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기 전, 먼저 책을 읽은 분들의 서평을 읽었습니다. 일단 ‘텐구’라는 족속에 대해 설명해주신 친절한 분이 있어 반가웠고, 또한 유쾌한 소설이라는 평들이 대부분이어서 기분 좋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일본 판타지 소설은 사실 그리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애니메이션으로는 몇 편 즐겁게 본 기억이 있지만, 책으로는 아마 처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뭐 예전에 읽었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일본은 너구리를 매우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책 등에서 너구리가 등장하는 것을 자주 본 것 같습니다. 뭐 생김새도 그리 무섭지 않고 오동통한 것이 귀엽기는 합니다. 정말 둔갑술에 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 모리미 토미히코 저 / 권일영 역, 『유정천 가족』, 작가정신, 2009. 11. [자료사진 - 통일뉴스]

책은 위대한 너구리 시모가모 소이치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남겨진 4형제는 아버지의 명성을 이어받기에는 조금 많이 부족한 너구리들입니다. 특히 주인공 3남 시모가모 야사부로는 ‘일단 인생은 즐거워야 한다’는 철학으로 잘 노는 것 외에는 그다지 특기가 없는 너구리입니다. 뭐 귀엽기는 하지만 말이죠.

이들은 귀공자 청년으로 둔갑하고 당구를 즐기는 멋쟁이 어머니와 함께 힘을 모아 가문의 숙적인 에비스가와 집안과 명예를 건 한판 대결을 펼칩니다. 약간은 무천도사 필이 나는 텐구 사부 아카다마 선생과 원래 인간이었으나 아카다마 선생의 납치로 반텐구가 된 절세미녀 벤텐. 이들과의 흥미진진한 모험 속에 너구리들의 유쾌한 전쟁이 시작됩니다.

위대한 시모가모의 형제들은 그러나 모두들 어설프기 그지없습니다. 장남 야이치로는 강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결정적 순간에 약합니다. 둘째 야지로는 아버지의 죽음 뒤에 너구리를 포기하고, 개구리가 되어 우물에 칩거합니다. 인생무상을 느낀 너구리죠.

셋째 주인공은 설명드렸고, 막내 야시로는 아직 철부지에다 특히 겁이 많아 조금만 놀라도 꼬리를 드러내고 맙니다. 아카다마 선생은 야시로에게 덕담으로 “야시로, 넌 일단 어서 자라거라”말하죠. 그리고 야사부로와 약혼을 할 예정이었으나 취소된 에비스가와 집안의 독녀 가이세이. 그녀는 위급한 상황 마다 시모가모 집안을 돕습니다.

아, 에비스가와 집안의 덜 떨어진 형제 금각, 은각이 있습니다. 언제나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사자성어를 가슴에 달고 다니죠. 항상 큰 형인 야이치로에게 엉덩이를 물려 도망가곤 합니다. 나중엔 쇠로 된 팬티를 입어 천재성을 발휘하지만 화장실엘 못가 변비 증세를 보이기도 합니다. 심각한 멍청이들입니다.

일본 교토 지방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무한 관계로 지명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할 때면 조금 집중력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유쾌한 소설임엔 틀림없습니다. 유머와 위트 속에 가끔 정색하며 심각한 얘기를 늘어놓기도 하는데, 이는 읽은 이들의 각각의 경험에 따라 다양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이 세상과 작별하면서 우리 아버지는 위대한 그 피를 정확하게 넷으로 나누어 주었다. 큰형은 책임감만 이어받았고, 작은형은 느긋한 성격만 물려받았으며, 동생은 순진함만 물려받았다. 그리고 나는 바보스러움만. 완전히 제각각인 형제를 이어주는 것은 바다보다 깊은 어머니의 사랑과 위대한 아버지와의 작별이다. 위대한 이별 하나가 남은 이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일도 있다.

제가 이 문장에서 무엇을 떠올렸을까요. 위대한 바보와의 이별로 남은 이들이 하나가 되는 경험. 전 감히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너구리 세계에는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 너구리도 있고 너는 또 고지식한 편이니 다툴 일도 많을 거다. 하지만 한 마리의 적을 만들 때는 친구 한 마리를 만들어야 해. 다섯 마리의 적을 만들 때는 친구를 다섯 마리 만들어야 하지. 그렇게 적을 만들어 언젠가 너구리 세계의 반을 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네 곁을 보렴. 네겐 동생이 셋 있다. 이건 아주 마음 든든한 거야. 그게 네 비장의 카드가 되는 날이 반드시 올 거다. 내가 늘 아쉽게 생각하는 건 그 비장의 카드를 나는 갖지 못했다는 거야. 난 동생을 믿지 않고 동생도 나를 믿지 않았지. 우리 형제가 서로 다투는 사이가 된 것은 그 때문이야. 피를 나눈 형제가 적이 되었을 때, 그때는 최대의 적이 된다. 그러니 너희들은 늘 서로 믿어야만 해. 형제간의 우애! 잊어서는 안 된다. 형제간의 우애! 어쨌든 너희들에겐 모두 같은 ‘바보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바보라서 숭고해진다. 우리는 그것을 긍지로 삼는다. 춤추는 바보로 보이는 바보. 같은 바보라도 춤추는 바보가 낫다고 한다. 그렇다면 멋지게 춤추면 된다. …아무리 눈물이 고여도, 그래도 또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세가 우리 형제의 진면목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바보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고 있는 너구리. 세상을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제대로 살아가는 것임을 아는 바보들. 그런 바보들이 많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처럼, 온갖 더러움과 상처가 흐르는,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그야말로 바보 같은 생각을 해봅니다.

남을 즐겁게 해주고, 또 자신 또한 즐거울 수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말 하기 어려운 ‘바보짓’이 아닐까요. 그런 바보들이 참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때문에 너구리들의 유쾌 발랄한 모험기는 저에게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을 전해줍니다.

일본 판타지에 대해 일정한 선입견이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유쾌한 너구리들의 반란에 조금은 그 생각들이 줄어들 수도 있을 듯합니다. 세상을 즐겁게 만드는 바보 너구리들의 이야기.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교토를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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