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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누구의 편인가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갑작스러운 강제 철거를 통보받은 난쟁이 가족은 떠날 준비를 하는데, 작은아들 영호가 이에 반발한다. “어떤 놈이든 집을 헐러 오는 놈은 그냥 놔두지 않을 테야.” 그러자 아버지가 말한다. “그만둬.” “그들 옆엔 법이 있다.”

법은 누구의 편인가? 김정한의 소설 <모래톱 이야기>에서 부실한 댐을 무너뜨려 마을 주민들의 목숨을 구한 갈밭새 영감은 이를 막으려던 댐 주인의 하수인에 맞서다 그를 죽게 한다. “정말 우리 조마이 섬을 지키다시피 해 온 영감인데…… 살인죄라니 우짜문 좋겠능기요?” 눈물을 흘리며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마을 사람의 모습과 함께 소설은 이렇게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법과 유력자의 배짱과 선량한 다수의 목숨……. 나는 이방인(異邦人)처럼 윤춘삼 씨의 컁컁한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법은 누구의 편인가? 강제 철거로 보금자리를 잃게 된 철거민 가족을 위한 법은 없다. 선량한 다수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린 자의 죄를 묻기는커녕 오히려 목숨 걸고 다수의 생명을 구한 이를 감옥에 처넣는다. 법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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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촌오거리 택시기사 피살 사건의 전말

영화의 소재가 된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피살 사건은 이렇다. 2000년 8월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에서 택시기사가 흉기에 찔려 살해된다. 당시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15세 소년.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 시비가 붙어 택시기사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범행을 시인한 끝에 2심에서 징역 10년이 확정되었고, 2010년에 출소하였다. 당시 해당 경찰은 표창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복역하던 중 2003년 진범이 나타난다. 그러나 검찰은 ‘직접 증거가 없다’며 사건을 덮으려 했고, 칼을 버렸다는 쓰레기 매립장 압수수색 영장 청구 제안에도 “3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DNA 감정이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거절했다. 그 사이 용의자는 진술을 번복했고, 결국 기소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진범을 도와줬다고 한 진범의 친구는 2012년 자살했으며, 진범은 개명해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2010년, 2013년, 2015년에 걸쳐 SBS의 ‘뉴스 추적’, ‘그것이 알고 싶다’ 등에서 사건이 재조명된다. 2013년 재심이 청구되어 2015년 12월 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인다.

재심 때 증인으로 출석한 경찰관 중 불법 행위 일부를 인정한 경찰관 1명은 자살했다. 나머지 경찰관 2명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가혹 행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아 이는 입증할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사건은 2016년 11월 무죄가 선고됐고, 약촌오거리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는 긴급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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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소년의 인생은 누가 보상하는가

뒤늦게라도 진실이 밝혀졌으니 그래도 다행이 아니냐고? 억울한 옥살이에 대해서는 국가에 보상금을 청구할 수 있지 않느냐고?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므로 사람들은 특히 보상금에 대해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그러했듯이.

그러나 15세 소년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 10대와 20대가 그의 인생에서 지워졌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평생 그를 따라다녔을 ‘살인범’이라는 오명은 벗었다 해도, 그로 인해 그가 겪은 정신적 고통과 파탄난 인생의 조각들은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한 번 잘못 채워진 인생의 단추들은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영화는 이 영화가 실화에 바탕 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시작한다. 그럼으로써 이것이 우리가 처한 실제 법의 현실임을 관객에게 분명히 환기시킨다. 봐라,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거짓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가. 그것도 법의 이름으로, 그 정당성을 팔아서, 심지어 법의 수호자들의 손에 의해서!

영화 <마스터>에서 사기꾼 진 회장은 영리하게 법망을 피해나가며 범죄를 저지른다. 이런 자들 앞에 법은 무력하다. <조작된 도시>에서는 부와 권력을 지닌 자들이 자신들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치밀하게 범인을 조작한다. 법은 무능한 협조자가 된다. <더 킹>에서는 정치 검사들이 법을 자신들의 출세와 영달의 도구로 삼는다. 법의 수호자들이 법을 농단하는 것이다. <변호인>에서는 국가 권력이 법 위에 군림하며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고문과 조작 같은 불법을 자행하고, 법은 그 뒤처리를 한다. 법은 권력의 시녀가 되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법의 현실들이다.

