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재 이도영/기명절지도/한지에 수묵채색/34*168.5/1923/국립중앙박물관. [자료사진 - 심규섭]

이도영은 조선 말기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살다간 화가이다. 격변하는 시대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것이다. 안중식, 조석진과 같은 대가(大家)에게서 전통화법을 배웠고 특히 [기명절지도]를 잘 그렸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삽화가, 만화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는 각종 그릇과 꽃, 열매 따위를 소재로 한 표현한 그림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서양의 정물화와 비슷하겠다.
하지만 우리그림은 미학, 조형원리, 상징 따위에서 서양화와 큰 차이가 있다.
그림을 그리는 화법, 즉 조형원리는 미학에 따른다.
즉 아름다움이란 가치는 무엇인지, 어떻게 구현되는지에 따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도영이 그린 [기명절지도]는 전통화법과 서양화법을 절묘하게 결합하여 발전시켰다고 평가받는다. 먼저 살다간 천재화가 오원 장승업의 [기명절지도]보다 서양화법의 요소가 더욱 강하다.
이렇게 발전된 [기명절지도]는 현재 한국화를 전공하자고 하는 교육생의 기초과정의 바탕이 되었다.

단원 김홍도부터 서양화법은 다양한 형태로 수용되었다.
하지만 서양의 철학이나 미학보다는 철저히 화법이라는 형식을 중심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을 조금 고상하게 표현하면 동도서기(東道西器)라고 한다.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우리 철학을 바탕으로 발전된 서구의 과학기술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당시 선비들은 조선의 학문과 철학이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과학기술은 서구에 비해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서구의 종교나 철학을 배제하고 나머지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데는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주로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학문적 태도를 가졌던 북학파가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연암 박지원은 천주교 성화를 보고 형용할 수 없는 충격에 빠지지만 동시에 사람 몸에 날개가 달린 것을 보고 상당한 불쾌감을 드러낸다.
박지원이 천사그림을 보고 인상을 찌푸린 것은 절대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학적 가치관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서양화에서 기법이라는 형식에 주목했다.
우리그림이 가지고 있는 인문학적 가치나 조형원리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서양의 명암법과 원근투시법을 수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이 두 가지 화법을 사용하면 실제와 같은 공간감과 사물이 손에 잡힐 것 같은 탁월한 시각적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실제 사신단을 따라 연경에 다녀온 사람들은 천주교 성당에 그려진 종교화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주당의 북쪽 벽에는 철사 줄이 목에 매여 있는 큰 개 그림이 있는데 언뜻 보니 물려고 덤비는 것 같아 무서웠다. 그 그림 밑에는 살아 있는 개 몇 마리가 그늘에 누워 있는데 그림의 개와 살아있는 개가 구분이 되지 않았다.”
1778년 연경에 다녀온 이덕무(1741~1793)의 기록인데, 현실의 개와 그림 속의 개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현실감이 있었다는 말이다.

영,정조시대에 이미 서양화법의 일부가 수용된다. 특히 단원 김홍도는 명암법을 수용하여 용주사 후불탱화를 그렸고 원근투시법이 들어간 [책가도]를 창안한다. 또한 선비화가 강세황이나 김홍도의 친구였던 화원 강희언도 서양화법이 들어간 그림을 실험적으로 창작한다.

아무튼 이도영의 [기명절지도]는 전통화법을 바탕으로 서양화법인 원근투시법을 수용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도영의 그림은 서양의 정물화와는 전혀 다르다.
명암을 사용하되 그림자가 없고, 사물을 겹쳐 앞뒤 공간을 만들지 않았다. 또한 조형원리를 구현하는 방편인 미술재료도 바꾸지 않았다.
얼핏 보면, 기존의 우리그림과 전혀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당시에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위 그림 속에 나타난 조형원리를 살펴보자.
일단 화면 전체는 한 개인이 본 단일시점이 적용되어 있다.
전통적인 우리그림에서 사물은 여러 각도에서 본 형태를 결합한다. 만약 호리병을 그린다면 주둥이는 위에서 아래로 본 시점을 사용해 동그랗게 그리고, 몸통은 정면에서 보아 좌우 대칭으로, 바닥은 평평하게 그리는 방법을 사용한다. 대략 2~3개 정도의 시점이 절묘하게 결합한다.
일종의 입체주의 방식과 비슷하지만 사물이 왜곡되거나 흐트러짐을 최대한 방지한 것이 큰 차이점이다.

