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삶을 기대하는 유토피아적 희망은 삶의 무시무시한 리얼리티와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먹고 자란다. 세상은 아름다운 만큼이나 추하고, 사람들은 선한 만큼이나 악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있지만, 짐승만도 못한 인간도 있는 법이다. 이러한 세속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삶의 리얼리티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환등상의 등불을 끄게 만드는 힘의 근원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유토피아적 희망, 소박하게 말하자면 좋은 삶에 대한 기대는 약간은 가슴 쓰라린 세상의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물정(物情). 세상일이 돌아가는 실정이나 형편을 말한다. 세인의 인심이나 마음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흔히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말은, 그다지 칭찬은 아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여전히 나에겐 완전히 해석되지 않는 어려운 단어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스스로 생각해도 전혀 세상 물정에 밝아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김이설 작가의 소설 『환영』을 그야말로, 무참한 마음으로 읽으면서, 문득 나의 아둔함이, 어리바리가 끝내 누군가의,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 주변 사람들, 부모와 아내, 자식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 어쩜 이미 그들에게 불행을 안겨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놀랄 만큼 두려웠다.

동시에, 스스로 생각하는 아둔함이, 사실은 아둔함이 아닌 무책임과 회피, 나태와 방관은 아니었는지, 정녕 그렇다면 그 무지막지한 잘못을 어찌 해야 할 것인지, 눈물이 날만큼 두려웠다.

사실 그랬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진정 책임을 느끼고 행동했던 것이 얼마나 되었는가. 치기와 어리석음을 정의와 용기로 생각하고, 무책임과 회피를 고뇌와 결단으로 둔갑시키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나는 딱 그만큼 형편없는 녀석은 아니었을까.

나는 다만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남산골 샌님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짐짓 말만 주절거린 한심한 건달, 떠버리는 아니었나. 주변 사람의 땀과 눈물에 기생하며, 나의 땀을 고의로 누락시킨 양아치는 아니었나, 그런 참혹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이내 주저앉아 버렸다.

어느덧 세상이 마냥 아름다운 곳은, 것은 아님을 알아버린 나이다. 물론 그 이전 어린 시절에도 그렇게 느끼진 않았지만, 그 강도는 나이 듦과 더불어 훌쩍 더 늘어나 버렸고, 지금은 절반의 냉소와 절반의 희망이 늘 치열하게 맞붙는, 그리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도 아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 인생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어 보였다. 그저 한심하게 한심했다.

도대체 이 세상의 무엇을 꿰뚫어야 비로소 세상 물정에 밝다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을 깨달아야 난 세상물정 좀 아는 녀석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주식에 빠삭해야 하고, 경제에 통달해야 하며, 인맥관리의 달인이자, 부동산의 흐름을 눈 감고도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아니면 재테크의 달인? 투자의 귀재? 인문학과 심리학에 정통한 선비를 가장한 장사꾼?

▲ 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사계절, 2013. 12. [자료사진 - 통일뉴스]

나에 대한, 두려움과 한심함이 교차하며, 문득 싸가지 있는 학자가 반가운, 아주 슬픈 세상에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저자 역시 반갑기에 희귀한 이들 중 하나였음을 고백한다. 각자의 소중한 삶은 선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책을 시작한 저자는 덜 실망할 수 있지만, 때문에 덜 희망하게 되는 세상에 대한 대화를 독자와 나눈다. 마땅하지 않은 세상, 결코 만만치 않은 세상을 덜 아파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때론 세상의 민낯을 보여주고, 때론 그럼에도 희망이 있음을 증거 한다.

‘자신의 처지를 공통감각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한, 자신의 삶에 대한 절실하고 치열한 생각은 팔자타령을 크게 벗어나지 못 한다’는 저자의 지적이 따끔하다. 아울러, 비판이란 본래 투덜대지 않으면서도 세상에게 불만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말 앞에 나의 비겁함을 숨길 수 없다. 형편없이 형편없는 나의 형편없음에 좌절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나에겐 여전히 용기가 필요함을 느끼게 해준 고마운 책이다.

책은 수준 높은 서평집이기도 하다. 하나의 주제를 이야기하며, 그것과 연관된 의미 있는 책들을 호명하고 인용한다. ‘노동’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하며 마르크스의 『임금노동과 자본』, 엥겔스의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처지』를 호명하는 식이다. 책을 덮고 나면 수많은 철학자와 경제학자, 역사가와 사회학자를 만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세상물정을 잘 안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결국 도돌이표다.

‘상식’에서 ‘언론’ ‘성공’ ‘명예’ ‘섹스’ ‘남자’ ‘자살’ ‘노동’ ‘인정’ ‘가족’ ‘죽음’에 이르기까지 25개의 키워드를 통해 저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들여다본다. 사회학자의 눈과 평범한 우리의 눈으로 함께 바라보려는 노력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때문에 주눅 들지 않고, 또한 얕지 않다.

어쩔 수 없는 비관이 배경 음악으로 흐르지만, 사소하지만 빛나는 희망 역시 감출 수 없다. 저자의 고의적 배려라 해도 전혀 괘씸치 않다. 자신이 소개한 책들에 대한 친절한 안내까지 부록으로 담았으니, 인상 깊었던 키워드에 대한 보다 세심한 들여다보기도 가능케 도와준다. 고마운 일이다.

저자의 표현처럼 ‘배운 괴물’들이 지배하는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서 덜 배우고 덜 빠른 이들은 착취나 이용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일개미와 볼트의 역할에 안주하게 만든다. 지금은 그 정도가 아니라, 일개미조차 될 수 없다는 절망에 몸부림치다 스러지는 이들이 무수하다.

그런 세상에서 나의, 우리의 좋은 삶을 지키기 위한 기술을 책은 알려주고 있다. 적당한 공격과 방어, 그것은 교활함이 아닌 영리함을 갖추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영리함은 세상의 이치를 어느 정도 알았을 때, 역시 가능하다. 저자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그 이면의 세상을 동시에 보여준다. 실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것처럼,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세상,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그렇게 단호하게 냉정하고, 단정하게 아름답기도 하다.

나의 나태와 방만과 어리석음과 후안무치로, 고통을 겪고 있다. 자업을 했으니 자득은 당연하지만, 자득이 행여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할 수 있다는 공포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짐짓 믿어버리고 살아온 무책임이 심한 미안함으로 다가온다. 날 아껴주는 이들의 존재를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뻔뻔함에 스스로 무참하고 참담하다. 부끄럽다는 표현은 과분하다.

어쭙잖은 오만으로 그렇게 세월을 낭비해 온 것은 아닌지, 돌이켜본다. 그리고 당최 여전히 알 수 없는 세상 물정을 앞으로 어떻게 알아가야 할지 난감하기도 하다. 하지만 빤한 이야기지만, 늦었다 해도 시작은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있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무모하게 다시 들여다 볼 생각이다.

좋은 책을 만나면 늘 신세를 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에게 부채감을 안길 수 있는 그런 책을 써보고 싶다는 당토 않은 생각도 해본다. 자학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늘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 세상이 썩었다고 비관하는 시간보다는 나의 부패를 경계하는 시간이 더 필요한 지금이다. 내 삶의 상책은 무엇인가, 나는 얼마나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한 용기가, 지금 나에겐 절실하다.

“당신의 이 삶은 또한 그저 세계의 사건 중 한 조각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의 사건 전체이다. 다만 이 전체는, 한 번의 시선으로 개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각 구성원은 어떤 의미에서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할 권리가 있다.” - 슈뢰딩거, 『물리학자의 철학적 세계관』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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