앞서 언급한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법은 부와 권력을 지닌 자들의 편이다. 약자들에 대한 지배와 착취는 늘 적법한 절차와 합법적 근거에 의해 이뤄지는데, 그것을 위해서 그들은 법을 만들고 고치고 집행한다. 입법부도 사법부도 그들과 한통속이다. <모래톱 이야기> 역시 법은 선량한 다수의 약자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힘 있는 자의 편이다. 법은 그들의 탐욕을 위해 일하는 집사와 같다.

그게 법인가? 그게 법의 역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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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제 노릇 못하는 사회의 최대 피해자는 힘없는 이들

더구나 이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을 조작하는 것은 시골 촌구석의 형사들이다. 하다못해 말단 형사들조차, 부와 권력의 소유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지위를 지닌 말단 형사들조차 법을 우습게 알고 공권력을 제 마음대로 행사한다. 범인을 조작한 대가로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얻는 것도 아니고, 탄탄대로의 출셋길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실적 몇 개 더 쌓고 그 덕에 표창을 받거나 조금 진급이 빨라질 뿐인데, 고작 그런 이유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토록 무참히 망가뜨릴 수 있는가?

그들의 희생양이 되는 이는 무슨 정치 투사도 저항 운동가도 아니다. 힘없고 돈 없고 백 없는 어린 소년이다. 비겁하게도, 약자 중의 약자, 고문과 조작이라는 단어가 거창하게 들릴 만큼 아무런 저항 능력이 없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한 어린 소년. 사건을 조작하느라 힘썼을 경찰관들의 수고가 과분할 지경이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경찰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럼 검찰은 왜 그랬을까? 소년이 억울한 옥살이를 한 지 3년이 된 시점에 사건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다. 진범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수사가 재개되었을 때 검찰은 왜 사건을 덮으려 했을까? 속된 말로 쪽팔려서, 부실 수사의 잘못을 인정하기 창피해서, 고작 그런 이유로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를 외면할 수 있는가?

당시 소년의 옥중 인터뷰를 실었던 신문사는 폭행과 강압 수사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경찰로부터 1억 7,000만 원이라는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그들은 소년의 말이 모두 허위이며, 군산에서 잡힌 용의자가 아니라 소년이 진범이라고 주장했다. 2년에 걸친 송사에 지역 신문사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경찰이 소를 취하하면서 이 지루한 공방은 끝이 났다. 그때는 이미 진범을 잡았다고 떠들썩했던 군산 경찰서의 수사도 중단된 뒤였다. 경찰과 검찰은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이렇게 걷어차 버렸다. 왜 그랬을까? 한 사람의 인생보다 중요한 게 무엇이었을까?

영화는 무수한 물음표를 던진다. 참 쉽게, 참 사소한 이유로 한 사람의 인생이 망가졌다. 너무나 사소해서 그대로 묻혀 버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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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불법과 합법을 넘나들며 국정을 농단한 거대한 정치적 사건에 직면해 있다. 영화나 소설보다 황당하고 드라마틱한 현실의 난맥상 앞에 국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왔으나, 이 현실을 해결할 수단조차 그들이 농단한 법에 의존하고 있다. 이미 법꾸라지들에 의해 유명무실화된 법,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법을 붙들고 법의 공정한 적용을 외치며, 답답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법적 절차에 따라 법을 우습게 아는 이들의 변명을 몇 개월째 들어 주고 있다.

이 짓을 계속해야 하는가? 태극기를 방패 삼아 선량한 시민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고 계엄령과 내란을 선동하며 민주적 헌정 질서에 도전하는 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백주 대낮의 무법천지에 온갖 가짜 뉴스와 비방이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 평화 집회를 물대포로 공격하며 ‘폭력 시위’를 엄단하겠다고 부르짖던 경찰은 어디에 있는가? 세월호 7시간에 대한 의문을 대통령 명예 훼손이라고 서둘러 기소했던 검찰은 왜 수수방관하는가? 이런데도 우리는 ‘법대로’를 외쳐야 하는가?

나는 법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거둘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법의 탄생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해관계의 충돌과 갈등을 조정하고 약자의 권리를 옹호해야 하는 것이 법의 역할이라는 믿음을 팽개치고 싶지 않다.