하지만 이도영의 그림에는 수석을 중심으로 각종 고동기나 문방구가 질서정연하게 표현되어 있다. 향로, 주전자, 둥근 모양의 그릇의 주둥이 부분이 단일시점에 따라 일정 비율의 타원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만약 시점의 차이가 나거나 잘못 그렸다면 주둥이의 타원형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도영이 이 그림에서 사용한 원근투시법은 책과 벼루에 드러나 있다.
원형의 사물은 원근투시법을 표현하기 어렵다. 하지만 사각형의 사물은 1, 2, 3점 투시법이 복합적으로 적용된다. 흔히 높은 건물을 아래에서 위로 쳐다보면 소실점을 향해 점점 좁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책이나 벼루를 의도적으로 대각선 방향으로 놓은 것도 원근투시법이 잘 드러나도록 의도한 장치이다.

이 그림에 표현된 명암법은 아주 약하다.
일단 단일 광원에 의한 그림자가 없다. 그렇기에 각 사물은 손에 잡힐 것 같은 입체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서양화법에서 그림자는 사물의 입체감을 내기도 하지만 시간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그림 속의 모든 사물은 3차원의 원리에 따라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 존재해야 한다.
광원과 그림자가 없다는 말은 여러 공간과 여러 시간대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명암법이 우리그림의 시공간 개념을 깨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실제 그림에는 서로 다른 시간에 나타나는 복숭아, 장미, 국화, 불수감, 밤 따위가 한 화면에 표현되어 있다. 심지어는 현실에는 없는 영지 같은 사물도 있다.

원근투시법은 공간을 만드는 방법이다.
좌우의 공간이 줄어드는 대신 앞과 뒤의 공간을 확장하는 효과가 있다.
깊은 공간을 만들려면 앞뒤로 많은 사물을 겹쳐야 한다. 뒤에 있는 사물은 앞 사물에 가려지고 동시에 작아지면서 흐려진다.
하지만 위 그림에서 사물은 최소한으로 겹쳐지고 있다. 이 말은 앞뒤 공간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앞뒤 공간에 만들어지지 않는 원근투시법은 별 의미가 없다.

무엇보다 원근투시법이 넘지 못하는 우리그림의 조형원리가 있다.
그것은 우리그림에 표현되는 모든 사물은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크고 작든 간에, 혹은 화려하든 소박하든 관계없다. 작은 사물은 큰 사물에 종속되거나 보조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우리그림에서 사물이 독립성을 가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그림에 등장하는 사물에는 상징이 붙어있다. 사물에 붙은 상징은 대부분 선비의 지조와 절개나 장수, 출세, 다산과 같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가치들이다. 여기에 높낮이를 매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 안중식/기명절지도-10병풍 중/비단에 채색/각 144.9*36.9/국립중앙박물관.
세로로 긴 화면에 사물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배치했다. 사물의 겹침은 극도로 자제되어 있지만 위아래의 공간은 무한대로 확장된다. 또한 좌측의 화분처럼 보이는 사물을 잘라서 표현한 것은 병풍의 특성을 살려 좌우화면의 연결성을 만들고 횡적 공간을 확장하기 위한 장치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원근투시법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가로그림이 적합하다.
앞뒤의 깊은 공간을 창조하려면 눈높이를 중심으로 사물을 겹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그림에서는 사물을 겹치지 않으면서 사물 위에 사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로로 긴 그림을 결합한 병풍그림이다.
우리그림의 조형적 특성이 병풍그림이라는 형식을 낳았다.
병풍그림은 독립적인 세로그림을 결합해 가로그림으로 만들어낸다. 또한 가로그림을 잘라 세로그림으로 바꿔주기도 한다. 가로세로화면의 자연스런 전환이 공간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세로로 긴 화면에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사물을 중첩시키지 않고 배치할 수 있다. 아랫부분에 그려지는 사물은 가깝고 위에 그려지는 사물은 멀다. 하지만 사물의 크기가 작아지거나 모양이 왜곡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사물 위에 사물을 그려 위아래의 공간을 확장했기 때문에 원근투시법도 쉽사리 수용되지 않았다.

서양의 인본주의 철학은 신(神)의 관점이 아닌 인간의 시점을 필요로 한다. 명암법이나 원근투시법은 이러한 개인의 시점으로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우리그림에는 애당초 신의 관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개인의 관점이 중심인 적도 없었다. 우리그림의 관점은 사회 공동체의 관점이다. 물론 이러한 공동체의 관점은 개인의 관점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개인과 공동체의 긴장과 조화 속에서 발전했다.

모든 문화는 정체되면 망한다.
조선의 선비들은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문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시 선비들이 가졌던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개념은 말처럼 쉽지 않다.
상투와 한복을 입고 영어를 쓰는 것, 서양 옷과 음식을 먹으면서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어느 것도 편안하지 않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동도(東道)는 특정 민족만의 사상이 아니라 인류보편적인 진리를 말하며, 서기(西器)는 전쟁이나 약탈을 위한 과학과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이로운 도구를 뜻한다는 사실을.

(수정,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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