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목사 / NK VISION 2020 대표

 

65회부터는 남측교회와 해외교회가 주도해 북측 영토에 교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건축사업이 중단된 이야기들을 소개하며 그 원인을 통해 합의점을 찾고자 한다. 이중에는 ‘평양조용기심장전문병원’ 내에 마련될 30평 규모의 ‘병원교회’와 평양 대동강변 IT단지에 설립될 ‘평양국제하베스트교회’, 예장 합동측의 ‘평양장대현교회’ 등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현재 추진 중인 미국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의 주도로 지어질 ‘평양국제외국인교회’도 다룰 것이며 평양 조선영화촬영소 산속에 지어진 ‘형제산교회당’과 거기 딸린 목사관을 방문한 이야기를 전할 것이며 한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분류된 ‘통일교’가 평양보통강호텔 앞에 설립한 ‘국제평화센터’와 평화자동차 공장 방문 이야기를 다룰 것이다. /필자 주

 

예장 합동 측의 ‘평양장대현교회’복원 건축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교단과 함께 한국 개신교에서 쌍벽을 이루는 양대 산맥이다. 이 두 교단은 평소에도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교세경쟁을 벌였는데 북에 교회를 설립하는 대북사역에 있어서도 서로 경쟁적인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에는 예장 합동 측이 평양에 교회를 설립하려다 실패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예장 합동 총회임원들과 ‘총회남북교회교류협력위원회(총회남북교류위)’가 지금부터 10년 전인 2005년 11월 11-17일까지 방북단을 구성해 평양의 ‘봉수 빵 공장’을 방문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들은 방북기간에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위원장 강영섭 목사를 만나 2007년에 개최할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기념 프로젝트 중 하나인 ‘평양장대현교회’복원에 대해 설명하면서 북측이 동의와 승인을 해 줄 것을 구두와 서면으로 요청했다. 이날 핵심 실무자였던 합동 총회 총무인 이재영 목사는 강영섭 목사 일행과 만난 자리에서 ‘평양장대현교회’복원에 대한 임원회 결의 사항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하자 뜻밖에도 북측 강 목사는 “장대현교회가 있던 곳에는 현재 인민대학습당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옛 장대현교회를 복원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인근 부지에 세우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라며 긍정적으로 답변하면서 북측의 긍정적인 검토가 시작됐다.
    
강 목사는 그 자리에서 교회 복원 건축뿐만 아니라 인민병원도 함께 설립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심지어 콩기름과 방한복 등을 지원해 줄 것도 남측 방북단에 요청하기까지 했다. 당시 남측 방북단 구성원은 예장 합동 총회장 황승기 목사, 총무 이재영 목사 등 총회임원들과 박계윤 장로가 위원장으로 있는 ‘총회남북교회교류협력위원회’가 함께 참여했다. 남측의 예장 합동 대표단이 이날 북 조그련 위원장 측을 만나 협상한 것을 계기로 이때부터 ‘평양장대현교회’복원 건축 추진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들 대표단은 본국으로 돌아가 2006년 2월 3일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총회임원과 각 노회장, 기관장 등 교단인사 300여명이 모여 ‘평양 대부흥 100주년 기념사업 비전 선포식 및 지도자 세미나’를 갖는 자리에서 이 같은 방북 결과를 공개했고 교회 복원 설립 프로젝트를 교단차원에서 적극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이날 총회임원들과 총회남북교류위의 설명을 들은 참석자들은 해방 전 평양대부흥 운동이 시작된 발원지인 장대현교회당을 복원하는 것은 교회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며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20여억 원의 재정을 들여 설립할 것을 협의하며 본격화됐다.
 

▲ 1907년 당시 평양 장대재에 있던 장대현교회당 모습. [사진제공 - 최재영]

 

▲ 인민대학습당 전경. 북 조그련 측에서는 장대현교회가 인민대학습당 부근이라고 언급했으나 필자가 확인한 결과 그곳은 남산현감리교회가 있던 자리였다. 장대현교회는 실제  만수대언덕 인근에 있던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제공 - 최재영]

 

▲ 인민대학습당 발코니에서 내려다본 김일성광장 전경. [사진제공 - 최재영]

 

