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하다는 4월도 어느덧 하순의 문턱이다. T.S. 엘리엇이 ‘죽은 땅’에서 키워냈다는 라일락은커녕 그나마 근근이 연명케 했다던 ‘마른 구근(球根)’도 찾기 힘든 세상이다.

탄핵의 철퇴로 부셔진 권력의 뒤켠에선 암중모색, 이전투구가 끊이지 않는다. 전 대통령과 최씨녀(崔氏女)로 비롯된 굿판으로 태극기, 촛불, 국회, 특검, 교도소, 변호사, 검찰, 언론 등등, 나라 전체가 난장판에 휩싸였다.

공공이라는 말이 사사로움에 의해 유린되는 허망함을 다시 보았다. 사회적 정의가 돈‧권력 앞에서는 선언적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재삼 확인했다. 추상같아야 할 법질서도 언 발에 눈 오줌처럼 미적지근한 물주머니로 전락하고, ‘공공의 심부름꾼(civil servant)’이어야 할 공복(公僕)들은 ‘권력자의 충실한 종(royal servant)’이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 뿐인가. 북한의 핵실험, 미사일 발사 소문으로 온 지구가 뒤숭숭하다. 첨단무기들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운집하고 있다. 당장이라도 전쟁이 날듯이 난리들이다. 그저 잔인하기만 한 4월이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4월은 활기차다. 탄핵으로 인한 조기 대통령 선거의 열기 때문이다. 후보자들과 그 추종자들의 발걸음이 전국에 분주하다. 여느 선거 때나 마찬가지로 서로의 이해득실로 인한 이합집산도 예외가 없다. 연일 이어지는 지지율 여론조사로 희비가 엇갈림이 다반사다. 선거 혹은 후보자와 관련된 방송사의 토론이나 뉴스는 인기 사극 못지않게 관심을 끈다.

유권자들의 은근한 기대도 그만큼 크다. 쏟아지는 수많은 공약에 괜스레 흥분도 된다. 혹시 나에게 떡고물은 없을까. 어쩌면 나의 주변에 특별한 혜택이 돌아오지 않을지…. 온통 들떠 있는 4월이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대선 때면 늘 그랬듯이 이념 놀음이 되살아났다. 현금 벌어지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나 논쟁은 우리 집단의 이익과는 상관없다. 오직 그들만의 정치 혹은 이념적 이해관계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보수에서는 반(反)민족적 족쇄를 떼어낼 수 없다. 그러한 진보에서는 몰(沒)민족적 관념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친일과 매국이라는 개념이 착종된 보수의 얼개 속에 진정한 보수가 있을 수 없듯이, 혁명과 계급이라는 구호에 가려진 진보의 그늘 안에도 진정한 진보가 있을 수 없다. 집단의 공(共)집합적 가치를 외면한 이념적 편향성은 진영논리를 넘어 거의 편집증적 광기를 보이기까지 한다.

문득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구호가 떠오른다. 어느 진보학자의 책제목이기도 하다. 허나 몸통이 없는 날개라면 좌익이나 우익이나 무슨 소용 있으랴. 단지 박제된 양날개에 불과하다. 몸통이 사라진 좌우의 논쟁이 허망한 것처럼, 민족이 없는 진보와 보수의 논쟁이 얼마나 소모적인가. 몸통 없는 날개짓은 그저 헛심만 부리다 끝날 것이다. 균형을 이룰 수 없고 방향을 잡을 수 없다. 집단 전체가 허우적거리는 도로(徒勞)로 치달을 뿐이다. 반민족적 보수의 멍에를 벗는 노력이 필요한 동시에 몰민족적 진보의 가식을 씻어낼 용기가 요구되는 이유다.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은 보수나 진보를 대변하는 지도자가 아니다.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넘어 종교‧이념‧지역을 아우르는 용광로 같은 대통령을 원한다. 몸통을 아는 대통령, 즉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을 아는 대통령, 주인된 대통령을 갈망하는 것이다. 애국과 매국이 착종되고 이념의 회색지대로 변해버린 우리사회의 현실에서는 절박한 소망이다. 긴 시간 몸통을 잃고 살아온 우리로서는 더욱 그렇다.

몸통은 기회주의적 중도(中道)와는 다르다. 그러한 중도는 대중영합주의나 한탕주의로 흐르기 쉽다. 단순히 일자리나 복지혜택을 늘려주겠다느니, 〇〇도시를 어디로 이전하고 어떠한 사업을 대규모로 시행하겠다는 등의 공약들은 대통령후보자의 본질적 공약과는 거리가 있다. 대통령은 단순한 CEO가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누구라는 것을 공언하고 알려줄 수 있는 주인된 대통령이 요구된다.

대통령의 주인된 모습은 우리 사회의 무너진 염치를 다시 세우는 첩경이다. 주인은 양심이 있어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이다. 근자에 부끄러움에 둔감한 지도자의 모습에서 수많은 국민들이 절망했다. 모든 구성원들마저 염치없는 국민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노예의 천박상을 읽었기 때문이다. 노예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부끄러움은 진정한 주인만이 느낄 수 있는 가치다. 그러므로 ‘나라를 잃은 부끄러움[國恥]’은 매국노의 흉금에는 없다. 오직 매국의 대가로 받은 물질적 보상으로 인한 희희락락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이미 영혼의 족보에서 지워진 존재다. 개나 돼지와 다를 바 없다. 문득 백암 박은식의 말을 떠올려 본다. “육체의 생활은 잠시이고 영혼의 존재는 영구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능히 나라에 충성하고 동족을 사랑하면 그 육체의 고초는 잠시요 그 영혼의 쾌락은 무궁할 것이고, 만약 나라를 팔고 동족에게 화를 끼치면 그 육체의 쾌락은 잠시요 영혼의 고초는 무궁할지니, 어찌 천도(天道) 보시(報施)로써 차이가 있다 하겠는가?”(『몽배금태조』)

일찍이 맹자는 '수오지심의지단야(羞惡之心義之端也)'라 했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야말로 의(義)의 근본이라는 이야기다. 또한 그 옳음[義]란 악을 제거하고 선을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부끄러움은 곧 선을 구현키 위한 양심과 통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역시 이와 다를 바 아니다. “부끄러움 없이 내가 주님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시편』119:6)라는 구절에서도, 부끄러움이 기독교적 광명정대와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동서양 모두 부끄러움이 참의 근본이 됨을 말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진정한 보수나 진보를 위해 무엇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국망의 패배의식에서 움튼 우익이라는 기형적 정서를 부수기 위해 무엇을 고민한 적이 있는가. 이념의 저울질 속에 싹튼 좌익이라는 추상적 구호를 누르기 위해 무엇을 헤아린 적이 있는가. 그 무엇은 바로 부끄러움이다. 그 부끄러움은 주인된 양심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진정한 주인은 위로는 떳떳하고 아래로는 너그럽다. 노예로 살아온 부류들이 위로는 아부하고 아래로는 잔인하다. 주인의식을 가진 공무원이야말로 진정한 국민에 대한 봉사자다. 대통령 역시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최고공무원에 지나지 않는다. 국민 위로 군림하려는 대통령은 성공할 수 없다. 스스로를 노예적 군주로 전락시킬 뿐이다.

진정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대통령, 우리가 누구인가를 떳떳하게 말해 줄 수 있는 대통령, 다시금 주인된 대통령을 갈망해 본다.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종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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