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개국하기 전, 고려의 시대상은 어지러웠다.
불교의 폐단이 있었지만 백성들의 종교로 자리 잡은 상태에서 없애는 일은 불가능했다. 단지 사찰에 부여하던 각종 혜택을 줄이거나 없애는 방법으로 불교를 억압했고 사찰이나 귀족들에게 소속되어 농노(農奴)의 처지에 있던 농민들 해방시켜 땅을 주고 평민으로 만들었다.
정도전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고려의 병폐 중에 크게 두 가지 부분에 주목했다.
하나는 무신정권의 폐해이고 둘째는 상업의 발전이었다.
이 둘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고려는 알다시피 불교국가이면서 상업의 나라였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도 해상무역으로 돈을 번 가문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코리아, 코레라는 국명도 모두 고려의 무역에 의해 세계에 알려진 것이다.
정중부, 이의방, 최충헌으로 이어지는 무신정권은 가병(家兵), 사병(私兵) 기반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무력으로 나라를 통치했다. 전문군인과 군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들어간다. 수백에서 수천 명의 젊은 남자들을 무장하여 훈련시키며 먹여 살리기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이러한 재원을 충당한 자들이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이다. 상인들은 재물을 군부에 바치는 대신에 이권을 챙겼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고려 무신정권 시절에는 크고 작은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가을 추수기에 농민들은 신나서 타작을 하고 있는데 정작 비스듬히 누운 양반은 심드렁하다. 조선의 양반들은 쌀(재산)을 많이 보유하고 있어 봤자 소용없었다. [자료사진 - 심규섭]

점심을 먹는데 반찬이 별로 없다. 아마 간단한 짠지가 전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밥공기의 크기는 어마어마하다. 그야말로 밥으로 배를 채운 것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조선이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사회적 서열을 만든 데는 나름의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사(士)는 선비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철학, 인문학을 뜻한다. 주자성리학이라는 철학으로 나라를 통치한다는 의미이다. 동시에 군인이나 돈이 많은 상인이나 혈통중심의 귀족이 아니라 철학자가 나라는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농민을 다음 서열로 세운 것은 자급자족의 경제활동을 의미한다.
한반도는 산악이 70%를 차지하는 척박한 땅이다. 애당초 자급자족하기 어려웠다는 말이다.
아열대지역에서 풍부하게 자라는 쌀을 온대지역인 한반도에서 재배하여 백성을 먹여 살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은 탁월한 환곡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환곡은 그야말로 춘궁기 때 국가에서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이자를 붙여 되갚는 방식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 볼 때, 환곡은 갚지 않아도 되는 곡식이었다. 그러니까 조선은 환곡을 통해 백성들을 먹여 살린 것이다.
“숙종 10년(1678)의 상소에서 과거에는 부호들이 사채로 빌려주는 곡식이 마을마다 있었는데, 수십 년 이래로 지방관이 부호의 곡물을 강제로 빼앗아 굶주린 사람에게 강제로 나눠 주고 부호들이 돌려받으려고 하면 처벌했기 때문에, 부호들이 곡물을 늘리려고 하지 않아서 민간의 축적이 모두 탈진되고 오로지 국가의 곡식에만 의지하게 되었다고 개탄했다. (중략) 농민들이 가을에 추수한 곡식을 모두 소비하고 봄에 국가가 주는 환곡에 의지하려는 경향까지 나타났다. 숙종 30년(1448)에 나라에서 스스로 종자를 준비한 자를 조사했더니 양주군의 경우 노씨와 오씨 두 사람 60석에 불과했다." [대체로 무해한 조선사, 김재호]
“환곡 1000만석은 쌀로 환산하면 600만석 정도가 되는데, 중앙과 지방을 합한 1년 세입이 400만석 정도였으므로 조선은 국가재정보다 더 큰 규모의 곡물을 저장하고 있었던 셈이다. 같은 시기 1790년대의 중국의 경우에 상평창(常平倉), 의창, 사창(社倉)에 저장한 곡물이 쌀로 환산하여 2300만석이었다. 곡물의 총량은 중국이 더 컸지만 중국의 인구가 3억인 것에 비하여 당시 우리나라는 1600만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1인당으로 계산하면 중국의 5배나 되었다. 국가가 저장한 곡물 량으로는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이었음이 틀림없다.” [김재호,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조선은 엄청난 양의 환곡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러한 환곡은 대부분 양반이나 왕실에서 충당했다. 조선후기까지 양반 중에는 부자가 거의 없었던 이유였다. 이런 방식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의 지배층인 선비들이 ‘자발적 청빈’을 실천지침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工)은 생필품과 같은 물건을 만드는 장인을 뜻한다. 대표적인 직종으로 도자기, 대장간, 목수 따위가 있었다.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물건도 대부분 물물교환 형태로 거래되었다.
상(商)은 상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조선의 상은 철저히 관에 의해 통제되었다.
국가에 물건을 납품하는 시전이 정해져 있었고 금난전권이라는 특권을 주어 상인이나 상업이 난립하는 것을 막았다. 특히 국가 간 무역의 주 무대인 국경관리를 엄격히 하였고 중국의 사행길에 따라가는 상인들이 가져가고 오는 물품도 엄격하게 통제했다.
상업에 있어서는 거의 사회주의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선비들은 고려시대의 교훈을 통해 상업의 발전이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상업을 억제하고 농민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의 경제구조를 만들고자 했고, 근 500여 년간 발전시켰다. 조선말기 환곡제도를 비롯한 삼정(三政)이 문란해지면서 조선도 기울어간다.
엄격하게 관리되던 사회적 재부를 특정세력들이 사유화하고 독점하면서 국가체계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는 지금의 현실과도 다르지 않다.
백성들은 경제활동의 주축이다. 상업과 무역이 재부를 만들어내고 풍부하게 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경제적 재부는 백성들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특권층이 권력을 이용해 재부를 독점하고, 다시 돈을 이용해 권력을 갖는 모순이 해결되지 않으면 고려나 조선이 망한 절차를 그대로 따를 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