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 / 남이랑북이랑 대표)

 

강희남 목사님을 아주 강경한 통일운동조직 <범민련> 의장을 지내신 매우 과격한 반미 친북적 통일운동가 정도로 알아왔습니다. 저는 글과 강연을 통해 조심스럽게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해왔지만, 그 분은 대놓고 ‘양키 추방’을 외치셨습니다. 제가 북한과 친하게 지내지 않고 어떻게 남북 화해와 협력을 추구할 수 있느냐며 ‘친북’을 호소해왔다면, 그 분은 북녘이 남쪽보다 훨씬 자주적이고 더욱 통일 지향적이라며 북녘 조국을 적극적으로 찬양하셨고요.

▲ 강희남 목사 유고 자서전, 『한 목사의 생애와 사상』, 가림토

1994년, 10년간의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북한 및 통일문제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범민련 이름과 목사님 성함을 들었습니다. 아마 2000년대 초엔가 전주에서 한 잡지사 초청으로 그 분과 대담을 하느라 처음 만났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 제가 그 무렵 한 달에 한 번씩 만들던 ≪남이랑북이랑≫에 가끔 원고를 보내오시더군요. 제 딴엔 온건한 글투로 만들던 통일운동 소식지에 그 분의 과격한 글을 싣는 게 좀 부담스러웠지만, 80 중반의 어르신이 정성스레 쓰신 원고를 거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2008년 ≪두 눈으로 보는 북한≫이라는 책을 펴낸다는 얘기를 누구에게 들으셨는지 책 제목을 붓으로 써 보내오셨습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출판할 때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감사 인사조차 드린 기억이 없네요.

목사님의 둘째 아들 강익현 한의원장이 저의 통일운동 동지가 되고 제 학생이 되기도 했습니다. 두어 해 전 그 분 추모식에 초대 받아 추도사가 섞인 강연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 분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의 자서전을 읽고서야 어떤 분이었는지 어느 정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경의를 품게 되는군요.

그저께부터 읽은 자서전을 엊저녁 덮으면서 맨 먼저 드는 생각은 목사님께서 공부를 참 많이 하신 것 같다는 점입니다. 동서고금의 사기 (史記)와 경전 (經典)을 두루 섭렵하신 듯하거든요. 한학 (漢學)을 배우고 신학 (神學)을 공부하신 분이 영어는 언제 배우고 한글 문법은 언제 익히셨는지 의아합니다. 노인이라 맞춤법을 잘 몰라 단어를 틀리게 쓰신 줄 알았는데, 어학 공부를 너무 깊이 하신 탓인지 일부러 현행 철자법을 무시하고 당신의 철학이 담긴 한글 표기법을 고집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너무 친북적이라 북녘의 말투까지 따라 ‘련방제 통일’을 주창하시는 거라 생각했었는데, “소위 두음법칙이라는 것”은 “한낱 넌센스”요 “세계에도 없는 법칙”이라 ‘연방제’라고 쓰지 않으셨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아무튼 한학을 공부하신 분이 해방 이후 온 겨레가 한글을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도록 당신 나름의 어문학을 책으로 펴낼 계획까지 세우셨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리고 이토록 사랑했던 한글의 예술성을 서예로 보여주기 위해 한글 서예를 익히는 데 많은 시간과 정력을 들이셨답니다. 이 때문에 제 책의 표제로 서예 작품을 보내주셨는데, 저는 그 깊은 뜻을 모르고 무시했던 것이죠. 그러고 보니 돌아가시기 한 해 전이었습니다.

또한 한글을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도 몹시 사랑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목사이면서도 부모 선령의 제사를 모시며 강씨 문중 시제에도 참여해 헌관을 하셨다는 겁니다. 명절이 되면 조상에 차례 올리고 성묘하는 아름다운 예절을 소중히 여기셨다니 아마 남쪽의 수많은 목사들 가운데 유일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혁명가들이 대부분 시를 썼고, 우리나라에선 1980년대 민주화 투사들이 저항운동 수단으로 시를 많이 발표했습니다만, 그 분은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셨던 터라 시심이 더 깊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학자였고 민주화 투사였으며 혁명가였기에 시인이 되지 않을 수 없으셨겠지요.

그런데 목사님이 민주화 투사가 되고 통일운동가가 되셨던 배경엔 목사로서의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본래 목사라는 존재는 하느님의 집을 지키는 번견 (番犬)”이라는 것인데, 쉽게 말해 하느님을 위한 개라는 겁니다. 개의 사명은 도적을 보고 짖는 일이라, 독재와 분단의 지속을 추구하는 악당들에 맞서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위해 외치는 일이야 말로 하느님의 사역을 담당하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1977년 목사로서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감옥에 드나들기 시작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1980년대 한 번, 1990년대 네 번, 모두 여섯 차례의 옥살이를 하게 되셨고요.

