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회 국정감사에서 국방위원회는 예능인 김제동씨의 발언을 문제삼아 정치적 공간을 ‘정치적으로’소비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사드배치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던 김제동씨를 때리려는 것이거나 청와대의 하늘에 깃든 무속적 기운을 잠시 덮기 위한 행위라고 이해하는 것 같다. 김제동의 발언이 당시 부대 책임자들의 명예를 실추시켰는지 모르지만 나는 대한민국의 국격을 실추시켰던 야만적인 군사재판의 정리를 국방부와 국회에 촉구해야겠다.

나는 제주4.3사건의 군사재판에 주목해왔다. 제주4.3사건은 1947년 3.1절 행사에서 친일경찰의 살상행위에 분노하여 시작된 청년들의 봉기가 유감스럽게도 화해의 돌파구를 봉쇄당한 채 해를 거듭하면서 대학살로 귀결되었다. 제주4.3사건 과정에서 민간인에 대한 중요한 군사재판은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948년 계엄군법회의가 불법적인 계엄령(1948년 헌법에 의하면 계엄은 계엄법에 의거하여 선포되어야 하는데 당시에 계엄법은 제정되지 않았다) 아래서 제주도민 1천여명을 내란죄로 처벌하였고, 1949년에는 계엄도 없는 상태에서 고등군법회의가 제주도민 1600여명을 국방경비법 제32조(이적죄)와 제33조(간첩죄)로 처벌하였다.

이 두 번째 군법회의에서 345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형을 즉시 집행하였고, 나머지 사람들도 장단기 징역형에 처해졌으며, 이러한 수형자들은 대다수 한국전쟁중에 학살되었다. 제주4.3군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집이 <무덤에서 살아나온 4.3수형자들(역사비평사)>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사실 군사재판이라고 하면 전시상황이나 계엄상황에서 민간법정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에 설치될 수 있다. 이미 1948년 말에 계엄령이 해제되었으므로 1949년에 민간인을 군사법정에서 재판할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데 민간인에 대하여 군사재판을 강행하였다. 계엄을 해제하였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일반법원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여건을 전제하기 때문에 군법회의를 설치해야 할 어떠한 긴급성도 없는 것이다. 계엄이 해제된 이후에 새로이 군법회의를 설치하고 이 군법회의를 통해 민간인을 국방경비법으로 처벌하는 행위는 살인죄나 불법감금죄를 구성한다.

1949년도 제주4.3군사재판에서 더욱 중요한 쟁점은 국방경비법이다. 국방경비법은 미군 군정장관이 1948년 7월에 제정하여 한국정부가 1962년에 군형법으로 대체할 때까지 군사재판의 근거로 작동하였다. 그런데 이 법이 군정시대의 공식적인 관보에 게재된 적도 없기 때문에 유효한 법이라고 볼 수 있는 지가 문제되었다. 그런데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는 국방경비법이 유효하게 성립되었기 때문에 법담당자들이 유효한 법으로 알고 적용하지 않았겠느냐는 어설픈 논리를 사용하였다.1) 일부 사학자나 법학자들이 미국에서 발견한 자료들을 앞세워 법원의 판단을 강화시켜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방경비법이 공포되었다는 점을 증명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나는 국방경비법이 법이 되려면 관보게재 이외의 방식으로라도 반드시 공포되어야한다고 본다. 당시에 군정장관이 자신의 직권으로 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직권으로 공포한다’고 말해서 그 공포행위가 완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법제정이라는 제도적 행위는 권력자의 독백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수행자와 수용자간의 상호소통을 전제한 고도의 정치적 언어행위이다. 그래서 공포를 법의 요건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는 법의 내용이 정의로우냐 아니냐의 문제와는 다른 것이다.

법철학자 풀러에 따르면 공포는 적용자뿐만 아니라 수범자들이 법을 법으로 수용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풀러/박은정(역), <법의 도덕성>,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5). 의도적인 비밀지령이든 사무착오로 인한 공포누락이든 공포하지 않는 법은 법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나치의 비밀지령들이 법의 의미에 반하기 때문에 나치 청산과정에서 법으로서 효력을 부인당하게 된 것이다. 나는 사무착오라고 하더라도 국방경비법이 법적인 성격을 가지지 못한다고 본다.

나아가 국방경비법이 유효하게 공포되었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난관이 존재한다. 그 내용이 1948년 헌법에 위반된다는 점이다. 국방경비법은 유효하게 성립되었다고 하더라도 1948년 헌법을 기준으로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한다. 실제로 1949년에 대한민국 입법부가 직접 처음으로 성안한 법원조직법은 군법회의나 군사재판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나아가 국방경비법은 1948년 헌법의 심급구조나 사법절차와 전혀 양립하지 않기 때문에 내용상으로도 위헌적인 법률이다. 그런데도 이 법은 한국전쟁 내내 헌법이라는 장기판을 뛰쳐나온 말과 같이 외계법으로 작동하면서 살육의 도구가 되었다. 최근의 재심국면에서 이승만의 정적으로 알려진 최능진 선생이 국방경비법 위반 사건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국방경비법의 위헌성을 사실상 증명해주는 좋은 선례가 있다. 1952년 헌법위원회는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1950년 6월 25일>에 대해 원칙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특별조치령은 6.25전쟁중 특정한 범죄나 부역행위를 일반형사법정의 단독판사에게도 단심으로 사형까지 처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헌법위원회는 이 특조령이 ‘법률에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심판을 받을 권리’(헌법 제22조)와 대법원을 최종심으로 하는 삼심제원리(헌법 제76조 2항)를 침해하므로 위헌이라고 결정하였다(1952. 9. 9. 결정 4285년 헌위2.). 전쟁중에는 법이 침묵한다(inter arma silent leges)는 키케로의 말을 헌법위원회가 기각한 것이다.

현재 헌법재판소는 이 결정을 헌법재판소의 역사적 자부심으로 홈페이지에 게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헌법위원회의 결정을 무시하였고, 전쟁권력은 국방경비법으로 수 만 명의 민간인을 처벌하였다. 제주4.3사건과 관련하여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따라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사과하였고, 평화공원을 조성하였으나 제주4.3사건의 정명(定名)의 문제가 남아 있다. 기념관에는 백비(白碑)가 누워있고, 도처에 새겨진 희생자라는 말은 사건의 진상을 모호하게 한다.

나는 우선 군사재판과 관련해서 그들이 불법적으로 처형되었기 때문에 법적인 의미에서 완전한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국방경비법에 입각한 군사재판은 그 법이 정해놓은 기본적인 절차를 지키지도 않고, 변호인의 입회도 없었고, 예심조사도 없고, 판결문도 없이 관련자들을 처형하고 감옥에 보냈던 것이다. 1952년 헌법위원회의 통찰에 따라 제주4.3군사재판을 정리함으로써 폭력의 밑동을 정타해야 한다.

<각주>
 1) 법원 1999. 1. 26. 선고 98두16620 판결, 보안관찰처분 취소청구 사건; 1999. 2. 9. 선고 98두 17586 판결; 헌법재판소 2001. 4. 26. 98헌바79․86, 99헌바36(병합).

 

 

서울대법학박사

전 국민대, 전남대 교수
현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11년 <국가범죄>로 임종국상 수상

로베르토 웅거 <주체의 각성(2012)> 야스퍼스 <죄의 문제(2014)> 번역
국가폭력 및 인권문제에 관한 논문을 민주법학에 규칙적으로 투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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