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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안중근이 외할아버지에게 찾아왔다” 100년 가족사 『흑색 태양』 출간한 김파 시인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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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2.15  21: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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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대하소설 『흑색 태양』을 출간한 중국 조선족 김파 시인과 7일 서울 마포의 한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조천현]

“1994년도 동학당 기의(起義) 연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사이 우리 가족들이 경유한 역사 사건을 소설화했다.”

중국 조선족 시인 중 첫 손에 꼽히는 김파(75) 시인은 최근 한국에서 출판한 대하소설 『흑색 태양』(전 3권, 도서출판 백암)에 대해 이같이 소개하고 “중국 조선족 소설의 특징과 기법, 수법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김파 시인은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중국과 한국에서 개인 시집을 여러 권 냈고, 특히 ‘조선족 백년문학사에 유일한 개인 명시집’인 『김파의 명시집』이 북경민족출판사에서 출판됐다. 또한 그의 대표작 ‘돌의 음악’ 시비가 2014년 도문시 두만강광장에 세워졌고, 지난해 11월에는 제3회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4개 이상의 주제 사상을 보여주는 다원적 ‘입체시’ 이론을 정립했고, 이번 대하소설 역시 ‘입체소설’로 썼으며, 장편서사시 『천추의 충혼 안중근』(2010년)과 장편대하사시 『천년 고국 고구려(상,중,하)』(2006년)는 뜻깊은 역작이다.

김 시인이 이번에 세상에 내놓은 대하소설 『흑색 태양』은 외할아버지부터 자신까지 3대에 걸친 그의 가정사를 담았지만, ‘특수한 가족 경력’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외할아버지인 한의사 유승렬 의원이 안중근 의사와 교분이 깊었고, 유승렬 의원의 아들이자 그의 외삼촌이 되는 유동하 선생이 안중근 의사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시절 어머니가 생존할 때 우리 가족 이야기를 쭉 하면서 “너 밤낮 글쓴다고 하는데, 이걸 꼭 글 써라” 하고 그냥 말씀했다”며 “어머니와 형제들의 촉탁에 의해 쓰려고 결심했고 우리 가정 경력이 대단히 특수해 특수성에 힘을 입었다”고 밝혔다.

중국 조선족 최삼룡 문학평론가는 ‘추천의 글’에서 “전반 인류 역사의 100여 년 사이의 창상지변을 보여준 기적적이고 경이적이며, 미증유적이며 돌파적인 종래 없던 대형 거대서사”라며 “<흑색 태양>은 해체된 사회주의와 그 창시자와 추종자를 상징”했다고 평가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이 연해주와 만주를 떠돌며 독립을 위해 몸바쳐 싸우고, 해방 후에는 중국에 남겨져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에서 ‘청산 대상’이 돼 수난을 겪는 과정, 그리고 개혁개방을 맞아 변화된 세태에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생생한 역사는 우리 민족 수난사의 한 켠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준다.

그는 ‘시인이 되거나 혹은 작가가 되려면 인격적으로 먼저 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명시 한 수와 한 생을 바꿔라’를 좌우명으로 삼고 “앞으로 남은 여생을, 생명을 연소시켜 계속 작품을 쓰겠다”고 여전히 시혼을 불태웠다.

또한 아직 출판하지 못한 시집만도 10권이 넘는다며 “전집 좋은 것만 골라서 딱 10권만 만들어도 좋겠는데, 지금 형편에서 경제가 따라 못 가니까”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남북이 쌍방에서 남북평화통일촉진회를 내와 가지고 그 기초 상에서 이제 남북이 서로 토론해 가지고 통일했으면 좋겠다”며 3.8선에 △경제발전 공동시범구역 △자유 거주지 △남북평화통일학원을 세우고 “북은 핵무기를 포기하고 남은 외군을 철수시키고 이래서 유엔에서 동의하는 지구상에서 그 어디에도 참가하지 않는 국가가 돼서 세계의 평화성지로서 만들자”고 제안했다.

안중근 의사와의 특별한 인연이나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개혁개방, 특히 한중 수교과정 등 그의 가족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는 특별한 이야기 바다는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다음은 지난 7일 서울 마포의 한 사무실에서 김파 시인과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가급적 그의 입말을 살려 정리했지만 두음법칙 등은 맞춤법에 따랐다.

