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아름답다, 고 믿으며 살아가는 이들은 눈물겹지, 라며 생각하고 살아간다. 뭐, 그렇다고 내가 세상을 오직 아비규환이나 생지옥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지극히 당연하지만, 이 우주에서 딱 잘라 정의할 수 있는 것은 드물다. 고로, 세상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늘 제멋대로다.

그럼에도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새파란 희망 보다는 온통 잿빛, 핏빛이다. 소설보다 더 살벌한 일들이 눈앞에서 버젓이 일어난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리 잔인해졌지? 라고 묻기엔 민망할 정도의 무자비가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이다. 사실 우린 잔인한 지 좀 되었다. 그리고 난? 살짝 새가슴이다.

때문에 굳이 참혹한 이야기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는 하드보일드, 범죄 스릴러 소설을 왜 읽는가, 물으실지 모르겠다. 이쯤에서, 그럼 저자는 왜 하드보일드를 읽는지 들어보자.

이 피로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애티튜드로서의 하드보일드. 집단의식이나 이데올로기에 중독되어 달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쉽게 타협하지 않고, 도취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꾸준히 걸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취해야 할 태도임을.

▲ 김봉석,『나는 오늘도 하드보일드를 읽는다 』, 위즈덤하우스 펴냄, 2015. 8. [자료사진 - 통일뉴스]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은 때로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악과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대부분 우리 일상생활 속 숨어 있는 평범한(!) 악을 쫓는다. 소설 말미에 등장하는 범인, 혹은 그 어떤 악마가 기실 평범한 우리 이웃이었음이 드러날 때, 우리는 팽팽한 소름과 함께 전율을 느낀다.

그렇다면 그런 악과 맞서 싸우는 이들은 마블의 슈퍼 히어로들일까. 그렇지 않다. 초인적 능력의 영웅이기보다, 주어진 현실 속에서 그저 눈앞에 닥친 일을 묵묵히 처리해 나가는 것뿐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그들의 태도에 주목한다. 정의롭지 못한 체제, 혹은 대상 앞에서 그들은 그 어떤 거창한 명분이나 사명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세상이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거나, 정의는 반드시 승리 한다는 따위의 환상도 없다.

동시에 그들은 쓸데없이 오버하지 않는다. 지독한 절망에 빠지지도 않고, 혁명을 꿈꾸지도 않는다. 그냥, 그저 그렇게 생존해 나가기 위해 발버둥 칠뿐이다. 바로 그것이 빌어먹게도 위대하다. 자신의 자리를 말없이 끝내 지켜나가는 것. 하드보일드를 통해 우리가 위안 받는 것은 권선징악의 고루한 빤함이 아닌, 평범한 이들의 고군분투인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을 보면, 알보다 더 작은 이들도 이미 아시겠지만, 이름 없는 이들이 묵묵히 제 자리에 있기에 그나마 어느 정도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들이 없다면, 애초 팍팍한 이 세상은 어쩜 진즉 더 황당한 무간지옥으로 변해버렸을지 모른다.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들이 꼭 공권력일 필요는 없다(왜 굳이 공무원을 이렇게 부르는가. 나도 참). 평범한 시민들도 제각각 땀 흘리며 분투하는 사이, 스스로 빛나곤 한다. 전혀 쓸데없는 자학이나 비관, 절망이나 냉소보다는 그저 그렇게 제 자리에 있는 이들의 삶은 때문에 수많은 이야기를 말없이 전한다.

그런 삶의 태도는 순응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바보들도 순응과 복종을, 타협하지 않으며 제 할 일을 하는 것과 구분할 수 있다. 고로, 야매는? 어지간하면 바로 걸린다. 수 쓰지 마시라.

전혀 평범하지 않은, 과하게 비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인 인사가, 공공연히 상식과 정의를 떠들어대는 것을 심심하지도 않은 데 봐야 하는 순간이 있다. 고역이지.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거나 뭐, 암튼 인정조차 하지 않으며, 오직 억울하다고 얼굴에 힘을 쫙 풀며 상식과 정의를 중얼거린다. 공허하지만, 또 마냥 그렇지도 않은 게 거기에 순간 넘어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걸 보는 것도 고역이지.

어쩌면 하드보일드는 하찮게 잔인하고 절망적인 세상에 보다 뻔뻔히 맞설 수 있는 용기, 자세일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쓰레기 같은 인간을 목격했을 때의 반응. 그들에게 정말 한심한 마음을 담아 쓴웃음을 지어줄 수 있는 것, 그리고 혹시나 아무도 안 볼 때에는 한 대 콱 쥐어박아줄 수 있는 여유로움이랄까.

우연인지, 우연을 가장한 인연인지, 내가 좋아하는 스릴러의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무언가 하나 부족한 듯한, 결핍되고 위태로운 이들이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이 캐릭터는 이제 신화가 되었지만),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커더’, 존 D. 맥도널드의 ‘트래비스 맥기’ 등 알콜 중독자거나 순정 마초거나 아님, 때때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웃과 약자에 대한 끝없는 연민과 애정이다.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늘 강자를 조롱하고, 약자를 보호한다. 이게 바로 하드보일드 소설의 매력이자, 내가 이 장르를 즐기는 이유다.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에. 때로 하루에도 수없이 그 반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책은 다양한 하드보일드 작품을 소개하며, 그 안에 담겨진 메시지를 독자에게 알뜰히 전달한다. 물론 독자에 따라 어떤 작품은 그야말로 수 천 가지로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이 책은 저자 개인적인 감상이자, 태도이다. 우리는 그저 저자의 느낌을 공유할 뿐이다.

하지만 간결하고도 힘 있는 문장을 통해 다양한 작품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매우 바람직한 책이라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더불어 이런 종류의 책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 즉 소개된 작품들을 전부 다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열의를 불태우게 된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물론 유쾌한 유혹이다.

범죄소설은, 당연히 그 시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교과서 중 하나다. 또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과 마음을 읽기에도 그만이다. 저자의 이야기인데, 공감한다. 엽기적인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는, 딱 그렇게 사회가 엽기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범죄 드라마나 소설이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 미국은 다 이유가 있다, 라고 감히 해석해본다. 현재 미국은 사상 최악의 총기 사고로 또 충격을 먹었다. 그 ‘사상 최악’이라는 수식어가 이번에는 부디 오래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책에서 아쉬운 점은 국내 작가의 작품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국내에서는 아직 하드보일드가 그리 각광 받는 장르가 아닐뿐더러, 토종 작품들이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중원 어디에선가 오늘도 열심히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을 고수들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화려한 부상을 늘 기다리고 있다.

과거에 비해 우리 영화나 문학이 한층 잔인해졌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종종 들린다. 아울러 아이들의 폭력성이 잔인한 게임이나 영화 때문이라고 헛소리를 배도 안 부르게 주절거리는 이들도 있다. 뭐 바보는 끝내 바보로 사시라 하고. 암튼 왜 과거보다 잔인한 영화들이 많이 나오는지, 그리고 왜 이젠 어느 정도 잔인하지 않으면 눈 하나 깜빡 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는지, 그 이유는 어쩜 우리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희망이 없는 세상은 그렇게 점점 슬래셔 무비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비정한 세상 속에서, 잔인하고 절망적인 세상에서도, 나는 한 권의 하드보일드를 들고 집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으려 발버둥 칠 것이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누군가로부터 강한 공격과 조롱과 비난을 받아 상처 입은 그대여. 부디 좋은 꿈꾸시라. 난 언제나 그대의 편이다.

“사랑과 상실감 속에서 밤은 항상 신성하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때에만 멋진 세상이 될 수 있다.” - 해리 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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