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지역을 무엇이라 지칭하느냐, 즉 어떻게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 이해관계가 달라진다. 서울이 대한민국에서 단지 수도라는 의미만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동북아 국가인지, 환태평양, 아태 국가인지, 그냥 넓게 동아시아 국가인지, 보다 더 넓게 아시아 국가인지. 어떤 식으로 이름을 붙이고 규정하느냐에 따라 이해관계와 정체성은 변하게 된다.

때문에 항상 나는 우리 언론의 행태에 분노하곤 했다. 북한이라니? 세상에 북한이란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정말 북이 민주주의 국가인지, 인민을 우선시하는 공화국인지는 그 다음 문제다. 우리가 우리 멋대로 상대 국가의 이름을 왜곡하여 부를 권리는 없다. 때문에 북 역시 우리를 ‘남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당치 않다. 대한민국이라 불러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고집스럽게 북을 ‘북한’이라 부른다. 이는 상대방을 온전한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나 다름없다. 유치하고, 경박한 냉전시대의 유물이다. 그러면서 무슨 상호존중이며, 화해 협력인가. 하긴 지금 북한을 북괴라 하지 않는 게 어딘가. 아니 조만간 그렇게 불릴지도 모르겠다. 무능력과 부패, 유치함이 만나면 어떤 해괴망측한 퍼포먼스들이 펼쳐지는지 우리는 적나라하게 목격하고 있다.

자, 그렇다면 이제 강남을 살펴보자. ‘한강의 남쪽’이라 강남이라는 소리는 이제 우습고, 강남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매우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 되었다. 선거 때마다 나오곤 하는 ‘강남3구’로 상징되는 극도의 이기주의, 혹은 보수성으로 인식되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이른 바 잘 사는 인간들이 모여 산다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물론 정말 잘 사는 부자들은 더 이상 강남에 살지 않지만 말이다.

또 한 편으로는 좋은 가정 배경, 화려한 이력, 높은 학력, 풍족한 경제력을 가졌으면서 동시에 진보적 정치 성향을 보여주는 이들을 이른 바 ‘강남 좌파’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럴 때 강남은 특정 지역을 뜻하기보다, 재력, 혹은 높은 학력을 의미할 것이다.

이처럼 강남은 대한민국에서 애증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강남을 저주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할까? 강남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젊은 세대들은 자신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지 않는 한 강남 형성사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다. 금수저, 벼락부자, 부모 잘 만나 호강하는 인간들이라는 이야기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나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조롱하면서도 부러워할 뿐이다.

▲ 황석영, 『강남몽』, 창비, 2010. 6. [자료가진 - 통일뉴스]

《강남몽》은 바로 이런 강남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삼풍백화점 붕괴라는 우리 현대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비극을 다시 호명하며, 그 곳에서부터 다시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현대사를 톺아본다.

강남의 역사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숨 쉴 틈조차 없이 빠르게 모든 것이 변해갔고, 그 사이에서 사람들 역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는 그야말로 일확천금의 행운을 맞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그 반대의 상황을 맞기도 했다. 법과 정의, 상식에 의한 변화보다는 부정, 야합, 독단과 부패가 더 어울리는 일들이 다반사로 이뤄지기도 했다.

어그러진 한국 현대사의 출발점은 일제 식민지 역사의 조악한 청산에서 시작된다. 단죄 받아 마땅한 이들이 거죽을 바꾸고 새롭게 태어났고, 역사의 올바른 흐름을 믿었던 이들은 하루아침에 몰락하거나, 혹은 생명을 잃기도 했다. 그 과정은 고스란히 기형적인 구조를 사회 내부에 만들어 냈으며, 결국 지금과 같이 부패한 물질 만능시대, 부패와 야합의 후진적 정치, 바른 역사의식과 정의의 실종 시대를 만들어 냈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른 바 ‘강남 불패’ 신화에서 더욱 굳어지게 된다. 하루에도 몇 배씩 뛰어오르는 땅값으로 평생 땀 흘려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큰돈을 챙겨가는 사람들. 그들은 높은 어르신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일반인들은 알 수조차 없는 정보들을 근거로 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부를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물려 줄 수 있었다.

때문에 강남은 오늘도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자, 애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집단 이기주의, 지역주의 등으로 포장한다 해도 결국 그것은 집단이 아닌 돈에 의해 굴러가는 시스템일 뿐이다. 조롱과 선망의 이유조차 돈이 좌우한다. 강남의 꿈은 어그러진 코리안 드림의 하나일 뿐이다.

작가는 책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어둡고도 가슴 뻐근했던 이야기들을 마치 한 나절 꿈처럼 풀어 놓는다. 그리고 그 안에 다양한 군상들이 꿈꾸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덤덤히 묻는다.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숨 가쁘게 살아왔을까.

책을 덮은 후 2016년 지금을 바라본다. 돈이면 무엇이든 합리화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세상에서 우리 시대 수많은 ‘정아’들은 오늘도 애써 미소를 지어가며, 끈질긴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그들의 삶이 비루하다고, 보잘 것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누구인가. 그야말로 비루한 삶을 살아온 이들은 정작 따로 있지 않을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우리 모두 한바탕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그 모두가 결코 온전히 비루하지만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위로하자. 다시 시작하기에 너무도 늦었고, 너무도 썩었다 해도, 적어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나.

강남의 꿈은 우리가 그럼에도 안고 가야 할 짐이다. 어그러진 시작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어긋나고 비루하리란 체념도 굳이 필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잊지 않는 것이리라.

개발독재의 시대 이후, 저자의 말대로 자본주의 스스로 재생산이 가능한 시기도 이제 지나가고 있다. 그 다음은 도대체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 역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 때는 부디.

강남 보다 더 아름다운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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