“100년 우리 가족들이 경유한 역사 사건을 소설화”

   
▲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서 첫 손에 꼽히는 김파 시인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함께 한 유동하 선생의 외조카이다. [사진 - 조천현]

□ 통일뉴스 : 유명한 시인인데, 첫 대하소설인 『흑색태양』을 한국에서 출판했다. 주로 중국 연변지역에서 활동했는데 한국에서 출판한 이유는?

■ 김파 시인 : 『흑색태양』은 한국 백암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이 소설을 출판하려고 마음 먹었댔다. 그런데 중국에서 출판 못하겠다고 하더라. 왜냐하면 중국은 문학을 정치에 종속시킨다.

내용을 보면 1994년도 동학당 기의(起義) 연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약 100년 사이 우리 가족들이 경유한 역사 사건을 소설화했다. 여기에는 그 100년 사이의 우리 인류역사 전반 내용이 다 여기 담겨있다. 그래서 러시아의 2월 혁명과 10월 혁명, 레닌이 창시한 사회주의 실패, 그 다음에 중국의 사회주의 실패와 개혁개방 전반 내용이 다 있다. 중국에서 출판하기 곤란하다.

미루다가 3년 전인가 써서 완성했다. 그런데 여태까지 출판 못하고 있다가 할 수 없이 한국에 나와 이번에 출판하게 됐다.

□ 연변문학과 한국문학이 어투나 표현 방식 등이 다를 것 같은데, 한국 출간에 어려움이 없었나?

■ 있었다. “이걸 한국에서 출판하자면, 한국 식의 소설 수법으로서 고치면 어떻겠는가?” 이러더라. 그래서 내가 그렇게 못하겠다고 했다. 내용은 그대로, 소설 기교나 수법을 다 그대로 출판하면서 어법과 철자법은 여기대로 고쳐도 좋겠다고 내 그랬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자고 그러더라.

왜서 그런가 하면, 그대로 출판해야 중국 조선족 소설의 특징과 기법, 수법이 그대로 드러나지 여기대로 다 고치면 한국 소설이지 중국 조선족 소설이 안 된다. 이색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좋다. 그래서 동의해서 출판하게 됐다. 출판사에서 여기 어법과 맞춤법 대로 다 고쳤다.

□ 책이 나왔는데 출판 기념회 계획은?

■ 원래는 해야 되는데, 지금 상황에서 뭐 출판기념회를 내가 하긴 곤란하고, 그래서 지금 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상황 보면서 며칠 지난 다음에,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면 하려고 한다.

□ 시를 주로 쓰다 장편소설을 썼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 어려움이 있었지 왜 없었겠나. 근데 장편소설 쓰기 전에 연습하느라 단편소설들 너댓편 써봤다. 발표는 안하고. 그 다음부터 시작했다.

쓰기는 반년에 세 권 다 썼다. 왜 그런가 하니까, 사실 너무 듣고 너무 생각했기 때문에 머리에 다 익어버렸다. 우리 어머니랑 부탁하고 말한 지는 대단히 오래다.

□ 어머니 부탁도 있었는데 왜 좀더 일찍 쓰지 않았나?

■ 이짝에 시들을 쓰느라고. 장편서사시 ‘천년 고국 고구려’ 그때 머리 다 빠졌다. 그런데 ‘천년 고국 고구려’가 3권인데 천여 페이지 넘는다. 28대 왕조를 썼다.

처음에는 중국 출판사에서 출판하겠다 하더니 못하겠다고 해서 5,6년 넘어 묵었다. 그래서 여기서 출판했다.

중국 집안현에서 2004년 7월 1일에 호태왕비를 유네스코에 문물로 등재했다. 그러면서 중앙에서 문건으로 지시가 내려왔는데 ‘고구려에 대해서 한 페이지만 논해도 그 책은 못 찍는다. 만약 어느 사장이 고구려에 대해서 출판했다면 철직한다’. 그래 놓으니까 몽땅 얼어붙은 거다.

