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학적 인간론’이란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이 그 어떤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닌 그저 ‘동물’임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수많은 동물 중 가장 뛰어난 생존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1991년에 구입한 책이니 2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글에 함께 담긴 표지는 2006년 판이다). 다시 책장을 넘기다가 페이지가 저절로 떨어져 나갈 만큼 오래된 책이다. 그 때문일까, 더 애착이 가고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라 슬쩍 웃음 짓기도 했다.

▲ 데즈먼드 모리스, 『털없는 원숭이 - 동물학적 인간론』, 문예춘추, 2006. 2. [자료사진 - 통일뉴스]

오래된 책이라 하더라도, 책에 담긴 내용까지 뒤떨어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책은 울림을 주고 그 울림은 적지 않다. 인간이 가진 오만함의 근원은 무엇인지, 왜 인간이 수많은 동물들과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순전히 ‘동물학적’ 차원에서 접근한 책은 자부심과 수치심, 겸손과 오만을 함께 전해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책은 인간의 기원부터 시작해 짝짓기, 기르기, 모험심, 싸움, 먹기, 몸 손질,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까지 인간의 동물적 특성이 현대 사회에 어떻게 남아있는지, 또한 어떻게 변형되어 왔는지 말해주고 있다.

인간은 다른 친척들, 그러니까 ‘털많은 원숭이’들처럼 영장류로 생존경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단순히 ‘영장류로 남을 것인가’하는 결단의 순간에 이르게 되고, 육식동물의 특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장류로 태어나 육식동물의 본성까지 얻게 된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허약한 체격과 ‘털 없음’의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었고, 두뇌의 발달이라는 행운 아닌 행운으로 마침내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방자함까지 가지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은 역시나 동물일 수밖에 없다. 동물로서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습성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 지금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동물이기에 어쩔 수 없는 본능. 우리는 그것을 용케 순화 내지 억제시키며, 오늘날까지 살아있다.

저자는 동물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다. 때론 복잡해지고 지루할 수도 있는 내용도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힘이 있다. 자칫 시니컬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내 입장에선 충분히 타당했다. 한마디로 내 맘에 들었다는 말씀. 중간 중간 맘에 드는 문장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도 나에겐 즐거움을 주었다.

“어떤 동물이 멸종하지 않으려면 동족을 멋대로 죽일 수는 없다. 동족상잔은 금지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먹이를 죽일 때 사용하는 무기가 더욱 강력해지고 잔인해질수록, 경쟁자인 동족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그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더욱 강력히 금지되어야 한다. 텃세권과 계급제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분쟁에 관한 한, 이것이 ‘정글의 법칙’이다. 이 법칙에 따르지 않은 동물은 오래 전에 멸종했다.”

“연애하는 남녀는 흔히 ‘유아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장차 부모가 될 예정이기 때문이 아니라 유아어가 짝에게 다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유아어는 모든 남녀가 갖고 있는 어머니나 아버지다운 보호 본능을 자극하여 공격적인 감정(또는 좀 더 무서운 감정)을 억눌러준다. 새들의 경우에는 이것이 짝에게 먹이를 갖다 주는 행동양식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 인간의 구애 단계에서 서로 음식을 먹여주는 행동이 놀랄 만큼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재미있다. 우리가 상대편의 입에 맛있는 음식을 넣어주거나 초콜릿을 선물하느라 그토록 애를 쓰는 것은 연애할 때뿐이다.”

“같은 종끼리 싸울 때 생물학적 차원에서 적절한 공격은 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복종시키는 것이다. 적은 궁지에 몰리면 달아나거나 복종하기 때문에, 생명을 파괴하는 마지막 단계는 오지 않는다. 도망치든 복종하든, 전투는 그것으로 끝나고 분쟁은 해결된다. 그러나 공격이 이루어지는 순간 두 경쟁자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승자가 패자의 복종 신호를 읽을 수 없는 때는 격렬한 공격이 계속된다. 원래 공격은 승자가 패자의 비굴한 복종의 몸짓을 직접 목격하거나 적이 꽁지 빠지게 도망쳐야만 멈출 수 있다. 오늘날처럼 공격 거리가 멀어지면 복종의 몸짓도 도망치는 모습도 볼 수 없고, 그 결과는 다른 어떤 동물한테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의 무차별 학살이 될 수밖에 없다.”

“동물을 사람과 비슷하게 만들고 싶은 우리의 욕망은 너무 강력해서 때로는 동물의 이빨을 희생해서라도 이 욕망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동물에 대한 이 같은 접근방식은 순전히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는 동물을 동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간주한다. 그 거울이 지나치게 일그러져 있으면, 우리는 거울을 구부려서라도 우리한테 편리한 모양으로 바꾸려고 애쓴다.”

이상의 글들에서 볼 수 있듯 인간은 동물적 본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이상의 잔혹함을 보여준다. 물론 연애할 때는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서로의 관심을 얻고자 아양을 떨지만, 사실 이도 지금은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지극히 불손하고 미안한 맘이지만, 인간은 참 아무리 봐도 재수 없는 구석이 있다.

여전히 인간의 진화론을 믿지 않는 이들이 많다. 물론 종교적 신앙을 무시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어찌 감히 인간을 동물과 같은 반열에 두고자 하는가! 하고 분노하시는 분들은 잘 생각하셔야 한다. 그 건방진 생각이 온 지구를 썩어 들어가게 만들었고, 수많은 동물들을 멸종으로 몰아갔으며,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선봉엔 언제나 종교라는 거룩함이 있었음을 말이다.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예수를 믿지 않아 불신지옥이 아니라, 예수님을 ‘잘못’ 믿어 지옥인 것이다. 주제 파악을 해야 하고, 스스로 우리가 원숭이임을 알아야 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193종의 원숭이와 유인원 중 우리가 가장 뛰어난 존재인 것은 맞지만, 이 지구상에서 가장 추악하고 위험한 원숭이라는 사실도 분명 자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시간의 문제일 뿐, 우리 역시 멸종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웅대한 사상과 오만한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 동물의 기본적 행동법칙에 모두 복종하는 겸손한 동물이다.… 흥미로운 동물들이 과거에 수없이 멸종했듯이,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조만간 우리는 사라질 테고, 다른 동물에게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려면, 우리는 자신을 생물학적 표본으로 철저히 인식하고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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