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부산 동아중학교 3학년)
 

모든 것이 만주에서 시작되었고 만주에서 끝을 맺었다

▲ 지난 19~23일 끝없이 펼쳐진 만주벌판을 버스를 이용해 달렸다. 사진은 백두산에서 내려다본 숲의 바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우리가 여행을 떠난 곳은 중국 중에서도 동북3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지역이다. 대련을 시작으로 여순, 단동, 집안, 통화, 이도백하, 백두산, 용정, 화룡, 연길, 목단강에 이르는 이번 여행은 그야말로 남만주 지역을 횡단하는 대여정이었다.

우리 민족은 이곳을 만주땅, 그리운 만주벌판이라고 불러왔다. 바로 이 땅에서 단군이 조선을 세웠고,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것이다. 불과 백 년 전에는 독립군들이 일본 제국주의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모든 것이 만주에서 시작되었고 만주에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만주의 중요성은 오늘날 다시 부각되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옛 역사를 찾기 위해 만주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흘러간 역사를 통해 지금의 우리를 확인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격적인 얘기에 앞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을 해봐야 한다. 이것은 한민족만의 문제가 아니요, 일본과 중국 등 동아시아 모든 국가들이 가져야 할 고민인 것이다. 현재 동아시아는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다. 그 분쟁은 단순한 영토분쟁이 아니라 역사분쟁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선 서로의 이해관계도 중요하지만 역사에 대한 반성과 이해가 더더욱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는 전혀 이러한 노력을 하고 있지 않다. 일본은 걸핏하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교과서를 왜곡한다. 중국은 동북공정, 서남공정, 서북공정 등 소수민족 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역사의식은 매우 형편없는 수준이다.

자기네 역사를 기피하는 민족은 영원히 그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고로, 동아시아 3국(한ㆍ중ㆍ일)이 진정한 이웃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이러한 역사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첫날, 두 가지 분노를 느끼다

▲ 19일 대련에 도착한 기행단은 여순감옥을 첫 행선지로 택했다. 4박 5일동안 우리 일행을 안내해 준 이경옥 선생이 안중근 의사가 갇혀있던 독방을 가리키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우리가 처음 향한 곳은 여순감옥이었다. 여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 이회영 선생, 신채호 선생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수많은 항일투사들이 돌아가셨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관동법원에서 재판을 받으면서도 항상 떳떳했다. “나는 한 개인의 자격으로 이등박문을 쏜 것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적국의 수상을 암살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테러범이 아닌 만국공법상의 전쟁포로로 대해져야 한다.” 안중근은 죽는 그 순간까지 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 안중근은 개인의 자격이 아닌 대한 독립군의 자격으로 전쟁을 한 것이다. 안중근의 재판을 지켜보던 기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안중근의 논리 정연한 언변에 이등박문이 한낱 파렴치한 늙은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 여순감옥은 안중근 의사의 감옥생활과 순국 장면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안중근이 감옥에서 집필하다가 빠른 사형집행으로 마저 쓰지 못한 <동양평화론>이란 책이 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서 동아시아의 평화, 한-중-일이 진정한 이웃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나는 이 서슬퍼런 여순감옥의 창살을 어루만지며 이제는 우리가, 그의 뜻을 이어가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순감옥에서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우리는 일본관동법원으로 향했다. 바로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은 역사적인 현장인 것이다.

일본은 만주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집요한 노력을 해왔다. 가장 먼저 한 것이 역사연구. 일본은 전문가들을 보내 이 지역의 역사를 철저히 연구했다. 그들이 주목했던 것은 발해사. 발해가 가장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유적은 물론이요, 수많은 유적을 답사했다.