그전에는 교과서에도 고구려란이 나왔고 우리 역사를 논했다. 그러다가 그 후에 논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교과서에서부터 우리 민족의 역사를 없애버렸다.

□ ‘흑색 태양’도 역사적인 이야기가 많다 보니까 역사적 사실 고증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사료들을 많이 공부했을 것 같다.

■ 어려움이 많았다.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 그저 망탕 쓰면 안 돼 거든. 자료들을 다 맞춰보고 썼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마음대로 쓰겠나. 아마 좀 틀린 것도 더러 있을 것이다.

“하루는 안중근이 우리 외할아버지에게 찾아왔다”

   
▲ 김파 시인은 외할아버지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가족사를 작고한 어머니의 구술을 토대로 대하소설로 형상화 했다. [사진 - 조천현]

□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참여한 유동하 선생의 후손으로 안다. 100년의 역사를 3대에 걸친 가문사로 썼는데, 유동하 선생과 이 소설의 관계는?

■ 유동하는 우리 어머니 오빠다. 소설에도 나오는데, 유동하 부친 유승렬은 1898년에 러시아로 이주해갔다. 아주 유명한 중의(中醫)였다. 그때 해삼위, 지금 블라디보스톡에는 우리민족들이 집중돼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요청해서(받아서) 거기를 가서 의사 노릇하게 됐다.

그런데 하루는 안중근이 우리 외할아버지에게 찾아왔다. 유세하면서 시베리아 일대를 돌면서 감기 걸려 왔다. 우리 외할아버지네 집에 눌러 있으면서 한쪽으로 약을 달여 마시면서 한쪽으로 나라 형세 이야기를 했다.

그때 우리 어머니가 아마 한 여섯살 쯤 됐을 거다. 그런데 앞에서 먹을 갈아주면 안중근 의사가 붓글씨도 쓰고 그랬던 모양이다. 그래서 귀엽다고 하면서 각전을 주니까 우리 어머니가 밖에 나가서 눈깔사탕을 싸(사)다가 입에다 하나씩 다 넣어주고 웃고, 앞에서 노래하라고 해서 독립 노래 부르고, 아주 귀엽다고 그랬다.

유동하는 수분하 쪽에서 러시아 철도고등중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유동하가 러시아의 철로보(철로신문)을 가져왔다. 이등박문(伊籐博文), 이또 히로부미가 어느날 할빈(하얼빈)역에 도착해서 러시아 대신과 담판하러 온다는 소식이 거기에 간단하게 실렸거든... (안중근 의사가) “러시아 말 아는 사람을 하나 구해야겠다” 해서 우리 외할아버지 집에 들렸다. 그래서 “야를 데려가라”. 그래서 우리 유동하 삼촌이 따라 나선 거다.

□ 유승렬 의원 등은 모두 본명을 쓴 건가?

■ 다 원명 그대로다. 그런데 우리 외할아버지 유승렬이 쌍둥이다. 형님은 유태렬이고. ‘묘금두 류(劉)’, 유소기(劉少奇) 유자다. 우리는 거기(연변)서는 류라고 한다. 여기서는 유라고 하더라.

□ 선생은 직접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안중근 의사와 유동하 의사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나?

■ 다 어머니 말씀이다. 90년도에 교통사고로 사망됐다. 늘 이야기했다. 그래서 내 이걸 썼다.

□ 가족은?

■ 5남매인데, 내가 가운데 남자 하나다. 원래 맨 위 맏이가 남자 있었는데, 광복 전에 조선으로 나왔다. 어느 군관학교인가 거기 댕긴다 하더니 후에 종무소식이다. 지금은 전혀 모르고, 그래서 우리 집안에서는 그저 아들이라고는 나 하나 밖에 없다.

□ 안중근 의사와 유승렬 의원과의 관계로 시작돼 유동하 선생으로 이어진 인연인데, 이번 대하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 이걸 왜 쓰게 됐냐면, 기본 동기가 지난 시절 어머니가 생존할 때 우리 가족 이야기를 쭉 하면서 “너 밤낮 글쓴다고 하는데, 이걸 꼭 글 써라” 하고 그냥 말씀했다. 우리 어머니가 참 이야기 잘 한다. 그러나 후에 쓰겠다고만 했다.

