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을 흔히 화왕(花王), 꽃 중에 꽃이라고 한다.
아주 크고 화려했기 때문이다. 선비들이 좋아했다는 매화, 도화보다 10배 이상 크고, 제법 큰 꽃인 국화보다도 서너 배가 크다. 또한 화려한 통꽃이자 겹꽃이면서 다양한 빛깔을 가지고 있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로 번식을 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이다.
생식기는 화려한 색깔과 향기와 꿀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씨앗을 퍼트릴 새와 나비, 각종 곤충을 유혹하기 위함이다.
이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꽃은 절정기, 전성기, 최고점이라는 보편성을 바탕으로 사랑, 찬양, 헌신 따위의 상징을 가진다.

모란은 중국이나 우리민족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꽃이다.
꽃의 일반적 상징과 화왕이라는 모란의 생태적 특징이 결합되어 사회적으로 군자(君子), 왕, 군주, 절세미인 따위에 비견되었다.
군자는 선비의 인격적 완성체이고, 왕은 사회 권력의 정점이며 절세미인은 그야말로 최고의 미인을 말한다.
우리그림에서 모란은 단순히 꽃의 아름다움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징과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궁궐을 장식했던 모란그림을 [궁중모란도]라고 한다.
조선 후기 백성들이 수용했던 민화풍의 모란그림과 구분하기 위해 임의로 만들어진 이름이다.
[궁중모란도]는 국가미술기관인 도화서 화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창작되어 궁궐의 곳곳을 장식했다. 또한 모란병풍그림은 서예병풍과 함께 가장 많이 그려져 왕실의 가례에 사용되었다.

흔히 [궁중모란도]의 상징을 부귀영화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백성들이 수용했던 민화풍의 모란그림이 워낙 많이 그려지고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궁중모란도]도 그러할 것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궁궐에서는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았다. 왕이나 왕족은 끊임없이 청빈을 요구받았고 왕이 먹는 밥상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왕실의 번영이 곧 부귀영화를 상징한다는 말을 하지만 이건 전혀 다른 문제이다.
왕실의 번영은 국가의 번영이고 곧 태평성대를 뜻한다. 반면 부귀영화는 개인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는 백성들이 모란그림을 부귀영화로 수용하면서 국가의 번영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옛 기록에도 있듯이, 모란그림은 신라 진평왕 때 중국으로부터 전해졌다. 처음부터 왕실의 그림이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듯이 궁궐의 고급문화였던 [궁중모란도]가 흘러내려 백성들의 모란그림으로 대중화된다. 이런 과정에서 모란그림에 붙은 인문학적 내용은 백성들의 현실적 요구에 따라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발전한 것이다.

▲ 궁중모란도/심규섭/디지털회화/2014.
궁중모란도는 한 폭으로 완성된 그림이다. 8~10폭 병풍그림으로 만들어도 결국 한 폭의 완성된 그림을 약간씩 변화를 준 것에 불과하다. [자료사진 - 심규섭]

 

삼국시대,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10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모란그림이 살아남은 것은 탄탄한 인문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궐은 정치, 경제, 문화, 군사와 같은 조선의 핵심가치가 모여 있는 곳이다. 또한 국가의 정체성을 함축해서 드러내는 이상적인 표상들로 궁궐을 장식하기 마련이다.
궁궐에서 추구하는 인문학적 가치는 당대의 지배철학에 의해 결정된다. 불교국가였던 신라나 고려에서 규정한 모란과 주자성리학이 중심이었던 조선이 규정한 모란의 상징은 달랐을 것이다. 만약 모란그림에 불교적인 색채가 강했다면 불화가 그랬듯이 모란그림도 궁궐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다.

신라에서 조선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모란그림에는 불교나 유학의 차이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가치가 투영되어 있다.
모란꽃에는 군자, 왕, 절세미인 따위의 상징이 붙어있지만 왕실에서 수용할만한 내용은 아니다. 군자는 선비의 인격적 결정체이고 절세미인은 세상 사람들이 웃으면서 하는 말일 뿐이다. 또한 모란꽃이 아무리 크고 화려하다지만 왕의 상징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또한 군자나 왕, 절세미인 따위를 상징을 드러내려면 실제 모란과 가장 닮는 것이 좋다.
하지만 [궁중모란도]는 현실적인 모란과는 많이 다르다.
이것은 오랫동안 그려지는 과정에서 추상화한 것이지만 동시에 모란의 생태적 특징을 뛰어넘어 모든 꽃의 총합이라는 보편성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꽃이 가진 보편성은 생명의 절정기, 전성기이다. 이런 가치는 불교나 유학에서도 공통적으로 추구한다.
꽃이 살아있는 생명이듯이 국가도 왕과 왕실, 정치인, 백성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꿈틀거리는 사회적 생명체이다. 모든 생명체의 본성은 풍요롭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고 세대를 이어가면서 전성기를 누리고자 한다.
이렇듯 [궁중모란도]는 꽃의 절정기와 왕실과 국가의 전성기를 연결하여 태평성대의 상징이 된 것이다.

이상세계나 태평성대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물질적 풍요, 전쟁과 살육을 배제한 평화, 평등, 협력과 상생과 같은 사회적 가치는 없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력이다.
이를테면, 생명의 확장을 위해 많은 자식을 낳은 다산(多産), 생명이 오랫동안 생존하는 장수(長壽)는 태평성대의 핵심가치인 것이다. 어찌 보면 평화나 공동체, 물질적 풍요는 결국 생명의 힘을 확장하는데 필요한 요소들이다.
사람들은 태평성대를 표현한 [십장생도]를 장수하는 그림이라고 수용한다. 다산, 건강, 장수와 같이 생명과 관련된 것은 원초적이고 직관적이기 때문이다.

[궁중모란도]가 전성기, 절정기를 뜻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자리 잡기에는 부족하다.
조선이 추구했던 태평성대는 이미 다양한 [십장생도]에 표현되어 있었다.
[십장생도]는 조선 초기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를 바탕으로 영, 정조시대 쯤에 조선의 방식으로 완성된다.
[십장생도]는 넓고 큰 화면 속에 산과 바다, 여러 종의 동물을 아우르는 다양한 사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궁중모란도]가 모든 꽃의 총합이라고는 하나 [십장생도]의 규모나 내용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또한 [궁중모란도]를 보고 태평성대라는 사회정치적 상징을 유추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궁중모란도]가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요소들과 결합해야 한다. 단일 품종 하나만으로 이상세계를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궁중모란도]는 오로지 모란만 그렸다. 흔한 나비나 곤충 따위도 없다. 수석이 들어간 그림도 있지만 최종에는 그것도 빠진다.
[궁중모란도]가 순수함을 지킨 것은 꽃이 가진 직관성과 보편성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결국 [궁중모란도]는 모든 꽃의 총합, 생명이 활짝 핀 상태와 같은 보편적인 상징으로 남았다.
이것을 간단하게 ‘생명의 만개(滿開)’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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