▲ 해방 전 장대현교회와 창동교회가 있던 곳은 현재 두 지도자의 동상과 만수대의사당이   있는 만수대언덕 부근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조그련 측은 ‘장대현봉사센터’로 명칭과 용도 변경을 요청하다
     
예장 합동 총회 이재영 총무와 최병용 서기 등은 대전에서의 선포식을 마친 사흘 후인 2006년 2월 7일 중국 북경에 도착해 조그련 강영섭 위원장을 만나 장대현교회 복원 공사에 대한 구체적 협상에 들어갔다. 이튿날인 8일 정오에는 북측이 운영하는 식당인 ‘은반관’에서 강영섭 위원장과 이정로 국제부장, 김현철 전도사 등 북측 대표단과 만나 연속 협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그련 측은 “장대현교회당이 있었던 원래 부지 근처에도 현재 대형 공공건물이 들어서 있어 짓기가 불가능하고 그 대신 상징적인 의미로 현재 칠골교회당 맞은편에 연건평 1만 2000평 규모의 부지가 있는데 그곳에 ‘장대현봉사센터’라는 이름의 복합건물을 건립합시다”라는 안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강 위원장 측이 준비해온 제시안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4-5층 규모의 사회봉사센터를 짓되 1층에는 장대현기념교회당과 수영장이 동시에 들어서고, 2-3층에는 기념관과 복지시설을 건립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조그련 측은 단지 교회당뿐만 아니라 평양시민을 위해  봉사기관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종교적인 색채만 짙은 것보다는 의료복지 등이 들어서는 복합건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이로서 예장 합동 측이 결정해 내놓은 장대현교회 복원 건축 프로젝트는 ‘장대현봉사센터’로 변경되어 대체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한편, 예장 합동 측이 장대현교회 건축을 조그련 측에 요청할 무렵에는 조그련 측이 정신없이 분주하던 상황이었다. 당시 예장 통합 측에서는 ‘평양봉수교회’재건축과 ‘평양 제1교회’신축, 그리고 ‘평양 제1온실’과 ‘제2온실’건축, ‘평양신학원’신축 등 엄청난 종류의 건축 프로젝트를 꼼꼼하게 성사시키던 시기였으며 남측의 감리교단에서도 평양신학원 운영을 책임지기 위해 조그련 측과 추진하던 시기였다. 그런 복잡한 상황에서 예장 합동 측마저 가세해 ‘평양장대현교회’를 복원한다며 서두르는 모습을 보니 벌여놓은 사업이 많았던 조그련의 입장에서 볼 때 교통정리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러다간 평양시내 한복판에 남측에서 세운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 세워질 판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북경에서의 협상을 마친 강영섭 목사는 북경 일정을 마치고 2월 11일 세계교회협의회(WCC) 제9차 총회가 열리는 브라질로 이동했고 회의 참석 일정을 마치면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예장 합동 측 대표단을 다시 만나 협상을 마무리하기로 하고 양측은 헤어졌다. 북경에서 조그련이 요청한 요구사항을 접수한 예장 합동 측 대표단은 ‘장대현봉사센터’건립 예산에 애초보다 더 많은 액수인 30억원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총회 산하 전국 교회가 모금에 동참하도록 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귀국 직후인 2월 20일 총회 임원회에 이 같은 협상 결과를 보고했다. 임원회의 보고 후 회의 결과에 따라 다시 2월 25일 북경에서 조그련 측과 만나 완전한 매듭을 짓기로 했다. 이런 와중에도 예장 합동 교단은 평양봉수교회 부설 ‘봉수 빵공장’을 비롯해 콩기름을 지원하는 사업 등을 계속 지원했다.
 

▲ 북을 방문한 합동 측 대표단이 칠골교회 앞에서 기념 촬영한 모습. 좌에서 세 번째가 합동 교단 이재영 총무. [사진제공 - 최재영]

 

▲ 북측이 직영하는 북경의 ‘은반관’식당에 모인 양측 대표단. 좌부터 예장 합동 이재영 총무, 장차남 부총회장, 조그련 강영섭 목사, 황승기 총회장, 김원삼 기독신문사장. [사진제공 - 최재영]

 

▲ 조그련 강영섭 위원장(중)과 함께한 예장 합동 측 이재영 총무(좌)와 최병용 서기(우). [사진제공 - 최재영]