후에는 우리 형제들도 “너 밤낮 글쓴다면서 이런 가정소설도 안 쓰고 뭘 하는가?” 촉탁했다. 어머니와 형제들의 촉탁에 의해 쓰려고 결심했고 우리 가정 경력이 대단히 특수해 특수성에 힘을 입었다. 이건 소설재료인데 꼭 써야겠다 결심했다. 그래서 쓰기 시작한 거다.

우리 가정이 6국에 흩어져 살았다. 일본, 조선, 중국, 러시아, 폴란드, 사방데 흩어져 살면서 100년 동안의 역사를 전부 경과한 거다.

“모 주석이 지금 천안문에서 우리를 향해 손 젓는 게 보인다”

   
▲ 2016년 11월 13일 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개원호텔에서 한국윤동주기념사업회와 연변동북아문학예술연구회가 주최한 제3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에서 김파시인이 '다이아몬드 게임'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사진제공 - 길림신문]

□ 언제부터 시를 쓰게 됐나?

■ 시를 쓴 지가 오래다. 왜서 시를 썼는가 하면, 내 어릴 적에 우리 아버지가 중국에서 토지개혁 혁명 때 청산 맞았다. 청산이란 게, 재산을 다 몰수해 가고, 그리고 군중 앞에서 막 때리면서 이랬다. 그래 가지고 부상당해 돌아온 다음에 전염병에 걸렸다. 아마 한 두어달 앓다가 사망됐다.

그래서 겨울에 사망됐는데, 관도 짤 것도 못 되고 관 비슷하게 아무 널이나 갖다 만들어서 우차에 싣고 어머니하고 내가 묘지로 갔다. 그런데 (땅을) 파려고 드니까 팔 수가 없다. 흑룡강성은 3월달이 대단히 추울 때다. 그래서 그대로 놓고 그 위에다 눈 덮어놓고 이듬해 봄에 가서 그걸 다시 파서 묘를 세웠다.

돌아오면서 강변에서 땔감으로 쑥대를 베고 이러는데 그때 얼음이 둥둥 떠내려 오는데 기러기들이랑 와서 강변에서 놀더라. 그걸 보고 왔는데 학교에 가니까 작문시간에 ‘새봄’이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지라하더라고. 그래서 내 강변에서 본 사실을 죽 작문 지었다. 그런데 그게 모범작문이 돼서 학교 벽보란에 떡 붙었다. 그기에 힘을 입어 가지고 ‘아 이거 되는 모양이다’. 그래 후에는 계속 책 보고 작문짓는 연습했다. 작문시간에 내놓으면 내건 잘 썼다고 늘 붙여줘 힘 입었다.

그러다가 초중(중학) 2학년 땐가 중국에서 대약진이 있고 막 이러면서 학교에서도 코크스를 굽는다고 석탄을 가득 재놓고 전 운동마당을 반마다 나눠줬다. 거기다가 석탄을 재놓고 불을 땐다. 그래서 마지막에 다 타면 물을 부어 코크스를 만든다. 그래 그 코스크 만든 것을 강철공장에 보낸다. 강철 뽑아낸다고. 그게 그때 대약진이었다.

학교에서 그때는 공부도 안 하고 전부 그랬다. 우리 반에서 만든 코크스를 산더미처럼 재놓았는데, 내가 받아서 그 위에다 쏟아놓고 받아서 쏟아놓고서, “다 쌓았다!” 하더라고. 갑자기 시가 생각나더라. 코크스 산에 올라서니까 산 너머 구름 저편에 모(택동) 주석이 지금 천안문에서 우리를 향해 손 젓는 게 보인다. <목단강 조선일보>에 보내 이튿날 떡 나갔다. 아 그게 났다고 모두 야단이더라.

□ 중국에서 개인시집 발간은 쉽지 않다고 하는데 개인 명의로 시집이 발간된 배경은?

■ 맨 처음 82년에 한꺼번에 시집이 쏟아져 나왔다. 서정시집 ‘흰돛’이 나오고 아이들 시집이 한 해에 두 개 나왔다. 하나는 ‘해순이와 달남이’, 그 다음에 ‘신기한 피리’, 이게 출판되었다.