법이 정의를 구현하는 수단이 되지 못할 때, 진짜 문제는 거대악과의 싸움이 아니라, 시골 촌구석 한 소년의 삶이 이토록 가볍게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이다. 주목받지도 못한 채 이렇게 억울하게 묻혀 버린 사건들이 얼마나 많을까.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헌정 질서를 수호하고 불법과 탈법을 근절하며 법의 원칙과 공정함을 세워야 하는 문제는, 하늘 가운데 해가 자리를 잡으면 집집마다 불을 때지 않아도 그 온기가 온 누리에 퍼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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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은 정의를 되살리는 작은 불꽃

실제 사건의 당사자 최 군은, 처음에는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며 복수를 다짐했다. 그러나 10년의 옥살이 끝에 출소한 뒤에는 원망은 사라졌다며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진실을 밝히는 길은 요원하고 그 억울함을 가슴에 묻지 않으면 나머지 인생도 살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 그는 마음을 바꿨을 것이다.

그런데 2012년 근로복지공단이 죽은 택시기사에게 지급한 4,000만 원에 이자 1억 3,000만 원을 더한 1억 7,000만 원의 구상금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언론도 피하면서 모든 걸 잊고 살려고 했던 최 군이 재심 청구를 하고 사건을 영화화하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재심 결과를 기대했다기보다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나라는 법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데 인색하다. 동일 사건에 대한 재심은 한번만 요청할 수 있는데, 재심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그래서 판결을 뒤집을 만한 결정적 증거가 없으면 재심 신청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2003년 진범이 나타났을 때 이미 민변은 재심 청구를 고려했으나, 그런 이유로 결국 재심을 신청하지 못했다.

당시 영장 청구에 난색을 표한 검찰은 “이 사건의 해결 열쇠는 새로운 용의자 김 씨에 대한 수사에 달려 있으며, 복역 중인 최 군 건은 이미 확정판결이 난 것이므로 이를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 증거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만약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용의자 김 씨처럼 이미 끝난 사건을 자신이 했다고 자백하면 확정판결이 난 모든 사건을 다시 수사해야 하는데, 이는 사법 파괴”라고도 했다.

그들에게는 ‘사법 파괴’가 ‘사법 정의’보다 중요하고, 확정판결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되돌리는 일보다 중요한 문제였던 모양이다. 주객이 전도된 현실이다.

다행히도 최 군은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최 군이 운이 좋았다고 해야겠지만, 어쨌든 이 사건에서 끝까지 손을 놓지 않은 이들이 있었고, 그런 노력 덕분에 최 군은 누명을 벗었다. 덕분에, 이것이 흔한 사례는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법에 대한 희망 하나는 가지게 되었다. 결코 작은 결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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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법의 본질에 한걸음 더 다가서려고 한다. 이미 영화 <변호인>을 통해 우리는 법 위의 법 헌법의 정신을 되찾은 경험이 있다. 바로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에 더해 영화 <재심>은 또 하나의 법 정신을 우리에게 돌려주고 있다. 변호사법 제1조 1항,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 이제 적어도 이 두 개의 법 조항은 우리가 법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이다.

오랫동안 법은 강자들의 편에 있었다. 그러나 원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법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묻기 전에 법이 원래 무엇을 했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게 맞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우리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범죄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나라를 뒤흔든 큰 범죄자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고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하는 엄중한 책무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 길이 비록 어렵고 힘들지라도 반드시 가야만 하는 이유는, 법은 정의의 도구이며 억울한 자의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만든 김태윤 감독은 삼성 반도체 백혈병 노동자들의 실화를 다룬 <또 하나의 약속>을 만들기도 했다. 2013년 최 군의 사건을 취재한 SBS 기자의 제안으로 영화를 시작했는데, 촬영이 끝나갈 무렵 재심이 확정되어 영화의 의미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영화의 주연을 맡은 강하늘은 영화를 찍으며 “법이 왜 생겼을까를 고민”했다며 “사랑하는 누군가를 지키려고 생긴 게 법인 것 같다.”고 했다. 소년의 엄마 역할을 맡은 김해숙은 “힘들고 어려운 사회지만 아직은 어딘가에 정의가 남아 있다는 생각으로 했다"고 말했다. 영화에는 감독과 배우들의 이런 진심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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