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그림을 배우는 중학교 꼬맹이 둘과 국립중앙박물관을 갔다.
연일 기록을 갈아치우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그래도 방학 특강으로 준비한 나들이를 포기할 순 없었다. 시원한 전철로 이동해, 시원한 박물관에서 좋은 그림을 감상하는 호사가 어디 있을까하는 생각도 있고.

▲ 국립중앙박물관 전경-청자기법으로 만든 기와를 얻어 지었다는 청와정자에 앉아 연못을 보고 있으면 세상 부러운 것이 없어진다. [사진 - 심규섭]

박물관에는 예상대로 아이들과 부모들로 넘쳐났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자했던 조선시대 서화관은 한산했다. 아이들에게 그림에 대해 설명을 해 준다. 이런 설명이 귀에 쏙쏙 들어올 리가 없을 것이다. 어렵기도 하고 정서에 잘 맞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설명을 했다. 그저 아이들에게 작은 씨앗이라도 하나 남길 수 있다면 만족할 터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은 조금씩 바뀐다. 작년에 왔을 때 걸렸던 [책가도] 대신에 작은 책거리그림 병풍이 걸려있다.
재수가 좋았는지 김명국의 [달마도]가 걸려있다.
김명국은 조선 후기 17세기 화가로 조선보다 일본인들이 더 좋아하는 화원이다. 실제 두 차례 정도 조선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기록에 의하면 김명국이 온다는 소식에 그림 한 점이라도 얻으려는 일본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밀려드는 주문을 이기지 못해 주저앉아 울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아무튼 김명국의 그림은 대중적인 선종불교가 유행했던 일본인들의 정서를 건드린 것은 확실하다.

▲ 1

그의 그림은 태작과 걸작이 공존하는데 일설에 따르면 술을 먹고 취한 상태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취기가 모자라면 붓질이 머뭇거리고, 너무 취하면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즉흥적인 붓놀림을 이용한 선화(禪畵)에 일가견이 있었던 김명국은 적절한 취기가 올라 붓을 잡았을 때 명작이 탄생한다.
이렇게 탄생한 그림이 김명국의 대표작인 [달마도]이다.
실제 술을 먹고 이 그림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실적인 묘사가 아니라 몇 번의 붓질과 빠른 시간에 인물의 특징을 간결하게 잡아내는 능력이 일품이란 평가를 받는다.

[달마도]는 선종 불교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그림이다.
그래서인지 조선의 선비들은 김명국의 불교그림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조선의 선비들은 불교나 도교를 이단이라고 여겼지만 백성들이 일상생활에 수용하는 것까지 는 배척하지는 않았다. 조선 초기에는 숭유억불정책을 폈지만 사찰이 가지고 있는 재력과 인재, 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사찰에서는 집을 짓는 기술과 능력, 종이에 붓, 벼루 같은 각종 문방구를 만드는 기슬, 가구나 의복과 같은 생활용품, 수레나 물건 따위를 만드는 기술과 경험을 축적하고 있었다. 또한 인재들을 양성하는 교육체계를 갖추고 있었기에 왕실도 이들의 능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전쟁을 치르고 난후 인조반정을 통해 주자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들이 대거 중앙관료로 진출함에 따라 불교도 쇠퇴한다. 전란을 통해 큰 사찰이 불타고 재력을 잃었다. 또한 선비들도 교육기관인 서원을 통해 인재를 양성했다. 무엇보다 불교에 대한 지속적인 압박에 의해 승려의 신분이 불안정해지고 도성 안에 있던 사찰도 밖으로 쫓겨 나가게 된다.