모두 깜짝 놀라서 “야, 저놈이 뭐 한다” 야단났다. 그게 떡 출판되면서 힘 얻었다. 그 다음에 이걸 후에 여기 한국에서도 다 재판했다.

□ 중국에서 개인시집 발간이 드문 일인가?

■ 아주 힘들다. 그때 아마 하나는 그 사람 시 능력도 보고 두 번째는 경제 문제다. 중국에서 그때만 해도 시인이 출판비를 내는 게 아니라 출판사에서 시가 좋으면 시집을 묶어서 출판해줬다. 그러니까 돈을 국가에서 부담했다. 그러니까 어지간히 좋은 시와 어지간한 사람은 내 안 준다.

□ 2014년에 도문에 ‘돌의 음악’ 시비를 제막했고, 2016년 윤동주상을 수상했는데, 최삼룡, 최룡관 선생 성함이 많이 나오더라.

■ 최삼룡 선생은 내가 시를 쓰면서부터 나를 중시했다. 자주 얘기도 하고, 나의 시에 대해서 그 다음부터 전문 연구했다. 그리고 내 시집 내면 거기다 서언 쓰고 시집 평론하고 계속 이렇게 한 40년동안 같이 지냈다.

이러다가 그거이 쌓이고 쌓이고 쌓이니까 이렇게 두꺼운 원고가 됐는 모양이다. 그래서 몇 년전에 ‘김파론’이라고 이렇게 두껍게 냈다. 역시 한국에서 백암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최용관 선생은 자기 시에서 자기주장이 대단히 억센 사람이다. 꺾지 않는다. 현대시에 대해서 주장하면서 막 이끌면서 나왔다. 그래서 수태 보수파한테 욕먹고 비평맞고 몇 번 눈물 흘렸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꺾지 않았다.

요즘은 신문사 퇴직했는데, 문학하는 시인들을 데려다 놓고는 이론 강의해주고 시인들 많이 배양해냈다. 하이퍼시를 쓰는 사람을 많이 배양했다. 이번에 하이퍼시로 중국 소수민족 문학창작 준마상을 탔다. 상금도 대단하다.

최룡관씨가 나하고 왜 맞냐면, 나는 전위성, 개척성, 창조성이 있는 게 시라는 거다. 언제나 새롭게 쓰고 부정이 부정으로 계속 발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답보하게 되면 시가 낡아서 발전 못한다. 그래서 그분하고 나하고 관점이 맞다.

□ 전업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던 80년대 초반에 비하면 지금은 한중관계가 밀접해졌다. 한국에 진출하게 된 계기를 설명해달라.

■ 내가 처음 <송화강> 잡지에다 “유동하와 그 동료들” 제목으로 안중근과 유동하 같이 할빈역에서 이등방문을 저격하는 전반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우리 어머니한테 들은 그대로다.

미국 조지아대학에서 온 한국교수가 이 잡지를 보다 이걸 발견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집까지 찾아왔다. 우리 어머니 전반 이야기 다 듣더니 대단히 감동하더라.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하고 직접 연관돼 살아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우리 어머니밖에 없다고 하더라.

그때 돌아가면 한국 유씨 종친회 회장을 만나서 우리 어머니를 한국에 초청해서 역사이야기를 나누게끔 연결해 줄테니까 기다리라 하더라. 정말 얼마 안 있어서 요청장 보내왔다. 그래서 86년도 봄에 처음으로 우리 어머니 모시고 내하고 둘이 왔다.

유창순 전 총리와 국회의원들이 우리를 맞이하고 숱한 기자들이 막 사진찍고, 그 자리에서 우리 어머니 보고 “그때 그 과정을 좀 이야기해 달라”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강연대에서 아마 한 한시간동안 이야기했을 거다. 어머니가 원래 이야기 잘 한다. 후에 텔레비전으로 10여분 되게 내보냈다.

그런데 나를 자꾸 데려다가 강연시키더라.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해 달라. 자꾸 그런다. “아무렇게나 이야기했다가는 돌아가서 정치범으로 잘못 걸리면 큰일 난다. 이야기 못하겠다”고 했는데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된다고 했다. <동아일보>에서 강연을 2시간 쯤 했고, 그게 소식이 퍼져서 사방에서 요구해서 돌아다니면서 강연하고 그랬다.