우리는 기억한다. 일본이 조선을 병탄할 때, 조선과 일본은 하나이기 때문에 합쳐져야 한다는 내선일체론을 말이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할 때에도 똑같은 방법을 썼다. 그것이 바로 만선사관(滿鮮史觀)이다. 만주와 조선은 하나의 역사공동체라는 것이다. 물론 만주와 조선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이지만 그것이 침략의 용도로 쓰였다는 점에서 일본의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철저한 역사연구를 마친 뒤 만주를 침략한다. 만선사관을 내세우면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만주사변’ 혹은 ‘9.18사변’이다. 아직도 만주는 이 비극을 기억하기 위해 9월 18일 9시 18분이 되면 사이렌을 울린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초콜릿을 사먹으면서 연인들에게 고백하는 그 밸런타인데이가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밸런타인데이는 기억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망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대중의 자각이 절실히 필요하다.

첫날부터 나는 두 가지 분노를 느꼈다. 첫째는 일제의 만행에 대한 뼈저린 분노였으며 둘째는 한국의 무지와 망각에 대한 분노였다. 나는 이 두 가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는 한 동아시아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주의 해는 빨리 졌다. 나는 분노를 삭이며 잠에 들었다.

“태왕 할아버지, 평안하십니까?”

▲ 광개토호태왕비. 4면이 유리로 둘러쌓여 있고, 내부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고구려 환도산성에서 기행단이 포즈를 취했다. [사진제공 - 박종만]

우리가 둘째날 향한 곳은 고구려 유적지였다. 환도산성, 광개토태왕비, 태왕릉, 장군총을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환도산성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의 방어성이다. 평소에는 국내성에 머무르다가 국가적 위기가 생기면 환도산성으로 가서 항전하는 것이다. 환도산성(丸都山城)은 ‘알맹이도시’라는 뜻이다. 풀어 해석하면 중심도시, 그야말로 환도산성은 고구려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딘 채 환도산성은 견고히 남아 있었다. 구불구불한 산등성이를 따라 환도산성의 성벽이 줄을 이었다. 나는 산성의 성돌 하나하나를 소중히 살폈다. 고국원왕의 원한이 내 몸 속으로 밀려드는 듯했다.

솔직히 나는 환도산성 아래 산성하 고분군을 기대했으나 공사가 한창이어서 들어가보지 못했다. 환도산성을 포함한 집안 지역의 고구려 유적지들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광개토태왕비는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령스러운 비석이다. 414년에 세워졌으니까 1600년 동안 부서지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있는 것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우리의 민족성과 어찌 이리 닮았을꼬.

▲ 장군총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사진제공 - 박종만]
▲ 태왕릉은 많이 훼손됐지만 위엄은 여전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태왕비에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태왕의 무덤인 태왕릉이 있다. 시간이 흘러감에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태왕릉의 위엄은 여전했다. 한 변이 66m에 달하니 과연 광개토태왕의 무덤다웠다. 나는 태왕릉의 돌방 앞에서 말했다. “태왕 할아버지, 평안하십니까?” 그리고 조용히 돌아섰다.

장군총의 주인에 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장수왕의 무덤이라는 설, 시조묘라는 설, 고국원왕의 무덤이라는 설 등 다양한 설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다. 장군총의 무덤이 정확히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구려의 신령스러운 곳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고구려 무덤 중 가장 잘 보존이 되어있는 장군총. 그만큼 공들여 쌓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나마 외침을 덜 받은 것일까?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장군총이 기리기리 보존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민족통일의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 나는 부디 천지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산신령께 빌었다. 전날까지 내리던 비가 그쳐 백두산 천지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높였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셋째날이 밝았다. 우리는 드디어 여행의 궁극적 목표, 백두산으로 향하게 되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으로 향하는 것이다.

환웅이 내려왔다는 태백산이 바로 백두산일까? 단군과 백두산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 백두산에 호랑이가 살까? 나는 상상력을 발휘해가며 백두산의 모습을 상상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백두산의 천지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부디 천지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산신령께 빌었다.

