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에 활약한 화원인 단원 김홍도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동년배기로 거의 비슷한 시기에 궁중화원이 되었고 김홍도와 쌍벽을 이룰 만큼 실력을 겸비한 이인문(李寅文, 1745~1824년 이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19세기에 활약한 유명한 정치인이자 문인인 신위(申緯, 1769~1847)는 이인문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선대의 임금을 모시던 화원 가운데 묘수로
그대와 늙은 단원을 꼽았더니
눈에 스쳐가는 아지랑이 구름인 양 단원은 보이지 않고
도인만 화실에 퍼질러 앉아 여전히 세상에 있네.

도인은 팔십 평생을 티끌 세상에 머물렀어도
늙은 솔 흐르는 물과 같이 몸을 잘도 키워왔구나
그림 속의 수척한 얼굴은 응당 자신을 그린 것이려니
저기 상대하는 이는 또 무엇 하는 사람일꼬.
(신위, 경수당전고)

신위의 ‘임금을 모시던 화원’란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보통 조선시대 화원은 도화서 화원과 궁중화원으로 구분한다. 도화서는 국가미술기관으로 예조 소속이면서 궁궐 밖에 있었다. 반면 자비대령화원은 왕의 직속기관인 규장각 소속으로 궁궐 안에 있었다.
도화서 화원 중에 특별히 뛰어난 화원을 선발하여 자비대령화원을 만든 것이다.
신위가 기록한 ‘임금을 모시던 화원’은 도화서 화원이 아니라 자비대령화원을 지칭하는 기록이다.
그러나 자비대령화원의 명단에는 정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당대 최고의 화원이었던 김홍도의 이름은 발견되지 않는다. 설령 이러저러한 이유로 공식적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더라도 그에 준하는 활동을 했다는 의미이다.
여러 정황상 김홍도와 이인문을 자비대령화원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팔십 평생’이라는 내용은 이인문이 김홍도 보다 20년 이상 더 살았다는 증언과 다름없다.

자비대령화원이었던 김홍도는 상당히 정치적인 미술활동과 작품을 남긴다.
김홍도가 그린 신선도와 불화 그림은 그 당시 이단으로 취급 받던 도교와 불교의 내용을 담은 것이다. 만약 중인신분이었던 김홍도가 독자적으로 그렸다면 선비들에게 맞아 죽었을 것이고, 그의 작품과 기록은 폐기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정조와 규장각 선비들의 정치적 입장을 바탕으로 사상적 홍보작업을 한 것으로 판단한다.

▲ 이인문/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856*43.8/비단에 담채/18세기/국립중앙박물관 [자료사진 - 심규섭]

이인문의 대표작품은 누가 뭐래도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이다.
이 작품은 일단 크기가 압도적이다. 가로의 길이가 856cm이다. 표구된 부분까지 합치면 어림 10m에 육박하는 대작인데, 이는 김홍도가 그린 [군선도, 132.8㎝, 가로 575.8㎝]와 비슷한 규모이다.
[강산무진도]라는 제목은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판단된다. 작품의 내용은 태평성대, 이상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제목 그대로는 ‘끝없이 펼쳐진 강산’이지만 강산(江山)을 세상으로, 무진(無盡)을 영원, 풍부함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당대의 이상세계를 표현한 작품은 특별한 정치성을 가진다. 모든 미술작품은 정치 지향성을 가지고 있지만 세상의 전모를 표현하는 것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조선 초기 안평대군의 꿈을 그림으로 표현한 안견의 [몽유도원도], 김홍도의 [삼공불환도], 궁중회화인 [십장생도]와 같은 수준의 작품인 것이다.

이 작품은 추사 김정희가 소장했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추사 김정희가 아주 아끼던 그림이었고 동시에 그의 사상이 시각적으로 녹아있는 그림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세계적인 학자이자 문인이었다.
‘실사에서 진리를 구하고 징험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實事求是無徵不信)’는 그의 학문 정신은 고증학의 높은 경지를 개척하여 청나라 사상계에서는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평가했다.
18세기는 조선중화사상이 완성되고 진경산수화와 같은 조선 특유의 예술문화가 발전한다. 그 당시 선비들은 조선의 인문학적 수준은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인문학적 수준에 비해 낙후된 선진 과학기술과 문물을 청나라를 통해 수용하고 내면화 시키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는 이러한 전환기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었다.

자비대령회원이었던 이인문은 정조와 규장각 관리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김홍도는 정조가 죽은 후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하지만 그나마 정조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이인문은 김홍도 보다 대략 20년 정도 더 살았는데, 정조 이후 새로운 정치적 흐름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추사 김정희와의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선비나 양반들을 위한 그림이다. 미술재료도 다섯 장의 큰 비단을 이어 붙여 수묵으로 그리고 엷은 채색을 했다.
이 그림이 어떤 연유로 그려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높은 관직을 가진 사람이 큰돈을 들여 이인문에게 주문한 것은 틀림없다.
이런 그림을 추사 김정희가 가지고 있었다면, 추사 김정희를 따르는 숱한 선비들이 감상하고 토론을 벌였을 것이다.

[강산무진도]는 김홍도의 [삼공불환도]와 종종 비견된다.
둘 다 이상세계를 표현한 대작이면서 동시에 백성과 선비들의 생활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김홍도의 [삼공불환도]는 진경산수화를 바탕으로 지극히 조선의 풍경과 인물을 그리고 있다. 이에 반해 [강산무진도]는 진경산수화와 남종화가 뒤섞여 있으며 건물이나 인물의 모습도 조선 풍경이나 조선인이라고 특정하기 어렵다.

▲ 강산무진도 부분, 고층건물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불탑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특별히 불교와의 연관성은 찾기 어렵다. 그냥 높고 큰 건물이라고 보는 타당하다. [자료사진 - 심규섭]

김홍도가 조선만의 이상세계를 그렸다면 이인문은 조선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이상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김홍도 그림에 표현된 이상세계는 큰 집이 중심이며 그야말로 엄격한 주자성리학적 예법과 선비의 자발적 청빈, 풍류를 중심으로 구현된다.
하지만 이인문은 강의 흐름을 중심으로 커다란 도성과 높은 건물, 발전된 항구도시라는 넓은 공간을 표현한다.
중심부에 표현된 산과 기암괴석은 신선세계의 느낌을 만들어낸다. 또한 수많은 소나무의 표현을 통해 세밀함을 높였고 골짜기마다 마을이나 높은 건물 사이에 생활하는 사람을 그려 넣어 현실감을 높이고 있다.
조금 특이한 표현을 소개하면, 이인문의 그림 속에는 서양의 빌딩처럼 기와집 형태의 고층건물이 그려져 있다. 고층건물은 발전된 도시나 풍요로움의 상징일 것이다.
또한 도르래를 이용하여 높은 곳으로 물건을 옮기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 표현된 도르래는 과학기술의 상징으로 보인다.
이런 표현은 개인적인 상상력의 결과라고 보기에는 이질적이다. 그림을 주문하는 사람의 의도가 반영되었거나 일종의 합의가 있었다고 추측한다.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전문성을 가진 중인의 정치적 성숙과 백성들의 욕망은 날로 높아졌으며 상업과 공업의 역할이 커지고 물질적 풍요에 대한 희망도 생겨났다.
선비들은 이단이었던 도교와 불교를 유학적으로 수용하여 이들의 욕망에 부응하고자 했고 밖으로는 새로운 과학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조선 고유의 문화를 창달한 선비들의 눈은 세계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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