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시민들이나 외국인들이 보기에 미국이 ‘집단적 총체적 철면피’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미국이 자국에 주어진 권리 이상을 누리려 하지 않고, 미국이 내린 결정으로 영향을 받는 이들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 기꺼이 귀를 기울일 거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미국은 상식을 따르려 하지 않고 어렴풋이 닥쳐오는 위기들에 대처할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명목뿐인, 그리고 절차뿐인 ‘민주주의’로 전락해버린 건 아닐까?

글쎄, 잘 모르겠다. 이런 걱정을 저자가 굳이 트럼프 등장 직전 했다는 것이, 내 생각으로는 늦어도 아주 늦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저자가 앞서 말한 모습들은 그동안 미국 대통령의, 미국의 고유한 특권마냥 인식되어 왔다. 미국은 적어도 내 짧은 생각으로는 언제나 국제사회에서 ‘제멋대로’였다. 그리고 미국의 ‘상식’은 우리들의 ‘상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제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미 정치판에 트럼프가 등장한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어 백악관 입성을 눈앞에 둔 지금까지,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고 있다. 어떤 연예인도 부럽지 않은 인기(!)다.

하지만 이를 인기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를 지지하지 않은 미국인들은 물론, 세계 많은 이들이 두려움, 나아가 일종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 과연 트럼프 시대의 미국은, 세계는 어찌 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동안 그가 내뱉어 온 발언들과 행보를 보면 그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한마디로 그는 세계 최강의 철면피(Assholes)이기 때문이다.

▲ 애런 제임스 지음/홍지수 옮김, 『또라이 트럼프(Assholes : A Theory of Donald Trump)』, 한국경제신문, 2016. 9. [자료사진 - 통일뉴스]

UC 어바인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이른 바 철면피학(鐵面皮學)을 제시한 인물이다. 가면 갈수록 뻔뻔하고 야비하고 더럽게 저질인, 그야말로 철면피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평범한 우리들이 생존해 나가려면 어찌해야 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인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그 어떤 학문보다 중요하고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드라마 속 좀비마냥 늘어나는 철면피들 덕분에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일정하게 수명이 줄어들었다고, 슬프게도 확신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철면피에 대해 내린 정의는 다음과 같다. “대인관계에서 철저히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처신하면서 스스로에게 그럴 만한 권한과 자격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다른 사람이 불만을 표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주로 남성).”

그는 미국의 정치 및 자본주의가 어쩌면 이미 ‘철면피’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 것은 아닌가 우려하며, 이른 바 트럼프 현상을 계기로 미국의 정치와 자본주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새롭게 변화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참 지극한 애국자이심은 분명하겠다.

그가 말한 기준으로 살짝 우리나라를 살펴보자면, 우리는 그의 정의를 초월하는 철면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성평등은 기본이고, 그 스케일도 남다르다. 최순실 사태가 해를 넘겨 이 지랄들인데, 지금까지 진심으로 사죄하고 뉘우치는 인간들을 본 기억이 전무하다. 혹시 기억나는 철면피가 있다면 알려 달라.

이 와중에 새해를 맞아 많은 이들이 올 한 해를 ‘불확실성’이라는 키워드로 전망하고 있다. 글쎄, 언제는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이 있었나 싶지만 우리 주변의 굵직한 나라들의 이른 바 리더라는 작자들을 보면, 좀 심각해 보이긴 하다. 하지만 그 심각한 작자 중 우리의 대통령이란 인물 역시 만만치 않았음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강한 리더십’, ‘강한 지도자’라는 말들로 주변 강대국들의 정상들을 표현하는 것을 본다. 정말 그들이 강한가? 강하다는 것의 의미는 진정 무엇일까. 깡패처럼 지 맘대로 굴고, 이른 바 철면피의 극치를 보여주면, 그것이 강한 것인가? 그것이 강한 지도자인가? 트럼프와 푸틴과 시진핑과 아베가, 그리고 윗동네의 김정은이 과연 강한 지도자인가? 오히려 한없이 약한 이들은 아닐까? 그들은 민심을 헤아리지 않고, 혹은 민심을 헤아리는 척,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모리배들은 아닐까. 물론 시진핑이나 아베를 그런 지도자라 표현하면 분명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진정 강한 지도자인가 하는 물음에는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난 그렇다.