‘장대현봉사센터’제안을 수용하기로 결의하다
     
한편 황승기 목사가 위원장으로 있는 예장 합동 총회정책실행위원회는 2월 20일 총회회관 대회의실에서 제90회기 제1차 회의를 열고 북측의 요구대로 ‘장대현봉사센터’를 추진키로 결의했다. 이날 회의에서 실행위원들은 총회 서기 최병용 목사와 총무 이재영 목사로부터 “현재 북측에는 칠골교회와 봉수교회가 있는 관계로 독자적인 장대현교회 설립은 어렵다는 것이 북 조그련 측의 입장이다”라는 보고를 받기에 이르렀고 ‘평양장대현교회 복원사업’을 ‘장대현봉사센터 건립사업’으로 변경해 달라는 북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이제 교회 복원사업은 봉사센터 건립사업으로 그 영역이 더 확대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건립사업 명칭은 북측의 요청을 약간 변경해 ‘교회’라는 단어를 집어넣어 ‘장대현교회봉사센터’로 하자는 내용을 조그련 측에 통보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해방 전 장대현교회가 있던 자리에 현재 다른 대형 건축물들이 들어선 상태여서 복원위치를 놓고 적지 않게 고심을 해왔던 합동 총회 측은 차라리 조그련 측 제안대로 봉사센터 위치가 칠골교회 맞은편으로 결정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게 됐다. 또한 북측이 그곳 외에도 봉사센터의 위치를 평양 순안공항에서 평양시로 들어오는 관문지역에 세우는 것도 물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오히려 상징적인 측면에서 더욱 의미가 있을 것으로 파악돼 총회임원들은 모두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될 경우 과거 장대현교회 터전 위치를 고집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봉수교회와 평양신학원 그리고 칠골교회 등 평양의 핵심 종교시설물들과 불과 1km 안팎에 자리하게 돼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 것이다. 이날 회의에서 실행위원들은 이념과 사상을 떠나 봉사센터 건립은 매우 바람직하다는데 의견과 인식을 같이하고 총회 산하 전국 교회가 적극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교회’명칭을 넣는 문제로 난항을 겪다
      
한편, 예정대로 예장 합동 총회 황승기 총회장, 이재영 총무, 장차남 부총회장, 김원삼 기독신문사장 등 예장 합동 총회 관계자들은 2월 25일 북경에서 조그련 위원장 일행을  다시 만나 협상에 들어갔다. WCC 총회에 참석하고 브라질에서 돌아온 강영섭 위원장은 협상단원으로 조그련 이정근 서기, 김현철 위원 등과 북측 협상단을 구성해서 테이블에 나왔다. 이들 양측은 이번에도 북측이 운영하는 식당 ‘은반관’에서 만나 심도 있는 논의를 했으나 ‘교회’명칭을 넣는 문제 때문에 서로 양보하지 못한 채 결국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남과 북의 대표단은 ‘장대현봉사센터’건립 자체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의견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봉사관 명칭에 있어서 ‘교회’라는 단어를 삽입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조그련 측이 난색을 표시해 결국 이 부분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다음 회의에서 또 다시 다루기로 결정했다. 조그련 강영섭 목사는 ‘장대현교회봉사관’대신에 그냥 ‘장대현봉사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해 달라는 입장을 끝까지 고수했다 강 목사는 이에 대한 항변으로 𔄞.15공동선언 이후 북남이 하나 되고 민족통일과 복음화를 위해 남조선 측의 도움이 절실한 이 시기에 굳이 ‘교회’라는 이름을 넣음으로써 그 의미가 축소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며 ‘교회’명칭 삭제를 줄기차게 요청한 것이다.
     
원래 이번 남측의 협상 대표단들은 북의 요구대로 추진할 예정이었으나 본국의 총회 관계자들이 “혹시 북측 당국의 사정상 이 건물을 교회 용도와는 무관하게 사용할 가능성이 있으니 반드시 교회명칭을 넣어야 한다”는 최종 합의안을 마무리했기 때문에 대표단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날 남측의 건물명칭 변경 요구를 북 조그련 측이 완강히 거절하며 협상은 마침내 결렬됐다. 장대현교회 복원 건축 프로젝트는 계획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남측의 ‘장대현교회봉사센터’요청이 마침내 결렬되다
       
이처럼 북경 협상에서 남북 양측의 이견으로 합의도출이 실패하자 복원 프로젝트는 차질을 빚게 됐다. 방북 대표단은 4월 16일로 예정된 남북 간의 협상을 부활절이 지난 이후인 5월경에 다시 만나 협의키로 했다. 귀국 후 보고를 받은 총회 실행위 위원들은 ‘교회’라는 명칭을 포함시키는 조건으로 건립을 허락한다는 단서를 붙여 대표단에게 협상을 일임했던 것인데 결국 실패하고 돌아오자 할 말을 잊은 듯했다.
       