이 가운데 1994년의 네 번째 투옥이 참 인상적입니다. 1994년 7월 25일 남쪽 김영삼 대통령과 북녘 김일성 주석이 남북 역사상 최초로 정상회담을 갖기로 했는데, 김일성이 7월 8일 갑자기 죽었습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해 외국의 많은 정상들이 조의를 표했는데, 김영삼은 조문은커녕 오히려 대북 경계령을 내렸습니다. 김영삼 정권의 이러한 배반과 표변에 따라, 정상회담 계획이 발표될 때는 환영했던 언론들도 김일성이 분단과 전쟁의 원흉이며 악당이요 독재자라고 온갖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이에 범민련 의장이던 목사님은 정말 가소롭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상회담 계획이 발표될 때 “잘난 언론인들과 학자들”을 포함해 “그렇게 잘난 애국자들”이 대통령에게 “안 됩니다. 김일성은 전범이요 독재자인데 어찌 그런 악당을 만나러 갑니까”며 말렸어야 하지 않았느냐는 거죠. 이런 “가증스러운 언론인들이요 지성인들”에 맞서 조문하려고 시도라도 해보는 사람이 남쪽에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나섰답니다. “북에 조문간다. 길 비켜라”고 쓴 종이 팻말을 들고 기자회견을 하고 성명서를 낭독한 뒤 수행원과 택시를 잡아타고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판문점으로 향하다 문산에서 붙들려 구속되었던 겁니다. 국가보안법 상 잠입 탈출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지요. 70 중반의 노인이 기자회견하고 성명서 낭독한 뒤 택시로 군인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판문점 쪽으로 향한 게 어떻게 ‘잠입’이 되고 어떻게 ‘탈출’이 되겠어요? 이른바 ‘문민정권’이 저질렀던 패악이었지요. 당시 그를 감옥에 보냈던 공안검사가 지금은 국무총리 자리에 있는 황교안이었답니다.

한편, 목사님의 자서전을 읽다 보면 이토록 과격한 투사가 너무 인간적이라는 점도 느낍니다. 감옥에서 교도관이 잘못해 밥 한술이 복도에 떨어졌답니다. 목사님은 소식을 하시느라 밥이 남아돌았지만 밥을 버리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복도로 나가 떨어진 밥 한 술을 씻어 드셨답니다. 이 세상에서 기아로 죽어나가는 사람이 하루에 5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어찌 밥 한 톨이라도 버릴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나아가 자서전을 통해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목사님이 지독한 원칙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아울러 소신과 원칙이 지나쳐 오히려 흠이 아니었는가 하는 아쉬움도 생깁니다. 첫째, 소신과 원칙이 지나치니 맞춤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어문학에 대한 당신의 철학을 중시하는 바람에 제 잣대로는 자서전의 표기법이 엉망이거든요. 자서전 첫머리에 밝혔기 때문에 오해는 피할 수 있지만 젊은 세대들과의 소통엔 문제가 생길 수 있지요. 둘째, 소신과 원칙이 지나쳐 대인관계가 원만할 리 없었을 것 같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이야 사후 평가가 다르니 접어두더라도 김대중 대통령이나 문익환 목사 같은 분은 평화통일 운동세력 가운데서 긍정적이거나 호의적 평가를 받는 분들인데, 그 분들도 원칙을 저버렸다고 비판하시며 관계를 끊으셨다니까요. 셋째, 소신과 원칙이 지나치니 속된 말로 융통성이나 부드러움이 너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협상하다보면 양보할 수도 있는데 당신의 소신과 원칙을 조금이라도 굽히는 것은 굴복이라고 여기셨던 모양이에요. 당신의 통일철학이나 범민련의 목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통일부와 협상해 북녘을 오가면서 좀 더 대중적으로 통일운동을 전개하실 수 있었을 것 아니냐는 아쉬움이 남는 것입니다. 넷째, 소신과 원칙이 지나치다보니 2009년 90 문턱에서 허망하게 돌아가신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청춘, 90 회갑”이란 말을 북녘 관리에게서 들은 게 2000년대 초 평양에서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 소신과 원칙 때문에 북녘식 회갑도 지내지 못하고 떠나신 거죠. 하필 자서전 끝 부분에 “기다림의 아름다움! ..... 마침내 저 민중해방과 통일대로 상에서 저 역사의 쓰럭이들이 말끔히 치워지고 무궁화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어느 봄철 우리 남북으로 트인 대로 상에서 남남북녀가 서로 뜨겁게 껴안고 기쁨에 넘쳐 통곡하는 그날을 기다리자!”고 해놓고도, 왜 그렇게 서둘러 가셨느냐는 겁니다.

하기야 그 때 떠나지 않으셨어도 오늘까지는 온전히 계시지 못하셨으리라 믿습니다. 1977년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다 처음으로 구속되셨는데, 그 독재자의 딸이 지금 대통령이 되어 있잖습니까. 1994년 김일성을 조문하겠다고 택시로 판문점을 향하다 네 번째 옥살이를 하셨는데, 그 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감옥에 보냈던 ‘권력의 주구 (走狗)’가 지금 국무총리가 되어 있잖습니까. 이들이 아직도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가로막으며 나라를 이 꼴로 만들어가는 것을 보시면 아마 화병을 얻으실 게 분명하니 차라리 그 때 잘 가셨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목사님은 당신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개’로 충실하게 살다 가셨습니다. ‘권력의 개들’이 얼씬거리지 않을 하느님 곁에서 평안하게 지내시면서 여전히 조국의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목사님의 뜻을 받들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원고는 6월 5일 전주 노블레스웨딩홀에서 열린 강희남 목사 7주기 추모식 및 유고집 출판기념회에서 서평 겸 독후감으로 발표한 글입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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