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장군은 고려 말의 장군이다.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은 사헌부 간관(司憲府諫官)을 지낸 문신이다. 문신 가문임에도 최영은 병서와 무술을 익혀 무장의 길을 걷는다.

최영 장군이 활약할 때는 원명 교체기여서 정세가 어지러웠다.
위로는 홍건족 잔당 침입하고 아래로는 왜구들이 날뛰었다. 또한 요동정벌을 두고 이성계와 대립하기도 했다는데...
이후 정도전과 위화도 회군을 하여 혁명에 성공한 이성계에 의해 숙청당한다.

아무튼 최영 장군은 어릴 적 아버지가 남긴 유언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최영의 아버지가 남긴 유언은 이렇다.
“너는 마땅히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이 말의 뜻을 일반적으로 해석하면,
황금이 뜻하는 권세와 부귀, 허영 따위를 하찮은 돌처럼 여겨 얽매이지 말고 양심과 소신에 따라 행동하라는 의미가 된다.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뭔가 부족하다.
일단 권력과 재물, 부귀를 부정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최영 가문이나 최영 장군은 권력의 상층부에 있었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다. 황금이 상징하는 권력과 재부를 부정하면서 권력을 가진다는 말은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 심규섭/수석도/디지털회화/2015.
패랭이꽃은 ‘뜻대로 되리라’라는 상징을 가지고 있고 사마귀는 그냥 자연이다.
화원들은 수석을 그릴 때 특별한 색을 넣지 않고 수묵으로만 그렸다. 일종의 자기수양의 과정이거나 미술의 기초능력을 연마하는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장식성이 약하다. 사실 돌을 소재로 그리면서 장식성을 높이려면 사실적인 묘사와 진한 채색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장식된 돌은 반대로 ‘지조와 절개, 자발적 청빈’이라는 내용성이 약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수석의 색을 최대한 단순하게 하고 꽃이나 곤충을 그려 부족한 색이나 단조로움을 보완한 것이다. [자료사진 - 심규섭]

 

또한 유학문화나 조선시대 문화에서 돌(괴석, 수석)은 황금과 대비되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선비들은 괴석에게 인문학적 가치와 상징을 부여했다. 화려하고 멋있는 돌이 아닌 평범하고 못난 돌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돌은 선비들에게 변치 않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었고, 백성들에게는 장수의 상징이었으며, 궁중회화에서는 변치 않는 대지, 땅의 상징이었다.
선비들은 풍파에 구멍이 숭숭 뚫린 못난 돌을 좋아했다. 특히 중국의 큰 호수에서 있다는 태호석이나 개성 근처 골짜기에서 나는 침향석, 제주도의 수포석 따위를 사랑방에 두고 심신을 수양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심지어는 선비들이 수양을 위해 그리는 문인화의 첫 시작은 언제나 돌을 그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최영 가문은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지낼 정도로 뛰어난 학문적 기풍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최영이 돌이 가지고 있는 상징을 몰랐을 리는 없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말을 확대 해석하면 이렇다.
황금은 그야말로 권세, 재물, 부귀 따위를 뜻한다.
돌은 어려움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학문적(사회적) 양심을 굳건히 지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권력과 물질적 재부를 사회적 양심에 맞게 수용하고 인간의 존엄이나 공동체의 요구에 따라 사용하라는 의미이다.

▲ 심규섭/수석도1/디지털회화/2015.
우리그림에서 돌을 자유자재로 그릴 수 있는 미술적 능력은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돌과 바위는 그림의 배경을 만들고 구도를 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시에 바위의 표현능력에 따라 전체적인 작품수준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자료사진 - 심규섭]

 

조선의 선비들이나 양반 중에는 부자가 별로 없었다.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서 흉년이 들면 정부에서 환곡을 풀어 백성을 구제했다. 하지만 그것도 부족하면 양반들이 가진 재산을 내놓아 백성들을 구휼했다. 재산을 가지고 있어 보았자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백성들에게 내놓아야하는 사회적 규범이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양반이나 선비가 부자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의 최고 부자는 대부분 왕족이었다.
물론 조선 말기 외세의 침략과 철학의 부재에 의해 삼정(三政)이 문란해지면서 부정한 돈과 권력을 탐하는 양반들이 활개를 치게 된다.

권력과 재물을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사람이 노동과 사회적 활동을 통해 만들어내는 권력과 재부는 아름답다. 이런 권력과 재물을 굴려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여 다시 백성들에게 환원될 때 가치는 빛난다.
그래서 선비들은 항상 못난 돌을 곁에 두어 권력의 남용과 재물의 허영을 경계했다.
길거리에서 발부리에 걸리고 쓸모없는 돌이라고 함부로 대하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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