▲ 김홍도가 그린 염불서승도와 남해관음도이다. 수행하는 승의 뒷모습은 마치 공부하는 선비와 다르지 않다. 또한 구름 위에 앉아있는 모습은 신선의 특성이다. 선비와 신선, 승을 연결시키는 김홍도의 의지가 엿보인다. [자료사진 - 심규섭]

조선의 불교는 살아남아야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학의 요소를 수용하여 성리학과 타협하였다. 유학의 제사를 수용하였고 불상의 모습도 공부하는 선비의 모습을 닮아갔다. 가끔 돌아가신 성철스님의 삶에서 고고한 선비의 모습이나 정신세계가 느껴졌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정조는 불교를 정치적으로 활용한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명복을 빈다는 빌미로 용주사를 창건하고 후불탱화를 그리는데 이를 이명기, 김홍도가 주관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정조의 화가로 평가받는 김홍도는 늦은 나이에도 자식이 없자 많은 돈을 사찰에 시주하고 치성을 드려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동시에 보살, 관음상이나 수행하는 승(僧)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린다.
김홍도의 불교그림은 신선도와 혼재되어 있다. 그림으로만 연관 짓자면, 선비--신선, 신선--수행하는 승으로 연결되고 결국 수행하는 중이 곧 선비라는 등식이 만들어진다.
이런 등식이 억지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조선시대 승과 선비와의 거리가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것은 확실하다.

세상의 모든 번뇌와 고뇌로 가득 찬 얼굴표정의 달마도는 결코 밝지 않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고뇌를 함께 나누고자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슬픔을 통해 희망을 전하듯이, 달마도는 고뇌를 통해 자비와 해탈을 보여준다.
이랬던 [달마도]는 어느 샌가 행운과 재물과 출세를 보장한다는 부적이 되었다. 인문학적인 가치는 사라지고 구복과 돈벌이의 얼굴이 된 것이다.

박물관 구내식당에는 점심을 먹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붐볐다. 평소 날씨 같았으면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해 경치 좋은 밖에서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밖은 35도가 넘는 불볕이다.
한참이나 줄을 서고 난후 허겁지겁 점심을 먹었다.
꼬맹이들에게 그림을 본 감상을 억지로 묻지 않았다. 어차피 별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정해진 대답을 성의 없이 했거나.
한참 생각을 하다가 이런 말을 꺼냈다.

“모든 사람은 공주나 왕자같이 소중한 존재가 되고자 한다. 왕자나 공주가 사는 궁궐은 언제나 최고의 보물이나 예술품이 넘쳐나는 곳이다. 그래서 최고급의 가치를 어릴 적부터 보고 경험하면서 자란다.
왕족 중에도 예술과 철학에 뛰어난 사람이 왕이 되면 태평성대가 오고 칼과 폭력을 쓰고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이 왕이 되면 폭군이나 독재가 된다.

고급문화와 싸구려 문화의 차이는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철학과 가치를 담고 있느냐 아니냐이다.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옛날 왕자나 공주가 먹던 음식과 옷을 입고 좋은 의료혜택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하다. 내면의 삶이 왕자, 공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거지는 당장 먹을 것과 편안한 잠자리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왕은 나라와 백성을 걱정한다. 왕의 옷을 입고 거지와 같은 생각을 하면 거지와 다르지 않다. 비록 거지 옷을 입었지만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망치는 사람은 좀도둑이나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는 백성들이 아니다.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면서 고급차를 타고 비싼 옷을 입고 다니지만 정작 머릿속에는 천박한 지식과 싸구려 문화를 향유하는 거지같은 사람들이다.”

이 말도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너희들이 오늘 본 그림은 평균 수억이 넘는 보물들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길거리에 던져 놓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쓰레기 취급을 할 것이다. 보물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냥 쓰레기에 불과하다. 진귀한 보물을 가지고 싶거든 보물이 어떻게 생기고 어떤 모양을 하고 있으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싸구려일수록 화려한 색과 요란한 모양으로 위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 속아 가짜를 진짜라고 믿으며 속아 살아간다.
잘 살고 싶으면 보석과 돌맹이를 구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이 더운 날 공부를 하는 이유이다.”

나는 이 땅의 백성들이 최고급의 문화를 향유했으면 좋겠다. 비록 돈이 없어 외식을 못하고 좋은 옷을 입지 못한다하더라도 공동체를 위한 가치가 담겨있는 예술을 즐겼으면 한다.
꼬맹이들의 부모는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다. 아이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손들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돈과 물건들을 아껴 쓰는 자린고비 생활을 할지라도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세종이나 정조의 심장과 눈물을 가졌으면 한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