그러나 총회 실행위원들은 북측의 명칭 거절은 이미 예상했던 것이라서 출발 하기 전에 이런 부분을 미리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협상 대표단은 북에 대한 이해나 조그련을 상대할 만한 사전 전략과 대책이 매우 미흡하였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북측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성사될 것을 대비해 총회 실행위는 구체적인 건축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신축될 장대현봉사센터는 폭 40m, 길이 60m에 4, 5층 규모가 될 예정이며 건축예산으로 총 30억원 이상을 책정했다. 그러나 일부 실행위원들 중에는 교회 복원 프로젝트가 결국 복지시설 타운으로 변경됨에 따라 장대현교회 복원의 상징적 의미가 크게 훼손되고 희석된 것에 대해 불만과 아쉬움을 나타내며 반대의사를 보였다.
      
나머지 실행위원들도 ‘봉사센터’라는 명칭만을 사용할 경우 교회와는 무관한 일반건물이 되기 때문에 완공 후에는 북측이 다른 용도로 사용할 확률이 많다는 지적에 동의하며 반대 의견들이 잇따랐다. 결국 그 후로도 남측 협상 대표단은 센터건물에 ‘교회’라는 명칭을 넣어 달라며 조그련 측에 정식으로 요청했으나 난색을 표해 결국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그 후 양측은 2016년 현재까지도 봉사센터에 ‘교회’명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이 프로젝트는 답보상태에 빠져있다. 남측의 주장은 평양에 건립하는 건축물은 단순히 사회봉사나 구제를 위한 차원만이 아니라 당시 ‘평양장대현교회’가 100년 전 조선교회 부흥운동의 시발점이었던 장소라는 상징성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이었기에 포기할 수가 없던 것이었다. 반면 북측은 남측의 여러 기독교 교단들로 인해 갑자기 불어난 교회건축 제안들에 대한 위기감과 함께 교통정리의 필요성을 느껴 자신들의 주장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예장 통합 측에 의해 평양에서 경기도 이천으로
     
예장 합동 측의 ‘평양장대현교회’복원 프로젝트는 북 조그련 측의 견해차이와 예장 합동 측 대표단의 북에 대한 몰이해와 협상능력 부재 등으로 결국 결렬되고 말았는데 정작 100주년이 되는 해인 2007년 들어서자 ‘평양장대현교회’복원 사업은 예장 합동측이 아닌 예장 통합 측에 의해 세워지게 됐다. 평소 예장 합동 측과 경쟁 관계에 있는 예장 통합 측은 비록 평양의 옛 장대현교회 터는 아닐지라도 남측 영토인 경기도 이천군에 교회를 복원해 기념하기로 한 것이다.
    
이 사업을 주도한 주체는 예장 통합 측 총회장을 지낸 한영제 장로였다. 한 장로는 경기도 이천에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을 개관했는데 한 장로가 관장을 맡고 한국교회사에 권위자인 감신대 이덕주 교수가 부관장을 맡으면서 100주년이 되는 해인 2007년에 맞춰 복원한 것이며 결국 2007년 9월 20일 경기도 이천 소재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옆 부지에서  ‘평양장대현교회’준공식을 갖고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100년 전인 1907년 당시 모습으로 평양 옛 터전에 세운다는 예장 합동 측의 프로젝트는 결렬되고 그와는 별도로 예장 통합측 기관과 인사들에 의해 5분의 1 크기로 재현된 것이다. 이천시 대월면에 세워진 교회당은 크기는 축소됐지만 옛 모습과 풍습을 그대로 재현했으며 남녀를 구분해서 앉았던 기역자(ㄱ)형으로 지어졌고 종탑도 그대로 세웠다.
    
