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 팀 삼미의 옛 팬이 오늘 해태 타이거즈를 그리워한다. 강자였지만 약자의 방식으로 싸웠고 승자였지만 패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팀. 그래서 약자와 패자들도 얼음 계곡물에 몸 한 번 담그고 정신 바짝 차리면 강자의 발목이라도 한 번 물어뜯을 수 있다고 악을 쓰며 항변하는 듯했던 그 몸짓들을 그리워한다.”

‘위대하신’ 전두환 각하의 넓으신 아량과 백성을 어여삐 여기신 마음으로 탄생한 한국 프로야구. 한때 나만은 절대로 3S(Sports, Sex. Screen) 정책으로 탄생한 야구에 현혹되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프로야구를 우습게, 아니 야구장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열광하는 이들을 하찮게 보곤 했다.

하지만 나 역시 어린 시절 위대한 각하의 의도대로 야구에 푹 빠졌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만수와 류중일에 환호했고, 선동렬의 믿을 수 없는 방어율에 전율을 느끼며, ‘과연 그를 꺾을 수 있는 타자는 누구일까’ 고심했다. 삼미와 청보, MBC청룡과 OB베어스의 기억은 아직도 나에겐 그립고도 서러운 유년시절과 함께 하고 있다.

▲ 김은식,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이상, 2009. 4. [자료사진 - 통일뉴스]

책은 저자의 성장기이자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 그리고 그 시절 힘든 이들을 울고 웃게 해줬던 그라운드의 모든 영웅들에 대한 헌사다. 그리고 역대 9회 우승이라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신화를 만들었지만, IMF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진 전설의 구단 ‘해태 타이거즈’에 대한 그리움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책은 뿌리 깊은 지역감정의 역사를 함께 이야기한다. 해태와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전라도. 그리고 전라도를 향한 근거 없는 악의에 찬 비난과 차별의 기억들. “어떤 조건도 필요 없다. 전라도 여자만 아니면 된다.”, “전라도 것들은 은혜를 모른다.” 저자가 어린 시절 기억하는 전라도에 대한 비난들은 그대로 내 기억과도 겹친다.

온 나라가 서슬 퍼런 총칼에 숨죽이고 있을 때, 결코 대한민국이 썩지 않았음을, 불의에 겁먹지 않았음을 피로써 증명한 광주 시민들, 그리고 모진 핍박과 멸시 속에서 오직 야구장에서만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한을 달랠 수 있었던 호남 사람들. 옛 추억을 떠올리며 즐겁게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계속 불편했던 이유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도시는 서울이었고, 서울이며, 서울일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자원들이 가장 많이 섭취되고 소화되며 배설되는 곳 역시 서울이다. 그러나 1980년 5월 이후 대한민국의 심장은 광주였다. 서울의 10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도시 광주의 5월은, 대한민국이 그저 고깃덩어리가 아니라 피가 돌고 맥박이 뛰는 생명체일 수 있게 해준 힘찬 박동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 어디에서든 ‘전라도’ 운운하면 따가운 비난을 받거나 매우 용감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시절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또 비겁한 키보드 워리어들의 자판질에는 ‘전라디언’에 대한 편견이 남아있다. 이를 극복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민주와 상식 등을 운운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영웅들의 서사시 한국 프로야구, 여전히 신화는 이어지고 있다. 그 어떤 비상시국에도 사람들은 야구장을 찾아 서로 침 튀기며 응원했고, 삶이 팍팍하고 고단할 때도 우리는 시원한 맥주 한 잔과 치어리더들의 흥겨운 응원이 있는 야구장으로 향했다.

이제 더 이상 프로야구를 ‘각하’의 ‘업적’이라고 비난할 필요는 없을 성싶다. 서민들의 고단함을 풀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야구는 고마운 친구다. 그 친구가 어디에서 왔던, 아버지가 누구이든, 친구는 친구이기 때문이다.

가슴에 묵직하게 남는 글이 있어 옮겨본다. 그립다. 그 시절 그 사람들, 그 열정들이….

“그래서 전라도라는 이유로, 빨갱이라는 누명으로,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눌리고 짓밟히면서도 고개 빳빳이 쳐들고 일어섰던 해태 타이거즈의 기억을 빌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밀쳐지고 떠밀려지는 세상에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그래, 물론 지금 우리는 해태 타이거즈가 싸웠던 것보다도 훨씬 능글맞고 쌀쌀맞은 21세기, 그 중에서도 해태 타이거즈마저 휩쓸고 가버린 IMF의 유산 신자유주의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그래도 노리고 휘두르면 선동열을 상대해서라도 1할 7푼을 칠 수 있지만, 포기하면 18연패 끝에라도 구원받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최강이었지만 가장 약한 자들의 영웅이었으며 돈 앞에 무릎꿇고 사는 이들의 가슴에 남겨진 야구팀, 사라지고 없는 해태 타이거즈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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