□ 당시 한국에서 유동하 선생이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 내 생각나는 게 있어서 어머니하고 토론했는데, 유동하는 러시아에서 희생됐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열사증 탈 수 없고, 한국에서도 주겠는지 안 주겠는지 모르겠다고 그랬다. 그랬더니 우리 어머니가 “대통령 앞으로 진정서 써서 보내봐라. 혹시 줄런지 어떻게 아냐?” 노태우 대통령 앞으로 진정서를 썼다.

유동하에 대한 사실 쭉 쓰고 “훈장 못 주겠는가?” 그랬더니 며칠 후에 대답이 내려왔는데 대통령께서 지령내렸는데, “해외교포지만 주라”. 그게 계기가 돼서 그 후부터 해외교포 다 주게 됐다.

상장은 규정된 날이 있다더라. “2년마다 한 번씩 주는데 명년에 주니까 그때 어머니 모시고 나와서 타라.” 보훈처의 총 책임자가 찾아와서 쭉 이야기하더라. 그런데 그 후에 폴란드에 있는 유동하 동생 유동주가 그걸 타가지고 갔다.

“‘중국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현대화’ 이게 무슨 뜻인가?”

   
▲ 김파 시인의 가족은 대약진과 문화대혁명 기간을 청산 대상인 ‘신빈농’ 계급으로 겪어내야 했다. [사진 - 조천현]

 

□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도 겪고 개혁개방 등 중국 현대사를 겪었는데, 일련의 흐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 모 주석이 건국한 다음에 1958년부터 농촌집단화로 인민공사를 꾸리고 성시(省市)에서는 공장들을 국영화하고, 이러면서 대약진을 막 일으켰다. 대약진이 실패했다.

그게 어떻게 되나? 아니, 풍년 농사짓게 한다고 학생들 다 동원해서 공부 안 시키면서 심경전(深耕田) 한다고 땅을 1미터 파서 생땅에 씨를 심으니까 노랗게 말라서 안 되는 거다. 흉년이 몇 해 들었다. 그래서 굶어죽은, 기사(飢死)로 죽은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

학생들까지 학과를 정지시키고 동원해서 코크스를 구워서 강철을 만들어낸다고 하면서 10년 이내에 영국을 따라잡는다고 이랬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떡 실패되니까 당내에서 이견이 대단히 분분했다. 모 주석이 할 수 없어서 원래 당 주석 겸 국가 주석이었는데 국가 주석 자리를 유소기한테 내줬다. 유소기가 지금으로 말하게 되면 경제부흥을 위해서 ‘3자 1포 4대 자유’를 내놨다. 개혁개방처럼 토지랑 도거리제로 다 나눠줬다.

이렇게 되니까 유소기 위신이 점점 올라가고 모 주석 위신이 하락했다. 그래서 다음번 당내 공산당 주석을 선거하게 되면 자기가 떨어지게 됐다. 가만 보니 안 되겠다. 결국 상해에 가서 자기를 따르는 일파들을 묶어서 일으킨 게 맨 처음에는 반우파투쟁으로 해서 이러다가 그 다음에는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결국 자기의 적수 유소기를 때려부수고, 그 다음에 등소평도 개혁개방을 주장해 그 사람도 때려부수고 그랬다. 그래서 결국은 문화대혁명으로 모 주석이 이겼다. 문화대혁명 말기에 모 주석이 사망되기 전에 화국봉 불러다가 자기말 잘 들으니까 “나를 계승해서 국가를 영도해 나가라. 반드시 내가 규정해놓은 방침대로 이끌고 나가라” 이래서 화국봉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모 주석도 76년도 사망됐다.

화국봉이 턱 올라왔는데, 이 기회를 타서 화국봉이 다시 등소평이랑 다 올려와서 쓰기 시작했다. 등소평이 그 다음에 개혁개방이다 하고 화국봉이 자리에서 내떨어졌다. 그래서 등소평이 그때 중앙의 권위로 올라왔는데 그분이 개혁개방을 제창했다.

