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 신윤복(1758~미상)은 유명한 조선 후기의 화원이다.
사람들은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로 삼원삼재를 꼽았다. 삼원(三園)은 전문화원인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을 일컫는 것이다. 선비화가인 삼재(三齋)는 공재 윤두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을 부르는 말이다.
아버지 신한평은 왕의 어진을 그리고 벼슬을 했으며 자비대령화원을 지낸 당대 최고의 화원이었다. 신윤복은 이러한 화원가문의 아들로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웠고 이후 도화서 화원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 신윤복/소나무와 매/비단에 수묵/북한 평양미술박물관 소장.
거친 붓질로 소나무와 매를 그렸다. 전문 화원풍의 그림은 아니다. 이런 그림은 선비들이 좋아한다. 선비의 정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보통 신윤복을 풍속화의 대가로 평가한다.
특히 그가 그린 [미인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러한 신윤복의 화풍은 한마디로 유려하고 세련미가 넘친다.
하지만 풍속화 외에도 산수화를 그리는 솜씨가 만만치 않고 개나 닭, 새와 같은 영모화(翎毛畵)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위 그림은 일반사람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꼼꼼하게 그리거나 채색도 하지 않았으며 붓질은 거칠다. 산수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물이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혹 누군가는 하다만 그림 같다고 불평할지도 모르겠다.
신윤복은 세밀한 묘사나 깔끔한 채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검증받는 전문화원이다.
그럼에도 어설픈 듯이 그린 이유는 뭘까?
선비들은 그림에서 겉으로 표현되는 색상이나 묘사보다도 사의(寫意)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송대(宋代)의 문인 소식蘇軾(1036~1101)은 “형사(形寫)로만 그림을 논하면 식견이 아이들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조선의 선비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즉, 그림에 쓸데없는 꾸밈이 없으면서 뜻을 명쾌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간단하게 해석해 보자.
미술작품은 당대의 철학을 담고 있으며 지배계층에 속하는 문화이다.
만약 지배계층이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 모든 그림은 그 종교적 내용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실력이 없는 것이고, 다르게 표현하면 이단으로 몰려 배척된다.
중국이나 조선의 선비들은 유학자들이다. 특히 조선의 선비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을 이끌어가는 지배계층이다. 결국 조선의 모든 그림은 선비들이 말하는 사의(寫意), 즉 유학적인 가치를 담아야 한다는 뜻한다.

그런데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선비들이 수신(修身) 차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선비들에게 문사철(文史哲)은 전공필수이고, 시서화(詩書畵)는 교양필수였다.
선비들이 수신하기 위해 그림을 하면서 전문화원의 그림과 겹치게 된다. 아무래도 사물을 묘사하고 채색을 하는 능력은 전문 화원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런 문제 때문에 중국에서도 선비그림과 화원그림을 구분하여 남종화, 북종화로 나누는 빌미가 된다.
조선에서 겸재 정선이 남종화와 북종화를 통합시켜 진경산수화를 창안했다고 하지만 남종화의 전통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만큼 문인화의 위세는 대단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중인계층인 전문 화원들은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가면서도 동시에 선비의 정서에 맞는 그림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소나무에 앉아 있는 매를 그린 것이다.
매나 수리를 표현한 그림은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창작되어 왔다. 특히 숙종 때 화원이었던 정홍래의 매 그림은 왕이 신하들에게 하사하는 세화(歲畫)로 사용될 만큼 인기가 많았다.
정홍래는 새로운 형식의 매 그림을 완성한 화원이다.
매나 수리는 생태계의 꼭대기에 있는 용맹하고 포악한 동물이다. 정홍래는 이러한 사냥매에 붙어있는 살육이나 수동성을 벗겨내고 용맹성만을 부각시켜 독립적인 선비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매와 수리를 중심으로 거친 바다, 수석, 아침 해를 결합시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인간적 양심과 학문적 지조를 지키는 선비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정홍래의 그림과 비견하자면, 신윤복 그림의 배경은 바다에서 육지로 바뀌었다. 파도가 치는 바다와 수석, 아침 해를 없애는 대신에 커다란 소나무를 넣었다.
하지만 정홍래의 매 그림과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매는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선비의 상징이다. 동시에 소나무는 영원성을 뜻한다.
그러니까 ‘변치 않는 지조와 절개를 가진 선비’라는 뜻이 된다.

▲ 소나무/리석호/조선화/253*131/1966.
이 그림은 북한의 조선화가 만들어지는데 큰 영향을 준다. [자료사진 - 심규섭]

북한에는 사회주의 국가의 이념과 사상, 정서에 맞게 발전시킨 조선화(朝鮮畵)가 있다.
이런 조선화를 발전시키는데 커다란 영향을 준 작품들 중에 리석호의 [소나무]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에 주목하는 이유는 신윤복의 [소나무와 매]라는 그림과 거의 동일한 구도와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수묵화가 아니라 채색화라는 점이다. 또한 매의 상징은 선비가 아니라 북한의 노동당이나 당원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주인공이 달라도 ‘변치 않는 지조와 절개’라는 내용은 동일하다.
북한의 조선화는 밝고 화려한 채색, 넓고 깊은 공간처리, 영화 같은 이야기구조를 가지고 있다. 백성들이 아주 좋아할만한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하지만 사의(寫意), 혹은 사상이 정확한 그림이다. 누가 보아도 그림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신윤복의 [소나무와 매]는 북한 평양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이다. 북한의 화가들이 이 그림을 조선화를 창안하는데 모범작품으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북한에서 조선화가 완성된 이후에도 소나무와 매를 소재로 하는 그림은 꾸준히 창작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북한에서 창작되는 소나무와 매 그림은 다양하다.
조선화와 유화로 그려지고 심지어는 조선시대 문인화풍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매보다는 독수리를 많이 그린다. 특히 검독수리는 단골 소재이다. 독수리는 몸집이 크지만 다른 매보다 사납거나 용맹한 것은 아니다. 다만 산악이 많은 북한의 지형과 환경 때문인 것으로 추정한다.
소나무와 독수리 그림은 북한에서 수출하는 조선화 중에 인기가 많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 송명철/소나무와 독수리/조선화/95*59/2009년.
이 그림은 수출용이다. 북한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은 수없이 복제하여 판매한다.
북한에서는 순수미술과 상업그림의 구분이 없다. 또한 투자목적으로 그림을 매매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좋은 그림을 향유한다는 의미에서 만수대창작사나 제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복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제된 작품에도 원작자의 이름, 서명, 낙관이 찍혀있는데 질적인 차이는 엄연히 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위 그림 속의 소나무는 크고 푸르며 아래에서 위로 본 구도로 그렸다. 서양화법을 수용한 조선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한 검독수리를 그렸는데 소나무의 표현과는 약간 이질감이 있다. 소나무에 찍힌 태점이 인상적이다. 태점(胎點)은 궁중회화의 채색화에서 전형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이다.

북한은 사의(寫意)가 가득한 문인화(文人畵)를 지배계층의 퇴폐문화라고 규정하고 배척했다.
특히 신윤복의 풍속화는 남북한 모두에게 양반들의 퇴폐향락문화를 표현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이런 낙인이 찍혀있는 신윤복의 [소나무와 매] 그림이 북한에서 살아남아 대중화를 이루어냈다.
이것이 신윤복이란 탁월한 화가의 저력인지 아니면 북한 문화계의 변화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수정,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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