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르의 문학이라 하더라도, 현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SF가 되었든, 미스터리 스릴러가 되었든 말이다. 아무리 허무맹랑해 보이고, 현실에서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결국 그것들은 현실이라는 밑절미를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다. 태초 이래 새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미스터리 스릴러물이야 더 말할 것도 없겠다. 대부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서 벌어질 법한, 혹은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곤 한다. 물론 때로는 끔찍한 연쇄살인이나 엽기적인 살인 행각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미 우리 삶은 소설보다 100배는 더 엽기적이지 않은가!

▲ 히가시노 게이고, 『호숫가 살인사건』, 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8. [자료사진 - 통일뉴스]

참 글을 재미있고 실감나게 쓴다고 생각해 온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작품 역시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고민 중 하나를 꼬집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바로 교육이다. 그것도 우리 사회를 파멸의 길로 몰아넣고 있는 입시경쟁.

주인공 순스케는 재혼한 부인의 아들, 즉 의붓아들인 쇼타의 합숙과외에 참석하기 위해 한적한 지방의 호숫가로 찾아간다. 그 곳엔 부인인 미나코와 함께 세 가족이 이미 도착해 자녀들의 합숙과외에 동참하고 있었다.

이 네 가족들의 아이들은 대입을 앞둔 고교생이 아닌 초등학생들이다. 명문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우리로 치자면 족집게 강사를 초빙해 합숙해가며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뒤늦게 온 순스케를 불륜 관계의 내연녀 에리코가 찾아오고, 상황은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져가기만 하는데….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살인사건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두둥~! ……음.

죽을 때까지 경제적 걱정이 없는 1%들에게 자녀의 교육 문제는 단지 조금 귀찮고, 조금 신경 써야 할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다수 99%에게 자녀 교육, 특히 입시 문제는 그야말로 집안을 통째로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문제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부모들은 오직 돈 만이 생존의 목표가 되어버린 비정한 세상 속에서 자기 자식만큼은 낙오되지 않도록, 그야말로 교육에 올 인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 교육이 그나마 가장 확실한 안전판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일본의 치열한 입시전쟁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모든 이들이 인정하듯, 그러한 비정상적인 입시전쟁은 더 이상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역시 명문 대학을 가기 위한 과정으로 명문 중고교, 명문 초등학교에서 명문 유치원까지 그 연령대가 내려간 지 오래다.

도저히 제정신이라고는 할 수 없는 기형적인 현상들이 ‘주류’가 된지 오래라는 소리. 하지만 그런 강압적인 그리고 무의미한 교육 열풍이 낳은 결과는 무얼까. 그것은 매년 약 300명 정도 학생들의 자살이다. 그리고 해마다 5만에서 8만 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탈학생화다. 스스로 학교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른 바 사회와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이 없으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회. 그런 사회를 과연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회의감이 들지만, 아무튼 우린 이미 그런 미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한일관계가 여기에서만큼은 환상의 콤비가 되는 순간이다. 하긴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어느 나라라고 여기로부터 100%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인간을 인간이 아닌 소모품, 상품으로 등급을 매기는 작태 말이다.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교육 문제와 함께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가족 간의 유대와 믿음에 대한 메시지도 담겨있다. 스와핑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소재까지 자유자재로 삽입하며, 저자는 이 시대 일본의 자화상을 씁쓸하게 고백한다.

물론 작품은 소설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것이 100% 허구가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도 역시 우리가 도망칠 곳은 없어 보인다. 우리는 시간적 차이만 있을 뿐, 그렇게도 미워하는 일본이 걸어온 길을 차근차근 따라가고 있다. 한심할 뿐.

저자는 어찌 보면 스릴러 장르에서 매우 식상할 수도 있는 입시문제, 가족 붕괴, 불륜 등의 주제를 이용해 또 다른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결말 부분에서는 예상 밖의 반전과 함께 갑작스런 감동도 전해준다. “앗! 이게 뭐야?”가 절로 튀어나오는. 역시 히가시노!

아울러 살인사건 이후 전개되는 네 가족의 심리 묘사와 대화, 행동의 표현이 탁월하다. 덧붙여 결말 부분의 히가시노 다운 여운과 감동까지. 2004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기회가 된다면 한 번 감상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교육 문제에 있어, 부모들은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이 이렇게 하니, 어느 수준까지는 따라가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수준의 끝은 없을 것이며, 또한 정해진 룰, 어쩔 수 없는 현실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은, 때문에 너무도 슬픈 변명이다.

최근 교육부의 어느 아주 잘난 양반이 국민들을 개·돼지로 표현해 물의를 빚고 있다. 뭐 솔직히 그런 부류의 인간들의 망언에 대해선 이골이 난 지라,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교육부라는 간판 아래 이따위 인간들이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긴 하다. 솔직히 그의 솔직함에 탄복했다. 그따위로 국민을 우습게 아는 인간들이 정부나 각 부처에 널렸으니, 사드를 지들 맘대로 하고, 한반도를 지옥으로 만들고 있지 않는가. 최소한 이 사람은 위선적이진 않은 셈이다.

교육은 훈육이나 통제나 이따위 단어로 대체될 수 없다. 그래선 안 된다. 타고 날 때부터 계급이 정해져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세상, 사회는 멸망함이 마땅하다. 그딴 사회가 존재하니 개와 돼지를 들먹이는 금수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저런 금수들을 볼 때마다, 다시 한 번 교육의 소중함을 느낀다. 그리고 히가시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조금은 더 깊은 메시지를 느끼게 된다. 추리소설의 재미를 흠뻑 느끼면서도, 한 편으로는 일본과 우리의 ‘슬픈 동질성’을 확인하는 색다른 경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벌써부터 내 딸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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