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하는 양대국에 인접한 일본은 자주 ‘평화 바보’라고 불리지만 나는 ‘냉전 바보’라고 생각한다. 일본만큼 냉전으로 어부지리를 얻은 나라는 없다. 한반도 특수나 베트남 특수로 일본 경제가 받은 ‘은혜’는 가늠할 수조차 없다. …… 이제껏 일본은 세계 최강국 미국의 핵우산 아래 편입되어 명확한 국익 의식조차 가지지 못한 채 주변 여러 국가를 보스(미국)의 눈을 통해 바라보던 습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적절하게도 독일의 콜 수상에게 ‘일본에게는 벗이라 부를 수 있는 나라가 없다’라는 말을 들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과연 일본은 다이내믹하게 변모하는 주변 여러 국가와 대등하게 직접적인 관계를 쌓아 갈 수 있을까?”

우리에겐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다. 하지만 과연 지금 일본에서 이렇게 스스로를 평가하고 발언할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이러한 균형 잡힌 의식으로 자국을 바라보고 사랑하고 보듬었던 이가 바로 요네하라 마리이다.

▲ 요네하라 마리, 『러시아 통신 - 유쾌한 지식여행자가 본 러시아의 겉과 속』 , 마음산책, 20011. 5. [자료사진 - 통일뉴스]

러시아어 동시통역사이자 작가였던 그녀는 생전 “유쾌하고 소소한 일상 속에서 진중하고도 묵직한 진실을 톺아보는 달변과 달필”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2006년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녀가 남긴 글들은 많은 이들에게 공감과 즐거움을 주고 있다. 물론 묵직함과 함께 말이다.

이른바 ‘요네하라풍’이라 할 수 있는 독특한 마력, 내공이 담겨져 있는 그녀의 책들은 대부분 국내에 소개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중 내게 첫 인연으로 다가온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문화탐색가라는 말이 너무도 어울리는 그녀. 그녀의 제2의 모국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유쾌한 재담 뒤에는 따스한 애정이 담겨져 있다. 이상적으로는 완벽하지만 현실 사회에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던 소비에트 체제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극도로 물질화, 황폐화되어 가고 있는 일본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까, 아니면 체제 붕괴 이후 급속도로 황폐화되어가고 있는(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의 러시아다. 지금도 어떤 측면에선 여전히 러시아는 무너지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낄낄거리며 웃다가도 순간순간 날카로운 그녀의 ‘눈’을 느낄 때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느끼게 된다. 그녀의 문장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힘을.

“어떠한 경제발전도 기술 혁신도 그 주체인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법”이라는 그녀의 목소리는 강하고 아름답다. 무거운 주제를 소소하고 유쾌하고 따스하게 풀어가는 힘. 그녀는 진정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터키 주재 러시아 대사가 그야말로 전 세계에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남긴 채 죽어갔다. 향후 터키와 러시아의 밀월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문득 러시아라는 국가에 대해 그동안 우리는 너무 안이하게 생각해 왔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미국에겐 끝없이 맹종하면서도 여타 강대국들은 우습게 보는 그 자신감은, 내가 보기엔 딱 꼬붕의 행태이다.

어찌되었든 요네하라와의 첫 데이트는 설렘과 기대로 가득했다. 그녀와의 즐겁고도, 중간 중간 필히 적바림해야 할 데이트는 언제나 유쾌하다. 진정 내가 만나고픈 여성의 매력을 소유한 그녀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