중국 개혁개방한다. 뭐라고 했냐면, ‘중국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현대화’, 이게 무슨 뜻인가? 공산당이 자본주의 두들겨 엎고 혁명한다 했는데 안 되는 거다. 중국이 봉건사회에서 사회주의로 뛰어 넘었거든, 어간에 자본주의를 안 거쳤거든.

중국도 경제의 자본주의화를 하기 위해서는 요걸 어떻게 대명사를 꾸며내야겠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각 대학 유명교수들 모아놓고 토론시켰다. 한 북경대학의 교수가 뭐라 했냐면, “이거 자본주의라 하지 말고 ‘중국 특색’이라고 하자.” 이걸 등소평이 채용한 거다.

사회주의 모자 쓰면 공산당이 자본주의 경제를 영도하면서 나라를 부강시킬 수 있다. 이래서 뒤에다는 ‘사회주의 현대화’를 썼다. 이것을 ‘신형사회발전론’이라고 한다. 완전히 자본주의도 아니고 완전히 사회주의도 아니고 중간 길로 가고 있다. 중용지도다.

시진핑도 한 말이 있다. 전번에 당 중앙소조회의에서 “우리 중국이 국가 신앙이 없다”. 그전에는 “사회주의 하면서 공산주의를 향해 전진하자”, 공산주의가 국가신앙이었는데 지금은 자본주의도 아니요 사회주의도 아니어서 고민하고 있다. 국가 신앙이 없으니까 앞길이 안개가 껴서 잘 보이지 않는다.

30년동안 개방해서 중국 경제가 중국 5천년 역사이래 현대 물질문명으로 처음으로 아주 고도로 발전시켜서 백성들에게 물질문명을 만족시키게 하고 있다. 그래서 이건 정말 거대한 성과다. 외부평론가들은 ‘혼합실용주의 중용지도’, 자기한테 이로우니까 공산주의고 자본주의고 할 것 없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엮어서 만든 노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곤란에 부딪치고 점점 잘 안 된다. 지금 중국이 실제로 놓고 말하면 허장성세다. 앞으로 세계 패권 절대 쥘 수 없다. 시진핑도 이미 당 회의에서 백성들에게 공개했는데 두 개 백년(200년) 분투해야 중국의 경제수평이 지금 구라파의 발전된 나라 영국, 독일, 이태리, 프랑스 이런 나라를 따라잡을 수 있다. 구라파는 또 앞으로 전진하지, 영원히 안 된다는 말이다.

□ 외부에서는 중국이 공산당이 정권을 쥐고 있지만 사회는 자본주의와 다르지 않다고 평가하는데 어떻게 보나?

■ 나는 그렇게 안 본다. 체제규정 자체가 왜서 다르다고 보느냐면, 돈 버는 방식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방식으로 벌어들인다. 그렇지만 돈을 관리하는 것은 번 사람이 자기가 가지는 것이 아니고 중국은 모든 공사가 몽땅 국가로 돼 있다. 개인으로 된 것은 극히 드물다.

영도는 일당제다. 그러기 때문에 공산당이 아무 사람이나 잡아서 뒤 훑으면 다 탐오했고 부패온상이 됐다. 이 체제 자체가 부패하지 않을 수 없다. 잘했든 못했든 공산당이 혼자 하니까 감시 감독을 할 수가 없는 거다.

돈 관리는 집체주의 국가경제, 그래서 그 돈 번 것 가지고 군함을 만든다, 포탄을 만든다, 무인비행기를 만든다, 군사무기를 강화하는데다 퍼붓고 백성들에게는 자본주의 국가 같으면 30년 넘어 개방했으면, 평균수입이 적어도 2만달러 이상은 돼야겠는데 그게 4분의 1도 안 된다.