지난 해 우리가 분노한 것은 상식이 무너지고, 정의가 집에 가고, 양심이라는 것이 실종된 우리 사회의 거대한 적폐(이거 참 어려운 단어인데, 과연 누가 먼저 썼을까. 대통령은 어쩐지 아닌 것 같다.) 때문이 아니었나? 그 빌어먹을 것들이 결국 우리와 우리를 서로 갈라놓고, 빈부 간 격차를 더욱 서럽게 만들고, 죽어간 아이들의 눈물을 더럽혔기 때문이 아니었나? 더러워도 너무 더러웠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담 우리는 늦은 감이 있더라도 철면피학을 진지하게 공부해야 할지 모르겠다. 모든 대학의 필수 과목으로 선정하고, 저자를 모셔와 특강이라도 한 판 치러야 하겠다. 지랄 같은 인간들이 설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이 필요한지, 진지하게 필사적으로 공부해야 하지 않겠나. 더 이상 힐링이니 위로니 가식 떨지 말고 말이다.

그럼 이쯤에서 저자의 주장을 들어보자. 그는 “정치계에 철면피들이 들끓고, 물불 안 가리고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어내려는 자들이 대다수인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를 타고 트럼프와 크루즈가 등장한 지금, 공화국의 미래는 불투명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해결책도 마땅치 않다”고 인정한다. 그럼 어찌해야 하지? 그는 빤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위대한 남성이든 여성이든, 대단한 철면피든, 한 개인에게 희망을 걸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 타락하지 않도록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다잡고, 공화주의자로서 사회의 헐거워진 조직을 다시 촘촘히 엮어나가는 방법밖에 없다.”

다시 우리 사회를 보자. 누가 봐도 지금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지 않은 한 개인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수많은 이들을 농락했다. 대통령은 그럼에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은 지고지순한 애국자일 뿐이라며 오히려 촛불 시민들을 불순세력으로 몰아간다. 여기에 그를 따르는 참담한 이들의 집단행동이 활개 친다. 태극기와 함께, 다시 한 번 어처구니없게도 성조기가 나부낀다. 뼛속까지 박힌 사대주의, 이는 망국의 지름길일 뿐이다.

철면피들이 활개 치는 사회는 곧 또 다른 철면피들을 대량 양산할 수밖에 없다. 전혀 존경스럽지 않은 인간이, 돈과 권력을 쥐고 오히려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그와 같은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할 것이다. 나는 이 정도밖에 썩지 않았는데, 더 썩어버린 인간이 자신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 권력을 휘두른다면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때문에 우리는 이제 다시 품격의 귀환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상 천지에 철면피들이 가득하다 해도, 우리마저 동참할 순 없다. 강한 리더십이 단지 윽박지르고 폭력을 사용한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바른 삶, 바른 정치, 바른 사회 역시 아무런 노력 없이 이뤄질 수 없다. 때문에, 저자의 지극히 당연한 주장과 호소에 우리가 그럼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기실 세상 제일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린 이미 세상 불가능한 일들을 숱하게 현실로 만들어오지 않았나.

새해 큰 복을 많으시고, 또한 정말 사람다운 한 해를 보내시길 바란다. 아울러 부족한 글이지만, 올 해도 독자여러분들과 함께 울고 웃기를 바란다. 그저 감사하다.

“어쩌면 우리는, 아니 우리 자신만이 개혁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서로에 대한 모독과 경멸을 삼가자. 좀 더 너그럽고 품위 있게 말하고 행동하자. 서로를 존중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자. 서로 양보하자. 자기 의사를 분명히 하자. 투표권을 행사하자. 자기 혼자서 생각할 때도, 스스로 공공선을 실현할 것을 위임받은 의원처럼 행동하고 불편부당하게 판단하자.……어떤 점에서 서로 의견이 다른지 규명하고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는 어떤 진실이 담겨 있는지 헤아리고 공개적으로 인정하려고 애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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