굽이굽이 길을 봉고차로 올라가는데 그 밑으로 펼쳐지는 절경은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 짙은 안개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내심 천지를 못 볼까봐 마음을 졸였다. 그러나 우리가 올라가니 안개가 걷히는 것이 아닌가!

▲ 천지를 보는 순간 나는 3일 간의 여정으로 인한 피로가 모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사진 - 이재원]
▲ 장엄한 백두산을 배경으로 장백폭포가 흰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다. [사진 - 이재원]

천지를 보는 순간 나는 3일 간의 여정으로 인한 피로가 모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또 다른 세계였다. 천지는 어머니같은 존재였고, 우주였고, 만물의 근원이었다.

천지 물이 유일하게 흘러들어가는 곳이 장백폭포다. 그 장백폭포가 흘러 흘러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 강들이 또 서해바다, 동해바다, 오호츠크 해로 흘러갈 것이다.

우리네 마음도 저 천지로부터 흘러내려오는 강물처럼 변치 않고 흘러가면 좋을 텐데……. 백두산은 말하고 있었다. 민족통일의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저 선 만 넘으면 바로 북한 땅인데

▲ 용정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는 잘 복원돼 관람객들을 맞고 있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어머님,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두만강을 건너면 윤동주가 그리워했던 북간도가 나온다. 다른 이들에게 두만강은 그저 보통의 강일 수 있겠지만 우리 민족에겐 슬픔과 애환이 섞인 역사적인 강이다. 우리는 그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만강 다리는 주황색 부분과 파란색 부분이 있는데, 주황색 부분은 중국 땅이고 파란 색 부분은 북한 땅이라고 한다. 국경이라는 것이 이렇게 우습던 것이었나? 고작 선 몇 개 긋고 국경선이라고 적어 놓은 걸 국경이라고 하다니……. 저 선 만 넘으면 바로 북한 땅인데. 나는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도문대교가 가로놓여 있다. 왼쪽 주황색 부분은 중국 도문시에 속하고 먼쪽 파란색 부분은 북한 남양시에 속한다. 오른쪽 두 번째가 필자. [자료사진 - 통일뉴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참 맑았다.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말한다. “안중근 의사는 아직 춤추며 노래 부르지 않으셨다. 민족통일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대한독립을 이루는 길이다.”

4박 5일 백두산 평화기행은 나에겐 매우 큰 경험이 되었다. 그것은 인식의 변화, 사물을 바라보는 눈의 변화였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고구려의 기상과 자부심, 독립전쟁사의 위대함과 참혹함, 민족통일에 대한 염원, 민족의 의미 등 다양한 것들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알찬 여행이었다.

여행은 여행을 떠나기 전의 준비과정과 여행, 그리고 여행이 끝난 후 정리하는 모든 과정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도 여행의 한부분이다.

내일의 하늘은 오늘의 하늘보다는 더욱 화창하기를

▲ 용정 시내에 자리한 간도일본총영사관 옛터. 지금은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간도일본총영사관 옛터의 지하고문실. 당시의 상태를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동아시아의 평화는 우리가 반드시 이뤄야 할 숙제이다. 갈등과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모색할 때인 것이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서 한-중-일의 역사의식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한-중-일은 공동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패권주의를 버리고 대국이면 대국처럼 행동해야 한다. 더 이상 동북공정 같은 유치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은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진정어린 속죄를 해야 한다. 이것은 역사적인 문제 이전에 인간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철저한 역사교육을 통해 역사의식을 고취시켜야 한다. 이것은 국수주의가 아니다. 우리의 생존과 동아시아 평화가 달린 문제이다.(한국은 동아시아평화의 중요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 남북통일이 동아시아 평회에 지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부디 동아시아에 하루빨리 평화가 오기를 바란다. 내일의 하늘은 오늘의 하늘보다는 더욱 화창하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동아시아의 상생을 꿈꾸며 2016. 8. 25

* 여행을 함께한 분들, 그리고 저를 믿어준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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