나 그림으로 집안을 장식했다. 청나라 명품이 인기를 얻으면서 무역을 하던 장사꾼들도 호황을 누린다.
동시에 청나라의 허접한 도교문화나 싸구려 문화들도 대거 수입된다.
허영과 사치는 더 이상 허물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청빈과 유유자적을 이상적 가치로 여기던 전통 유학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관망하던 지방 선비의 비판과 궁사(窮士)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북학파에 우호적이던 정조도 문체반정(文體反正)을 통해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의 인문학적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물밀 듯이 들어오는 청나라의 문화에 대해 박지원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주장한다.
법고창신은 올바른 전통사상을 기반으로 청나라 문물을 조선의 방식으로 수용하고 재창조하자는 논리이다.
중국의 북종화, 남종화를 수용하여 조선산수화, 즉 진경산수화를 창안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중국의 신화 서왕모와 신선들의 이야기가 담긴 [요지연도]를 수용하여 조선의 선비와 결합한 인문학적 [신선도]가 그려진다.
청나라의 [다보각경도]는 학문을 통한 이상세계의 구현이라는 내용을 담은 [책가도]로 재창조되었고, [해학반도도]와 [요지연도]를 조선의 이상향을 표현한 몽유도원도에 녹여내어 [십장생도]가 창안되었다.

수복이라는 글자는 도교적인 내용을 지워내고 인문학적 가치를 채워 넣었다.
사람의 생명을 뜻하는 수(壽)를 사회적 생명으로 해석하여 성리학의 내용과 맞춘다.
또한 복(福)은 단독으로 사용하지 않고 수(壽)와 결합시켜 이해하고자 했다.
결국 수복(壽福)은 사회적 생명인 사람이 이치에 맞는 활동과 실천을 통해 만들어 내는 정신적, 물질적 가치의 총합으로 정의되었다.
완성되었다는 의미인 백(百)자를 붙여 [백수백복도]라는 이름으로 궁궐을 장식하게 된 것이다.

외부의 문화를 수용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또한 이러한 외래문화를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재창조하는 일도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법고창신은 결코 쉽지 않다.
북학파의 일부가 조선말기 개혁파가 되고 동시에 친일파, 친미파로 변신하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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