복원된 교회는 원래 크기인 396㎡(120평)에서 82.5㎡(25평)으로 축소됐을 뿐 100년 전 당시 장대현교회를 거의 그대로 복원했으며 마당 한켠에는 당시 모습대로 투박한 모양의 십자가가 세웠고 지금은 흔히 볼 수 없는 성미함(쌀을 걷는 함)과 연보함(헌금함)도 비치했다. 또한 예배당 내에는 평양의 선교역사와 초기 선교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다. 예배당 외부에는 마포삼열, 리길함, 한석진, 길선주 등 평양지역 선교개척자들의 기념비와 ‘평양장대현교회’비석을 세워 평양대부흥의 성령을 이어받는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평양의 옛 장대현교회 자리가 있던 언덕에는 2007년 당시 ‘최고인민회의 의사당(일명 만수대 의사당)’과 김일성 주석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장대현교회당이 있던 장대재 언덕은 북 인민정권이 들어선 후 ‘만수대’라는 혁명적 명칭으로 개명되어 만수대의사당이 들어섰고 그 앞에는 1972년 당시 김일성 수상의 60회 생일을 기념해 20m 높이의 초대형 동상이 세워졌다. 그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타계한 후에는 반년 후인 2012년 4월에 김 국방위원장의 동상도 추가로 세워져 현재 두 지도자의 대형 동상이 자리 잡고 있는 형국이다.
 

▲ 경기도 이천에 설립된 ‘평양장대현교회’본당. 실제 크기를 5분의 1로 축소해 복원했으며 남녀를 구분해 앉았기 때문에 ㄱ자형이다. [사진제공 - 최재영]

 

▲ 경기도 이천시 대월면에 설립된 ‘평양장대현교회’준공식 순서지(2007.9.20.). [사진제공 - 최재영]

 

▲ 경기도 이천의 ‘평양장대현교회’본당과 종탑이 당시 모습대로 복원되어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 경기도 이천의 ‘평양장대현교회’마당에는 원석 위에 교회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진제공 - 최재영]

 

과연 북이 교회건축을 원하는가?
      
철저한 사회주의국가 수도인 평양 한복판에 해방 전에 있었던 교회당을 다시 복원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그 일이 과연 잘 성사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은 당시 상황을 지켜보던 필자의 커다란 호기심과 관심사였다. 그러나 결과는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이라는 행사 타이틀이 무색하리만큼 북 조그련 당국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북 사회 전체 현실에서 볼 때 이 프로젝트 자체가 기본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북측 당국은 해당 교단의 이벤트성 사업으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비교적 종교의 자유에 제한을 받지 않고 교회설립 또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남측 영토에서 교회를 세우는 것과 철저한 사회주의 국가인 북측 영토에 교회를 세우는 것은 그 의미와 시사 하는 바가 다르다. 그래도 협상 당시 북측이 승인한 ‘장대현’이라는 이름으로라도  봉사센터를 세웠다면 지금은 그 건물이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남측 협상단이 교회명칭을 넣는 문제를 고집하지만 않았다면 성사됐을 것이다.
     
북의 진정성은 북 영토에 교회당을 하나 짓는 것보다 남북 통일문제와 민족의 자주적인 공조문제에 더 큰 관심이 있다. 북 조그련 측은 그런 차원에서 교회당 건축보다는 남측교회와 연대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아무리 남한교회가 수십억 원의 예산을 들여 제3, 제4의 교회들을 평양에 건축한다 해도 과연 보수적인 남한교회들이 생각하는 선교효과를 거둘지에 대해서는 계속 의문이다. 만일 30억원 이상이 책정된 이번 4, 5층 규모의 ‘평양 장대현봉사센터’가 칠골교회 앞에 실제 건축되었다면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평양에 세운 류경체육관처럼 남북교회간의 교류와 협력의 장으로 사용됐을 것이며 남북 화합에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물이 됐을 것이다.
    
그래도 ‘장대현’이라는 이름 석자라도 들어간 봉사센터를 세웠다면 필자는 아마 칠골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서 맞은편 봉사센터를 방문해 가볍게 운동을 하거나 문화생활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북측 영토에 교회당을 하나 더 짓거나 북한선교가 시급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하고 촌각을 다투는 일은 서로 화해를 도모해 평화를 성사시키는 일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계속)


(수정,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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