‘명시 한 수와 한 생을 바꿔라’

   
▲ 2014년 4월 1일 중국 길림성 도문시 두만강광장에 김파 시인의 '돌의 음악' 시비가 세워졌다. 답사하고 있는 김파 시인.
《돌을 두드리면/ 소리가 난다/ 돌은 부서진 소리가/ 뭉쳐진 덩어리다//바이올린 선률도/ 피아노의 절주도/돌의 부서진 소리를 체로 쳐/ 빚어서 발효시킨 술/ 마시면/ 취한다.》[사진제공 - 길림신문]
   
▲ 김파시비 제막식은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이 주최했고, 도문시당위와 도문시정부가 후원했다. [사진제공 - 길림신문]

□ 이후에 글을 쓰거나 책을 내거나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 지금 내 요걸 말하고 싶다. 내 평생 문학창작에 종사했는데, 좌우명이 하나 있다. 뭐인가 하면 ‘시인이 되거나 혹은 작가가 되려면 인격적으로 먼저 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래야 좋은 작품, 그 사람이 쓴 걸 독자들이 믿어준다는 거다.

창작에서 좌우명은 이때까지 시를 많이 썼는데 ‘명시 한 수와 한 생을 바꿔라’ 이거다.

□ 본인의 명시 한 수를 꼽는다면?

■ ‘돌의 음악’이다. 내 명시집도 출판했다. 그것도 중국에서 유일하게 내 하나가 선정돼서 북경민족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조선족 문학 100년사에서 유일하게 나 하나가 명시집을 냈다. 거의 10여년 돼 간다.

작가로서 인생관은 시인이나 작가에게는 인생이 두 번 있다. 왜 두 번 있는가? 하나는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육체적 인생이고 그 다음 하나는 영혼적 인생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영혼적 인생이다.

그 작가는 이미 죽어서 저승으로 갔지만 그 사람이 남겨 논 작품은 그 사람 영혼인데, 그 사람의 영혼 작품이 후세에 남아서 후세들의 거울이 돼 훈시하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책 자신이 작가의 영혼적 인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 남은 여생을, 생명을 연소시켜 계속 작품을 쓰겠다.

사실은 지금 출판비 때문에 그렇지 출판하지 못한 시집만 해도 10여권이 있다. 한 권에 다 200수 이상씩 된다.

□ 한꺼번에 전집으로 내야겠다.

■ 지금 단시집도 못내는 주제에 뭐 전집을 어떻게 내겠나. 안 된다. 지금 책보는 사람 어디 있나. 책이 안 팔리니까 출판하려 해도 곤란하다는 거다.

전집 좋은 것만 골라서 딱 10권만 만들어도 좋겠는데, 지금 형편에서 경제가 따라 못 가니까.

□ 한국에 언제까지 머물 계획이고, 이후 계획은?

■ 이번에 한국 온 것은 이 책 출판하려는 것이었다. 3월 달에 아마 대련 집에 가야 한다.

□ 지금 중국 대련에 가족들이 살고 있나?

■ 대련에서 지금 영감 노친이 살고, 큰 딸 아이는 청도에 있고, 두 번째 딸아이는 일본 동경에 있다. 다 시집갔다. 그리고 막내 아들이 지금 청도에 있다.

□ 생활에 지장은 없나?

■ 별 지장 없다. 둘 다 로임(연금)이 있어 생활은 근심 없는데, 책을 출판하자면 그건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 어렵다.

□ 마지막 질문이다. 북한에는 가 보았나? 남북통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이전에 고중(고등학교) 다닐 때 방학 기간에 한 번 갔다왔다.

남북이 쌍방에서 ‘평화통일촉진회’를 내와 가지고 그 기초 상에서 이제 남북이 서로 토론해 가지고 통일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첫째로 3.8선 거기에다가 공동으로 투자해서 ‘경제발전 공동시범구역’을 내와 가지고 누구든지 투자할 사람이면 자유로 투자해서 쌍방에서 평화적으로 경영하게끔 하자.

둘째로 남북을 3.8선 경계로 해서 ‘자유 거주지’를 내오자 했다. 쌍방 국가에서 보호해주고, 친척도 만나고, 떨어져 살던 사람들 같이 집을 짓고 살든지 하자.

세 번째 남북을 통일하기 위한 인재를 배양, 양성하기 위해서 남북통일 촉진을 위한 ‘남북평화통일학원’을 건립해서 초등때부터 남북평화통일 위한 인재를 배양하자.

그래 가지고 남북을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해서 북은 핵무기를 포기하고 남은 외군을 철수시키고 이래서 유엔에서 동의하는 지구상에서 그 어디에도 참가하지 않는 국가가 돼서 세계의 평화성지로서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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